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8월 30일 하나님이 주신 복된 기업(민수기 36장) 이정식 2020-10-10
  • 추천 0
  • 댓글 0
  • 조회 239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5806075

   하나님이 주신 복된 기업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예배하러 오신 여러분, 우리가 듬성듬성 앉아 있으니까 조금 경직되어 계시죠? 오신 분들만이라도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을 예배하면 좋겠습니다. 각 가정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여러분, 우리가 매사 일을 하고 또 일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결과에 얽매이다 보니까 많은 말씀들 중에 여러분 결과가 전부가 아닙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라는 말씀을 한두 번씩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 권면이 때로 위로가 되어서 기업(inheritance)분배받은 땅입니다. 또한 유산입니다. 그러니 상속의 문제입니다. ‘, 그렇지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결과는 중요합니다. 결과 없는 과정이란 한두 번은 인내하며 지나갈 수 있지만 결과 없는 과정을 계속 인내하기란 어렵습니다. 제가 늘 스포츠 비유를 많이 드는데요, 요즘 시쳇말로 졌잘싸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어쓰면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입니다. 국가대표가 다른 나라의 국가대표와 시합을 하는데, 게임의 내용도 안 좋고 결과도 안 좋다는 평가보다는 게임 내용은 참 좋지만 결과가 안 좋았을 때 졌잘싸라고 격려받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입니다. 계속해서 내용은 좋은데 결과가 없는 경기를 계속 봐야한다면 우리 마음이 참 어려울 것입니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또한 당연히 과정도 중요합니다. 과정 없는 결과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요? 성경이라고 다른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결과가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과 제가 특별하게 나눌 것은 성경은 시작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본다는 사실입니다. ‘시작이 반이기 때문에 시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시작이 이후의 과정과 결과를 뛰어넘어 하나님이 예비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3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리라”(3:14)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게 뭐냐 하면 결과나 과정이 아니라,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붙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처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결과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받을 결과입니다. 그 결과를 얻는 과정은 우리에게 지난한 과정일 수 있고 인내해야 할 과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된 결과와 그 결과를 받아누리기 위한 많은 과정을 충분히 인내하면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비결은 결과에 매이거나 과정에 집착하기보다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붙잡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힘이요,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안식이요 평강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나는 시작이요 끝이라. 나는 처음과 나중이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말씀하셨습니다. 변함없으신 주님은 알파와 시작, 처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만난 주님이 어떤 주님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만남이 우리 모든 인생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어떤 어려운 과정, 기대하지 않는 결과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이기고 나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산에 관한 본문입니다. 기업(inheritance)이라고도 합니다. 기업이라고 하면 대기업, 중소기업을 말하는 기업인가 하고 헛갈려하기도 하는데, 민수기에서 말하는 기업이란 분배받은 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평의 원리를 따라 각 지파마다 분배받은 땅을 말합니다. 손에 잡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받을 무슨 상급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유산과 같은 것입니다. 법적으로 보면 상속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사람들을 대하십니다. 민족들도 하나님은 공평하게 대하십니다. 오늘 민수기 36장에 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너희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36장의 주인공은 슬로브핫의 딸들입니다. 전체 지파와 그 가문에게, 그리고 각 가정에게 땅을 분배했습니다. 슬로브핫의 집에는 딸만 다섯 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상속받을 수 없고, 만일 다른 지파의 남자들과 결혼하게 되면 상속받은 땅이 다른 지파의 땅이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민수기가 기록된 이 사건이 지금부터 3,500년 전입니다. 우리로 치면 고조선 시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슬로브핫의 딸들이 얼마나 현대적으로 노는지 모세 앞에 따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땅을 주셨는데, 우리에게 허락한 법에 따르면 우리 재산이 상속될 수 없습니다.’ 하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시 조정해주셨습니다. 어떻게 조정하셨는가 하면, 내가 각 지파에 허락한 땅, 각 가문에 허락한 땅이 유실되면 안 되지, 각자가 재산이 있어야지 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딸들아 너희가 원하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땅이 유실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희 소유의 기업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적인 사례를 좀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제가 강단에서 재산 상속 문제를 논하는 것이 불편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족간에도 아주 민감하고 까다로운 문제이기 때문이죠. 아무튼 제가 찾아보니까 우리나라에 재산 상속 제도가 크게 세 번 변화되어 왔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곧 삼국시대에는 데릴사위 곧 처가살이를 했고, 남녀가 똑같이 상속을 받았고, 모든 자녀들이 조상을 돌아가면서 제사하며 섬겼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도 현대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오면 여자가 남편 가문에 속하게 되고, 상속도 남녀를 차등을 두게 됩니다. 물론 모든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조상을 섬겼습니다.

