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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3일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질투하라(민수기25장) 이정식 2020-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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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래서 진한 사랑입니다. 아가서 8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8:6)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는 질투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지켜 보존하기 위해서, 그들을 혼란케 하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어떤 대적들에 대해서는 아주 강하게 질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로 볼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택한 백성을 얼마나 진하게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를 지키는 것이 사랑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다른 여자 다른 남자를 쫓아가는 데도 그 마음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고 해도 내 짝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보이면 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이게 바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이 뭐 질투하시냐하고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지키시기 위해서 어떤 질투로 행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또 특별히 여러분과 저에게 권면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질투하심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질투를 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비느하스입니다. 아론의 아들은 엘르아살이고 엘르아살의 아들이 비느하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머물렀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금한 이방여인과의 음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그렇게 했고, 단지 이방여인과 음행하는 일을 넘어서서 이방여인이 섬기는 바알브올이라는 이방신까지 섬기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는 솔로몬이 많은 이웃 나라 여인을 공주로 취한 후에 그 민족이 섬기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적자기결정권이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율법에 보면 신명기 73절에 또 그들(이방백성)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를 삼지 말라고 하셨고, 또 출애굽기 205절 십계명에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과 참 기쁨에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그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이 율법은 유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기 시작했고, 그 신들에게 절하기 시작했고, 민수기 253절에 보니까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어긴 대가가 몇 가지 있는데, 민수기 25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수령들을 잡으라 했으니, 음행이 한두 사람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아주 자연스러워져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도덕율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심했으면 수령들을 잡아 죽이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뿐만 아니라 6절부터 보면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라고 하고 있고,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염병으로도 임했는데,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라고 했습니다. 24천 명의 수령과 백성들이 거기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울지 않을 수 없으니 울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용서를 구하고 잘못됐다고 하며 울고 있는데,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25:6b)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수령들을 향한 분노의 명령이 내리고 백성들은 울고 있는데 버젓이 한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여인을 데리고 자기 침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뭘 말하는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왔던 하나님의 말씀이 삽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을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창을 들고 그들 뒤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방 여인은 조금 후에 볼 것인데, 이 여인도 미디안 민족의 지도자의 딸이었습니다. 비느하스가 이들에게 행한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일도 벌벌 떨릴 텐데,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해한다는 것,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없으면 행해져서는 안 되는 행동입니다. 살인이니까요. 그들에게도 가정이 있고 자녀들도 있을 텐데 무슨 권리로 타인의 생명을 그렇게 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오늘 깜짝 놀라며 배워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민수기 2511절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25:1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의 행동을 보장해주고 계십니다. 네가 한 행동은 하나님, 나의 마음을 따라 행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용서와 관용이 주된 가치관이 된 시대에 이런 말씀은 놀라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돌로 죽이고, 자녀들이 개종했다고 명예살인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런 일을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받는 인상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 사건에 관해서는 비느하스의 손을 들어주셨고, 우리에게도 비느하스의 마음을 품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12-13절을 이어서 보시면,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25:12-13)

   비느하스만 보장받는 게 아니라, 비느하스의 직분까지 영원히 보장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24천 명이 죽은 이후에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될 수 있었지만, 비느하스의 한 번의 결단과 결행이 이스라엘 백성의 속죄를 이루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비느하스를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받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다는 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명기 73절을 어겼고, 출애굽기 205절을 어겼습니다. 언약을 어겼다는 말은 나는 하나님의 보호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귀하게 여기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좀 더 귀하게 여기기 원합니다. 어느 만큼 귀하게 여기기 원하는가 하면 타인의 자율권을 제어하고 심지어 타인의 생명까지 가서 훈계하고 때로는 냉정하게 교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도록, 담대하게 행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했나요? 아브라함에 언약하기시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습니다. 복의 사람을 저주하면 그가 저주를 받고, 복의 사람을 축복하면 그가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곧 복의 사람을 질투하면 거꾸로 하나님의 질투를 당해 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616-18절에는 그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종 모세와 아론을 질투하였으므로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고 아비람과 그 일당을 덮어버렸으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이 악한 무리들을 소멸하였다.”(시편10616-18)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좀더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좀 전에는 이방여인과의 관계였지만,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지도자들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단과 아비람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습니다. 이들이 아론과 모세를 질투하여 일어나기를 우리도 하나님의 영을 받은 지도자들이라고 대적하였을 때, 하나님은 땅을 갈라서 다단과 아비람을 삼켰습니다. 또한 시편에서 그들을 칭하기를 악한 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정말로 사랑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서로 어겼을 때 주님은 악한 무리라고 말합니다. 회중 전체를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내 자유야, 내 결정이야, 내 인생이야다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언약이 체결되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고 더럽히려 한다면 주님은 이 사람들을 악한 무리라고 칭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함께 한가지로 신앙생활 하고 있지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서기 원하십니까? 그런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다 그런 특별한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에 감 놔라 팥 놔라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이것이 확실해져야 다른 사람을 충고할 수도 있고 하나님 말씀으로 권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시기 전에 세상 법정 곧,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요한복은 194,6절에 보니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를 심문해보고 하는 말이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요한복음 19:4,6)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법의 테두리 안에서 죄가 없으셨습니다. 소극적으로 죄만 없으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상 법을 성실히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동전을 꺼내어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724-27절에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에게 관세와 국세를 내는 사람은 타인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세를 면하는 게 정상이지만, 그러나 실족하지 않기 위해 물고기 입에서 돈 한 세겔을 얻어서 세를 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세상의 법을 넉넉히 그리고 성실히 따르셨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영적인 하나님의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은혜가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면 손가락질 받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우뚝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세상의 법조차 따르지 않으면서 영적인 일이라고 빙자하는 사람은 그저 악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데 아무런 훼방거리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 법을 넉넉히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 법을 못 지켜서 쩔쩔 매면서 교회 일은 영적인 일이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만큼 죄가 없는 사람이 못됩니다. 단지 주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어주셨기에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가 오늘은 넘어졌어도 내일은 더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지하면서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상 법에 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약간 하나님의 질투의 마음을 담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에 세상 법에 성실히 협조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복의 사람은 자기 복을 기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선택받은 자는 타인을 향한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까지 다 동의하고 인정한다고 합시다. 그래도 우리가 창을 들고 달려가서 하나님의 질투를 대신하여 질투할 담대함이 있겠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더 많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재판장도 있고, 의사도 있고, 소방관도 있습니다. 이들은 한 사람의 생명과 삶을 다루는 사람들입니다. 요즈음은 판사도, 의사도 다 비방거리가 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말 많은 고민을 하며 판결을 하고 집도를 합니다. 재판장들은 자기의 판결로 사형이 선고될 수 있습니다. 또 몇 년을 감옥에 옥살이를 선고하기도 합니다. 이런 판결을 내려야 하는 재판장들이 어찌 편안하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법정에서 무겁고 엄중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재판장도 잠 못 드는 밤을 지새며 수많은 뒤척임과 고민을 합니다. 때로 잘못된 판결을 하여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잘못된 선고를 내리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신할 수 있을까요? 혹은 잘못될 수 있으니 사형제도를 없앨까요? 더러 그런 사람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잘못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말 성실하게 고민하고 잠 못 들며 뒤척이며 고민하고 선고를 합니다.

