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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거룩함이 이긴다(레위기 20장) 이정식 20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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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터진 원이 있습니다. 원래 원은 터진 데가 없이 이어져 있어야 만족됩니다. 우리 삶은 온전히 이어진 원이라기보다는 어딘가 터져 있는 원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레위기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worship)입니다. 사람은 부정하지만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말씀합니다. 두 번째는 삶(walk)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거룩함으로 드린 이후 우리의 삶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희생제사(sacrifice)에 초점을 맞추고, 삶은 성별(sanctification)에 초점을 맞춥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삶도 거룩하게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도 복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말씀이 레위기서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이 두 가지 삶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사 드리는 것, 예배하는 것과 우리의 삶을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하는 삶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또 예배를 일정하게 습관적으로 지키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거나 친구들, 부모님, 선생들, 탁월한 학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따라 살아가는 삶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삽니다. 이기적인 삶만 살지 않고, 어떤 신적인 무언가에 도달하려고 삽니다. 신적인 인정을 받으려고 삽니다. 칠십이 되고 팔십이 되어 어떤 신적인 허락을 받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거기에 도달한다 하여도 우상의 신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도 분명치 않고, 거룩함도 확실치 않으니 부정함과 우리 욕망을 자극하는 우상신에게 이를 뿐입니다. 온 세상이 열심히 살아도 도달하게 될 결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부르셨습니다. 물론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내 삶에 헌신되지 않고는 열매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점은 뭔가요?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 자주 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도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한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바로 듣고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 삶과 하나님의 거룩함이 교통할 때 우리의 삶이 온전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거룩함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살고난 후 주일에 교회에 와서는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이 말씀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24시간 중에 잠자는 시간 빼고 10시간 이상 내 삶에 집중합니다. 그 중에 5분이든 10분이든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교제를 통해서, 내 인생의 계획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아갈 수 있도록 도전받고 격려받는 것입니다.

   12절 보니까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20:22) 그리고 23절에는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쫓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고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거룸함이 이깁니다. 207-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20:7-8) 우리는 거룩하라고 하거나 거룩하기를 힘쓰라고 하면 뭔가 좀 부담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영광이십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반복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어떤 소식을 통해서 우리의 힘이 사라지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도 희미해져서 내 삶밖에는 남아있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면 시험 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를 거룩하게 하시는 데에도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믿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부패함이 나옵니다. “만일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20:9) 많은 경우 우리의 죄는 짐승의 피를 흘려서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20장에 나오는 죄는 죽어야만 용서되는 죄들입니다. 죽음으로써만 속죄되는 죄들입니다. 가끔 사춘기 시절에 부모님을 아주 못되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이 지나 계속해서 그렇게 한다면 큰 죄입니다. 두 번째로 죽임당할 죄는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찌니라.”(20:10) 간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죽음으로 갚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간통죄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성적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 등의 인권을 중시여긴 결과입니다. 한 번 물어봅니다. 어떤 정치인이 간통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정치인을 지지하겠습니까? 좀더 수준을 높여볼까요? 하나님의 종이 간통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목사를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따르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죠. 우리 양심 속에 심어둔 도덕에 따라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법하고는 따로 놀고 있습니다. 세상은 꾀를 냅니다. 국민정서에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따라 법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왜 하나님 말씀 앞에 서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법도 국민정서가 용납하면 따라갑니다. 대법관 과반수 이상이 찬성하면 법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법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가 생각할 때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법입니다.

