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9일 불평과 원망 중에 만난 하나님(민수기 11장) | 이정식 | 2020-09-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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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원망 없는 세상에 살고 싶으십니까 불평 없는 세상에 살고 싶으십니까 그런 곳에 살고 싶다면 천국에 가셔야 합니다. 이 땅에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불평 없고 원망 없는 삶이란 있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에 따라 좀 다른데, 어떤 분은 일마다 즉각 원망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보면 ‘믿음 없다’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좀 내성적이어서 잘 참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쌓아두었다고 언젠간 폭발할 것입니다. 폭발할 때에는 뒤틀린 마음으로, 토라진 마음으로, 상한 심령으로 독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즉각 불평은 터뜨리는 사람이나, 참고 인내하다가 폭발하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사람도 원망을 이겨내거나 불평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즉각 불평과 원망의 반응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다고 평하기도 하고, 잘 참는 사람은 성숙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견 일리가 있어보이지만, 내심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원망과 불평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일반 회사의 게시판에도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자’는 권면을 합니다. 이런 권면은 복음이 되지 못합니다. 복음은 뭔가 하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우화는 전 세계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그게 어디냐 하니까 어떤 나라는 대나무 숲 속에 들어갔다고 하고, 또 다른 나라는 땅을 파고 말했다고 하고, 또 다른 이야기에는 연꽃에다 그런 말을 했다고도 합니다. 마음 속에 쌓인 원망과 불평을 그렇게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을 막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감정의 토로를 믿음 없다고 몰아세우시는 분도 아닙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민수기 14장 1절에 보니까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민14:1)고 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어 하나님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탐지하도록 보냈습니다. 그 땅에 가보니까 아주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처럼 초라해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민수기 11장 1절에도 원망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민11:1a)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에는 앞뒤 문맥이 없어 이유가 원망의 이유가 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저 “악한 말로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척 하면 아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도 한두 번 겪어 보면 척 하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몇 번 겪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11장에서도 12장에서도 14장에서도 반복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때가 대략 기원전 1500년대입니다. 그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1500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불평과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마다 마치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대해주셨습니다. 중간 중간에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라고 말씀은 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몰아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서 불평할 곳을 찾지 못해서, 원망할 곳을 찾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노래방 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소리 지르기도 하고, 옛날 신대원 다닐 때 저처럼 차문을 걸어 잠궈 놓고 소리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복음의 장소입니다. 세상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면 인내심이 없고 자기 감정대로 말한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데, 만약에 ‘교회에 가면 마음 놓고 불평할 수 있다더라’‘교회에 가면 마음껏 원망할 수 있다더라’ 그런 소문이 세상 속에 퍼진다면 교회를 복음의 장소로 알고 올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불평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힘듭니다.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더 힘듭니다. 오랜 세월 그런 사람들을 정죄하고 속으로 비판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서로 정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공동체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이스라엘을 막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이 가르치신 것은 불평을 하는 결과가 불평하는 자신에게 복되지 못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11장에도 원망이 14장에도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말씀을 더 나누기 전에 일단 먼저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불평할수 있는 공동체, 원망할 수 있는 공동체일 때, 그리고 내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싶을 때 그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공동체일 때,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1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아주 불가항력적이었습니다. 비록 힘들었지만 이집트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해놓고 어찌 죽을 일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밤새도록 통곡할 만큼 마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많은 목사님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이 없다며 설교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설교를 취소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만 이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마음은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밤새 통곡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답이 없는 현실에 부딪쳤을 때 어찌 불평이 나오지 않을까요. 11장 4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울며 이르고” 11장 10절에 보니까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이라고 했습니다. 11장 18절에 보니까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엄청난 불평을 듣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입술의 불평이 아니라, 영혼을 다 짜내는 불평이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불평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 소망을 이룰 기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불평이 나오고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14장에 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가면 죽을 일이 있으니 불평하고 원망하며 울고불고 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모세는 자기가 도무지 책임질 수 없는 문제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하고 한참 기도를 한 후에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5)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울며 불며 온마음과 영혼을 다해 불평하는 소리를 듣게 하지 마시고 제 짐을 벗겨주세요’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불평을 듣다가 듣다가 원망을 듣다가 듣다가 보면 모세 심정 비슷하게 느낄 것입니다. ‘교회 안 나갈까 보다, 제발 저 분은 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평 원망을 하기 시작했는데,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 가운데 웬만한 문제는 스스로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웬만하지 않으니까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믿음없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은 내 속마음을 토로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을 토로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 입을 막아버리고 율법적으로 정죄하면 그 사람은 갈 데가 없습니다. 