   의사들도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를 집도하면서 고민을 하지 않겠습니까. 잘못된 수술에 오리발 내미는 그런 의사들만 있지 않습니다. 잠 못 드는 밤, 뒤척임과 고민, 때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할 것입니다. 소방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더 건질 수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죄책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소방관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도 그 중요한 순간을 위해 성실하게 임하면서 잠 못 드는 밤, 뒤척임과 고민, 때로 죄책감을 갖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 마침내 결단하고 언도하고 집도하고 구출하거나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와 같이 민감하고 예민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여러분과 저도 그런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 도대체 나에게 타인의 삶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그 사람이 전적으로 가진 삶의 자율권에 대해서 감놔라 팥놔라 할 수 있는 그런 권리, 그런 담대함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느하스와 같이 말이죠. 이런 것이 준비되는 과정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여름성경학교도 행하고, 수련회도 가고, 성탄절 행사도 하면서 참 신앙생활이 재미있고 유익한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앙은 진중한 것입니다. 이 신앙은 장엄한 것입니다. 이 신앙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따를만한 것입니다,

   독일 기독교 지도자 본 훼퍼는 나치에 대항했습니다. 대항하다가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성찰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용감하고 대담한 사람인데 정작 나는 누구인가?’ 하며 고민하던 마음을 시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돌아보며 성찰하고 고민했습니다. 신앙생활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복을 넘어선 간구를 해야할 때입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서 교회와 세상이 그냥 뒤섞이어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비방하나 교회는 교회대로 억울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고민과 뒤척임 속에서 나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을 위하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준비하기 위해 지금까지 내 신앙을 준비해왔습니다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25:12)라고 말씀하시며 평화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뜻, 하나님 나라의 뜻, 하나님 천국의 소망을 위해 질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평화의 언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왕같은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비느하스처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교훈하거나 충고할 수 있을 담대함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침례요한 아시죠? 침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이 오실 일을 준비하면 됩니다. 회개의 침례만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이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취한 것을 보고 옳지 않다라고 책망했습니다. 레위기 한 귀퉁이에 있는 말씀을 들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사명만 감당하면 될 것인데, 종교적인 일만 하면 될 것인데, 무엇 하려고 그렇게 말하고 목숨을 잃었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할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게 어떤 삶이 참된 삶인지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교훈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정화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안 해도 될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이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신앙은 진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문제가 좀 있기에 한 말씀 드립니다. 세상과 종교,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세상 권세에 대해, 세상에 대한 책무를 다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종교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법조차 따르지 않으면서, 단지 신앙생활을 영적인 일이라 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일이라는 말을 빙자해서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예배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불편하게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짧게 끝나면 좋을텐데 길어지면 더욱 힘들어집니다. 대학 강의도 영상으로 해보니 힘들다고 합니다. 예배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배는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사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 후의 삶입니다. 예배는 끝이 아닙니다. 세상에 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사수에 힘을 소진할 것이 아니라, 예배 후의 삶을 책임감있게 살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공동체를 생각하셨습니다. 비느하스에게 화평의 언약을 주신 이유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른 사람의 삶에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푯대를 다시 바로잡읍시다. 예배는 중요한 목적이지만 예배가 최후의 목적은 아닙니다. 내 마음의 연단, 말씀과의 교제를 반복하여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화평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다른 종류의 질투의 마음을 소개해 드립니다. 일산의 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목사님의 아버지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씀씀이가 컸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큰 실패를 맛보았고, 그 후로는 가족들이 함께 살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가족 경제는 어머니가 홀로 담당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 나이는 36, 어머니는 30세였습니다. 부도난 것을 정리하고 남은 건 달랑 집 한 채였습니다. 그것을 팔아 교회에 다 헌금하고, 그날부터 온 가족이 교회의 청소를 도맡아서 했습니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생길 만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니 아버지 10살 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계모 아래 자라며 사랑을 못 받았다. 사랑을 못 받아서 이런 것이니 너희가 이해해 달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 모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증오와 미움, 아픔을 신앙으로 덮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달리 우리에게 있는 증오와 믿음과 아픔을 믿음으로 덮고자 하는 이런 질투도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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