  간음하는 자는 그 남자와 그 여자를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간음을 하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 소문을 듣는 사람들에게조차 그 부정함이 덧씌워지기 때문입니다. 비 오는 날 꿉꿉해지듯이 그런 정신이 알게 모르게 전염됩니다. 그래서 당사자들에게 죽음을 처벌하므로 그 소문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깨끗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11절 볼까요?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여기 아버지의 아내는 친어머니가 아니라 계모를 말합니다. 뉴스에 가끔 이런 소식이 들립니다. 우리 함께 더러워집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보며 산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를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들릴 때 , 세상이 말세다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이 세상이 어쩌려고 그러나? 12절 볼까요? “누구든지 자기 며느리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런 소식도 가끔 들리나요? 그런 소식을 듣는 순간 여러분과 제 마음이 상하고 부정하여 집니다. 우리 마음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을 따라한다는 말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이 식어진다는 말입니다. ‘나만 이렇게 주님 말씀으로 살면 뭐하나 세상이 이런데하는 생각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일찌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는 것은 동성애를 말합니다. 지금 고양시뿐만 아니라 전국 기독교계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며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010절 이후에 나오는 이 범죄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가증하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곧 혐오스럽다는 말입니다. 물론 저는 동성애가 나쁜 건 사실인데, 사람을 혐오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애석하게 생각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동성애적인 코드는 안방극장에 오래전부터 찾아왔고, 영화와 소설 등에 넘칩니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 신학교 교수들도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해석을 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해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별다른 해석이 필요 없는, 명백한 말씀의 경우를 해석의 틀로 해석하는 것은 죄입니다. 꾀를 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귀를 좋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국민정서는 조금씩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태어났을 때는 전혀 낯선 소리였지만, 지금 자라는 세대들은 동성애에 관한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며 그런 친구들과 접하기 때문에, 판단하기도 전에 용납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동성애는 법적으로 보장될 것입니다. 온 세상은 그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동성애를 죄라 말씀하셨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간통이나 동성애가 용납되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건너뛰어 15-16절입니다.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하여 교합하거든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이들을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20:15-16) 수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나라들에서는 사랑하는 동물과 결혼을 보장하는 데도 있습니다. 짐승과의 교합조차 성적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이라는 미명 하에 허용해야 하는 사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원하십니까? 양심도 그것을 배격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짐승의 피로 죄사함 받는 일이 아니라, 죽음으로써만 깨끗하게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 앞에 온 세상이 거룩하게 되려면 당사자들은 죽임을 당해야 하며, 그래야만 공동체 전체가 거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와 같은 죄들을 가증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아마도 이런 이야기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정죄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에서는 사회생활 속에서 금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공평하지 않는 저울추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선대할 것에 관해서, 뇌물로 재판을 굽게 하는 것에 대해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로마서 129절부터 생활 속 죄악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1:29-31) 그런데 32절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1:32)

   성적인 범죄들에 대해서는 거리가 먼 여러분과 저에게 로마서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건 거룩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건 부정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건 가증스럽다는 말입니다. 한 번 물어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이기적입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할까요 안 할까요? 하겠지요. 우리가 주님의 거룩함을 선택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선택해서 사랑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자기만 사랑하고 한국을 멸시해서 짓밟았습니다. 그처럼 한국이 우리끼리만 사랑하고 중국과 일본을 미워하여 짓밟는다면 올바른 행위일까요? 나쁜 행위일까요? 나쁩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성적 범죄에 관해서는 모두 깨끗하지만, 누군가는 우리에게 기대합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 선한 삶을 이루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로 달려가지 못하고 때로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꾀를 부립니다. ‘나만 못하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못한다면 웬만큼 하고 내 삶에 집중하는 게 옳지 않을까하는 꾀 말입니다. 로마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해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 앞에 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 모든 사람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 말씀드리면 놀라셔야 하는데 아무도 안 놀라시는군요.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8:21) 어릴 때부터 악하니 항상 심판 받아야 할텐데, 그렇게 말씀하시고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는데, 창조 직후부터 범죄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셔서 다시 새롭게 하기 원하셨지만, 세상에 죄악이 넘쳐서 홍수로 심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 사람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이 이런데 어쩌짜고 깨끗하라고 하시고 거룩하라고 하신다는 말입니까. 