교회 나와서 불평할 수 있도록 합시다. 교회 나와서 원망할 수 있도록 허용합시다. 물론 시편 37편 8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37:8) 불평을 하는 것은 악을 만들 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오신 후 시약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빌2:3a)고 했습니다. 신약교회에서 다툼과 허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 은혜받고 성도가 된 사람들 간에도 다툼과 허영, 원망과 불평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입막음을 하라는 게 아니라, 불평과 원망과 다툼을 한 이후에 그 결과를 바라보면서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서 더욱 놀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결코 내 마음을 좋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도 우리 속에 불평과 원망이 떠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신약 시대까지 이런 감정의 토로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불평과 원망을 하나님께서는 1,500년 동안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은혜 충만했던 초대교회도 이런 일이 가득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신앙생활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렇지! 하나님은 내 감정을 업신여기시는 분이 아니시지. 내 원망과 불평에 이유가 없는 게 아니지. 아직 해결되지 못한 내 과거가 있고, 여전히 내 힘으로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있고, 기도하지만 그것으로도 만족되지 못하는 숙제가 있지.’ 하시고,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우리가 좀 자유를 얻기를 먼저 부탁드립니다. 그런 후 민수기 11장 1절 하반절에 보면 주님이 일하셨습니다. 진영의 끝을 살라서 불평의 끝이 어떤지 먼저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경험하고 얼른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불평의 결과를 알고도, ‘내가 또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가 막심한데도, 그때가 되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그런 이야기를 다 소화할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님 여러분들에게도 다른 지체들의 불평과 원망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며 토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고기를 달라고 원망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먹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셨습니다.(민11:31,33) 이 본문을 보면서 “불평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감사하십시오,”하고 설교하지만, 그렇게 빨리 넘어가면 안 되겠습니다. 불평의 결과를 목격하라는 말씀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그런 결과를 보여주시고 보여주시고 하는 것을 몇 번이나 하시는가 하면 제한이 없습니다. 3일만에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40년만에 들어갔습니다. 40년 동안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하나님께서 그 40년 동안 그렇게 하다가 넘어지는 이스라엘을 보시고도, 계속해서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로서는 이것을 멈출 수가 없고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내가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한 한 분을 소개하기 원합니다. 이 분은 의수 화가입니다. 의수 화가란 인공팔을 사용하는 화가라는 말입니다. 올해 61세인 석창우 화백입니다. 이분은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중소기업의 전기관리자로 일하다가 2만2900V의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 아내와의 사이에 어린 남매를 둔 패기왕성한 가장이던 때였습니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양팔과 발가락 두 개가 절단되고 뇌출혈 수술도 받은 후였습니다. 인생 사계로 치면 절망과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마친 뒤 집에서 재활치료를 하는 중에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지금까지는 당신이 나를 먹여 살렸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먹여 살릴테니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요.”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빤한데 뭘 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네 살배기 아들이 노트를 들고 와서는 “그림을 그려 줘요”라고 했습니다. 네 살배기 아들의 뜬금없는 말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던 터였습니다. 그런 아들의 부탁을 꼭 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의수에 볼펜을 끼워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는데, 아들이 참 좋아했고, 또 아내가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후로 참새, 독수리 등 주로 동물을 그려줬습니다. 단 한 번도 그림 공부를 해보지 않았던 전기기술자가 그린 그림을 보고 아이가 좋아했고, 또 아내와 주위 사람들도 잘 그린다며 치켜세웠습니다. 처형은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정식으로 그림 그리기를 권유했습니다. 그의 그림 몇 편을 준비해봤습니다. 한 그림은 무용을 하는 무용수의 연결 동작을 순간 사진으로 나열하듯이 그려놓았습니다. 다른 그림은 경륜을 하는 선수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붓터치로 간결하지만 역동적으로 그렸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석창우 화백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2014년 3월 소치 장애인 겨울올림픽의 폐막식을 중계하는 TV 화면을 통해서 쇠갈고리 손에 먹물을 잔뜩 머금은 붓을 끼워 넣고서 대형 화선지 위에 그리는 것이 생중계 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석창우 화백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마지막 그림은 석창우 화백이 성경 필사를 해놓은 것입니다. 석창우 화백이 사고 후에 그림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불평과 원망이 사라졌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림이 더 나아지지 못할 때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나요’ 하면서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두 팔이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의수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숙명이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다음 고백은 더욱 은혜가 넘칩니다. “지금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성한 두 팔을 주신다고 해도 나는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 있나요? 네, 그럴 수 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의 주인공 이지선 자매도 동일한 고백을 했었습니다. 화상을 입고 난 후 깨닫게 된 은혜가 너무 커서 ‘다시 20대의 앳된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라고 물었을 때,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원망과 불평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리고 그분의 능하신 손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 이전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을 만큼이나 새롭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불평도 했겠고 원망도 했겠지만, 그런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불평과 원망의 이유로 자리 잡았던 것조차 찬양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불평의 입술 원망의 입술이 되었었는데, 바로 그 이유가 도리어 찬양의 입술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불평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원망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다투면서도 공동체를 더 사랑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든 감정을 어루만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반복적으로 이런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 모든 일의 아픈 결과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오 주님, 나의 이 멈출 수 없는 원망과 불평을 하는 저에게, 석창우 화백처럼 이지선자매처럼 내게도 멈출 수 있는 주님의 은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모세 그 믿음의 사람도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나로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내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런 후에 하나님께 응답받으면 타인을 영접할 수 있는 마음의 방이 하나 생길 것입니다. 송포성서침례교회도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이 되며, 내가 좀 나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교회가 될 것이며, 믿음 없는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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