   이제 일제 강점기가 되면 여러분과 제가 살아온 시대의 가족법으로 바뀝니다. 여자는 남편가문에 속하게 되고, 장자를 우대하여 상속하게 됩니다. 저는 장자를 우대하는 상속 제도가 아주 오래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되는 것이 장자가 단독으로 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장자가 권한도 다 가지고 있고 상속재산도 많이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이런 문화 속에서 자랐던 것입니다.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부모 모시는 것도 돌아가면서 모시지는 않아도 모두 그럴 의무가 있고, 재산 상속도 법적으로 N분의 1 상속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장자의 상속재산과 부모(조상)섬김이 여러 면에서 애매한 시대입니다. 상속의 문제 유산의 문제가 제기되면 머리가 아프고 힘겨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수천 년 전에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베푸신 이 약속을 볼 때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상속재산이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셨습니다. 비록 이 땅의 기업이고 상속이지만 여러분들에게도 상속의 공평한 기회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받을 수 있는 상속재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볼 내용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치리하면서 땅의 상속문제를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일에 아주 성실하게 한 것을 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이의를 제기했을 때, “그런 법이 없어. 하나님이 그런 법을 우리에게 안 주셨어.”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그 말 속에 어떤 불공평함을 알고 하나님께 물었고, 아무도 불평이 없도록 공평한 유산상속이 되도록 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상속 재산의 문제를 제기했을 때, 아마 주변 사람들이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게 되겠냐, 되지도 않는 말 하지 말라, 너희 욕심이다, 어찌 있지도 않은 법을 만들려고 하느냐하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공평한 법을 다시 제정하셔서 좋은 결과가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정말 좋은 결과가 있도록 중재하시고 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민수기 368-9절을 보시면 더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중 그 기업을 이은 딸들은 모두 자기 조상 지파의 종족되는 사람의 아내가 될 것이라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조상의 기업을 보전하게 되어 그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36:8-9) 이 번역을 보면 지파가 자기 지파의 땅을 지킨다는 식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원래 원문이 뭐냐 하면 참으로 이스라엘 자손 지파들은 각 사람이 그의 유업에 붙어있어야 한다.” 곧 이스라엘 자손 지파 중에 각 사람(everyone)’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 우리 중에 예민한 상속 문제로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기도 하겠고, 또 그것 말고도 이 땅에 살면서 목표하는 바, 정말 아름다운 결과가 있기 위해서 수많은 고민을 하며 과정 속에서 싸우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알 것은 우리의 출생은 여러 면에서 불공평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공평하게 인도하시는 분이시구나. 법을 바꾸어서라도 우리를 축복하기 원하시는 분이시구나 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리라”(3:14) 슬로브핫의 딸들이 부딪힌 문제는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해서 생존의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하반기가 되면 더 많은 분들이 사업을 접느냐 아니면 다 그만두고 못된 생각을 할만큼이나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당분간 이런 어려움이 계속된다고 하는데 이럴 때 누가 소망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슬로브핫의 딸들을 보면 그 비결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간구합시다. 주님은 우리의 간구를 허투루 듣지 않으십니다. 만약 나의 수고와 모든 정성으로 어떤 결과를 맺기를 바라는 게 있는데, 그 결과까지 이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반드시 공평하게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생존의 문제에 부딪쳐서 주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늘 제가 읽어드린 히브리서의 히브리 공동체는 기독교 탄압의 문제 앞에서 내가 죽느냐 사느냐 내가 신앙을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해서 우리 주님이 히브리 기자를 통해서 권면합니다. 이 어려움은 뭘 먹고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히브리 공동체를 향해서 우리 주님은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리라”(3:14)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어찌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1-14)