짐승의 피를 흘려서 대속하라고 하실까요? 그러므로 우리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게 하실 때 전적으로 거룩하신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홍해바다를 가르셨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르실 때 그 바다를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그 바다를 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날 때부터 악한 사람을 새롭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들어보세요. 사람의 생각 같아서는 주님이 홍해바다를 갈라내실 때 힘에 겹도록 갈라내신 후 언제 물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빨리 가 , 빨리 좀 가!” 안절부절, 노심초사 건너가게 할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힘들이지 않고 밤새 동풍을 불게 하셨고, 그 땅이 젖은 땅이 아닌 바짝 마른 땅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좌우로 물벽을 세우셔서 붙들고 계시기 힘겨우시니 마음이 급할 만도 한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단 한 사람도, 노약자나 어린 자나 짐승이나 가축이나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충분히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저를 거룩하게 하실 때 이와 같이 거룩하게 하십니다. 요단강물을 가르실 때는 더 놀랍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르실 때에는 밤새 동풍을 부셨습니다. 빨래가 마르는 이유도 햇빛과 바람입니다. 바람이 불어야 마릅니다. 그런데 요단강 상류 물 근원을 끊으실 때에는 바람도 불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갈 때는 물 근원을 끊으시고 또 마른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건너가게 하신 후 마지막 제사장의 발을 떼자마자 다시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때에도 이처럼 온전하고 완벽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밖에 비가 옵니다. 비가 오면 공중에 탁한 먼지들 다 씻겨 내려옵니다. 다음 날 보면 공기가 맑아집니다. 물론 한나절 지나면 다시 탁해지기 시작합니다. 일 년에 맑은 공기를 숨쉴 수 있는 날이 몇 날이나 될까요? 우리의 경험은 이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합니다. 어릴 때부터 악함도 세상 살아가면서 반복적으로 경헙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전염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은 완전하고 전능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함을 받았을 때 그때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몇 가지 방법이 레위기서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로 씻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피흘려 제물을 드려 깨끗해집니다. 세 번째는 오늘 말씀처럼 죽음으로 끊어져 깨끗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거나 격리시키는 방법으로 공동체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때에는 다 마르지 않은 빨래에 꿉꿉함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바짝 말라서 펼쳐 입을 때 상쾌한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영접했을 때 그토록 상쾌하고 깔끔한 상태였습니다. 그 순간은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살아갑니다. 이 세상 속에서 내 삶을 살고, 또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는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사람 그럴 줄 몰랐어.” 하는 말은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천만인이 다 넘어져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백 명의 사람이 넘어져도 백 한 명째 사람에게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내심 안 믿으면서 또 내심 기대합니다. 좀체 믿지 못하면서도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입을 때에 만족이 찾아옵니다.

   어떤 신학자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죄가 뭡니까?” 성적 범죄도 다 죄고, 사회 생활 속에서 비윤리적인 것도 죄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큰 두 계명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흠이 있으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은 가족의 장례에서 시신과 접촉할 경우 속죄하고 나아갔지만,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가족의 장례로도 자기 몸을 부정하게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21:11) 용납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주변에 반복되는 여러 가지 말세적인 징후를 보면서 우리가 오염되면 안 됩니다. 삶을 바라보고 사회를 바라보고 내 속을 바라보면서 넘어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안타까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리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목사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모든 것을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어제 범한 죄를 오늘 아침에 고백할 때 주님이 나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믿으십시오. 믿으셔야 삽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하나님 앞에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받으신다니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도전하지 못했던 말씀을 넉넉히 순종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완벽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주님의 거룩하신 은혜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간음한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을 속죄하셨습니다. 주님은 속죄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일에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의 주인이 아닙니다. 신앙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거룩하게 하시니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8:11)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제 실패했습니까? 오늘 거룩할 소망이 식어졌습니까? 고백하십시오, 주님 앞에. ‘주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전능하심을 내가 믿지 못했습니다. 나의 불신앙을 용서해주세요. 날마다 제가 주님의 거룩함 앞에 서게 해주세요. 내 영혼도 기대하고 타인도 기대하고 하나님도 기대하는 참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악함에 전염되지 맙시다. 죄악에 오염되지 맙시다. 거룩함의 은혜를 덧입으십시오. 거룩함이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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