   슬로브핫의 딸들이 부딪친 생존의 문제는 이 창조 세계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를 놓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히브리 공동체가 부딪친 문제는 정말로 저 천국에 나를 위해 예배하신 처소가 있습니까. 내가 순교를 할지언정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정말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 맞습니까? 하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어찌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고 확신시키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종이 땅에서 성막을 지어놓고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여놓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1년에 한 번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위해 속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완전한 제사여서 해마다 1년에 한 번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가신 곳이 주님이 처음 오신 곳, 저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무엇을 전하는가 하면, 히브리 공동체 여러분, 그리스도인 여러분,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어떤 탄압과 괴로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영원한 속죄를 주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창조 세계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었을 때, 그 첫 믿음을 가지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넉넉히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지식인들이 만들어진 신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무슨 이 땅에서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니 천국에 관한 소망의 말씀이 우리 현실 속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인생이 끝날 때까지 땅에 사는 생존의 문제에 얽매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믿으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9:14) 한다는 말씀입니다. 확실한 결과가 주어진다는 약속입니다. 누군가는 순교당하고, 누군가는 멸시당하고 배척당하겠지만, 우리 모두에게 확실한 결과가 주어져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작할 때 어떻게 시작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뭘 말합니까? 구원을 말합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구원에 대해 고민하고, 정말로 주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공부하고 신학서적도 뒤적여 보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주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짧게만 정리해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이 자존심은 하나님을 거절할 만한 자존심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걸고 있는 한은 주님을 온전히 영접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은 내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나에게 그런 사랑을 할 자격이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저의 자존심인 줄 몰랐습니다. 사실 자존심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자존심이 될텐데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어떻게 저의 자존심이었는가. 끝까지 답을 내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없다고 하면 기분이 나쁠 것 같고, 사랑이 있다고 하자니 부담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이 두 사실 속에 제가 늘 있었습니다.

   어느 예배 시간에 주님께서 제 마음 속에 말씀하시기를 , 사랑이 없다!’하고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깨달은 게 아니라 저의 자존심의 정수, 그 꼬투리를 깨뜨려버리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그 말이 저주의 말이 아니라, 저의 자존심은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 주님 당신만이 저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된 비결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주님 말씀이 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순종하기 버거워서 순종하지 못하는 말씀은 있어도, 주님 말씀에 안 믿어지는 말씀은 없습니다. 천국에 관한 말씀이 안 믿어진다고요? 신이 만들어진 신이라구요? 참 우스운 말입니다. 주님을 참되게 만나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해보면 알잖아요. 신앙생활 하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실망도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도 합니다. 원하는 결과를 응답받지 못해서 주님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하고 의구심을 품기도 합니다.

   어떤 분과 한 번 교제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아무 증거가 없다고 할 때 주님은 충만하게 계시는 분이십니다. 아무 간증거리가 없다고 말할 그때 우리를 사랑하게 계시는 것입니다. 결과에 매여 있다면 결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붙잡을 때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작할 때 만난 주님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주님 만나셨나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약속한 모든 말씀이 아멘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 구약 성도들이 관심 둔 것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지금 우리도 생존의 문제에 부딪쳐 있습니다. 저들도 우리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공동체에게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과가 중요하지만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지만 과정보다,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이 더욱 중요하구나.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구나. 그분이 단번에 우리를 창조세계뿐만 아니라 손으로 짓지 아니한 장막세계 곧, 천국을 지으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구나. 하나님은 이 땅의 기업도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천국에 우리 처소를 예비하러 먼저 가신 주님도 확실한 것입니다. 천국에 우리가 분배받을 땅, 면류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려움과 기쁨, 원하는 결과와 원치 않는 결과를 받으면서도 주님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천국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내 속에 꽁하고 있는 내 자존심을 깨뜨려주시고, 확실한 주님의 은혜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다음글 8월 23일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질투하라(민수기25장) 이정식 2020.09.26 0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