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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흠족한 믿음의 기쁨을 위하여(베드로후서1:1-11) 이정식 202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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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 사도는 아마도 로마교회 공동체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1절부터 11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강력하고도 확신있게 전하는지 모릅니다. 먼저 베드로후서 11절을 보시면,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변화산 상에서 예수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천국열쇠를 내가 너에게 맡긴다고 했던 그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구름 가운데서 그렇게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공동체와 우리들은 오직 말씀으로만 경험하게 되는 경험적인 제한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 믿음의 수준을 스스로 확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준, 저런 수준이라고 자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믿음을 확증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 믿음은 사도들과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에게 부어주신 믿음은 사도들이나 우리들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후서 13절에는 뭐라고 하고 있나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여기에 보니까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고 주셨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교회의 믿음은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성도들간에 교제해 보면 대략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평가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서로 실갱이도 하고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우리가 구원받는 순간에 다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다 받은 사람입니다.

   4절에는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로마 공동체를 위로하기 위해 뭘 애써 찾고 연구해서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원본 신앙이 어떠한가를 확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만 성도 누구나, 어떤 교회 어떤 성도에게도 이미 이런 믿음을 가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미약하고 불쌍하고, 자고 일어나면 아무 믿음도 없는 것 같은 우리에게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아멘합시다.

   우리 믿음의 넉넉한 승리와 흡족한 기쁨의 출처가 어디냐 하면, 여러분과 저의 신앙이 이루어져가는 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기쁨의 출처, 흡족한 믿음의 출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지 우리가 믿음의 예배를 드릴 때 믿음의 기쁨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이루어갈 일이 있는데,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애게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더해야 합니다. 언젠가 같은 본문을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여덟 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 한꺼번에 이 모든 것을 이루어가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 끝낸 다음에 그 다음 것을 쌓고 이루려면 숨이 막힙니다.

   기쁨이란 재미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쁘시지만, 요즈음 가장 기쁜 사람은 이형주전도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둘째 소윤이가 태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기쁜데 기쁜 것만 있지 않더라구요. 아기를 돌봐야 하니 피곤하고 힘들 것입니다. 피곤하고 힘든데 좋을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은 천부적인 것입니다. 자녀 사랑은 힘들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고 기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실 때 그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신앙의 수준이 우리가 볼 때에는 그렇고 그렇다 싶어도 주님이 보실 때에는 너무나 기쁘고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감격스러우실 것입니다. 어느 샌가 우리의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이 축적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식은 단지 아는 게 아니라 실천적인 지식입니다. 교회를 섬길 때 어떻게 섬기는 것이 더 좋은가. 또는 성도들 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문제에 관해서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합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들에게 이런 실천적인 지식이 쌓여갑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주님이 허락하신 사랑 가운데서 이 여덟 가지 행실이 한꺼번에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벧후1:8a)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어떤 프로야구팀은 13연패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야구를 보는 팬들 마음은 어떨까요? 그런데 13연패를 하든 15연패를 하든간에 16번째 경기에서 극적으로 승리를 하면, 이전의 한숨은 다 씻겨지는 것입니다. 그 모든 패배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경험해왔습니다. 10여 년 괴로운 시간을 보냈어도 한 번 주님의 은혜를 만나면 눈 녹듯이 지난 일들이 사라집니다. 이 땅의 일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주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 있는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베드로 사도는 계속 쓰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1:8-9) 이런 기쁨과 은혜가 있으면 예수님을 알기에 부지런을 내어 열매있게 될 것인데,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멀리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멀리 봅시다. 사실 베드로는 강력한 확신과 흡족한 믿음으로 이 편지를 로마 공동체에 보내고 있는데, 실상 로마공동체의 형편은 어떤가 하면 이런 믿음을 선포하기에 민망한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우리처럼 마음 편하게 예배할 수 없어서 숨어서 예배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갈망했습니다. 힘겨운 속에서도 기쁨을 누리며 주님의 재림을 기대했는데, 주님이 생각보다 빨리 안 오시는 것입니다.

   그때 거짓 선생들이 교회 안에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선포한 말씀을 예로 들으며 이런 교훈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느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자유케 하신 은혜를 누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자유하라이런 말을 듣고 보면, 예배 드림도 힘겹고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하던 주의 재림도 연기가 되는 것처럼 보이니까 처음에는 믿음으로 버텨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버티는 힘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맞다, 주님이 좋은 것 주신다고 했는데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되지? 성경에도 좋은 것 주신다고 했잖아하면서 사도들이 가르쳐준 신앙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공동체 전체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웠지만 인내하고 절제하고 경건의 훈련을 하던 신앙에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시대였고 사도들이 가르치고 세운 공동체였지만 초대교회 때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성막을 쳤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공동체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 뒤 한참 지나서 솔로몬이 세운 제1성전을 건축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했습니다. 그 성전을 중심으로 모든 신앙과 예배와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는 중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못해서 바벨론 70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와 스룹바벨의 지도 하에 세운 것이 제2성전, 곧 스룹바벨 성전이었습니다. 간절함으로 세웠습니다. 훼파된 성전을 세우게 되면 우리 신앙과 삶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세웠습니다. 학개서에 보면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는 축복의 예언까지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새롭게 시작했는데, 살다보니까 별반 좋을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방 사람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말라기에 보면 십일조와 헌금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것을 도둑질하느냐!” 하고 책망하셨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믿음을 발휘한 근거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3:7a)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온 때가 기원전 1400년대이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때가 기원전 500년대니까 1천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본다면, 30세대가 넘는 기간 동안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가능성이 있는 민족일까요? 새롭게 되는 게 가능할까요? 이스라엘의 이런 역사를 들으시면 위로가 되십니까? 낙담이 되십니까? 저는 이 말씀이 너무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하나님은 지치지도 않으시고 포기도 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한 수준도 낮추지 않으시고, 사랑의 질도 낮추지 않으시고 온전한 사랑을 조금도 변치 않으시고 당신의 눈동자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도리어 말라기 42절에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축복하십니다.

   물론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주님 되신 예수께서 오셨으니 이제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웬걸요. 우리 자신의 신앙을 보아도, 예수 오신 이후에 세우신 교회 역사를 봐도 구약의 이스라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구약의 이스라엘을 반복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주님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도들로부터 교훈을 받아 세워진 로마교회도 쉽게 믿음이 물러나서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을 훨씬 더 빨리 받아들이고, 정통 신앙인 사도들의 신앙을 거절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낙담이 교회 위에 몰려올 때 베드로 사도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이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닌 것 같아도 주님은 그렇게 보십니다. 또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축복하십니다. 또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축복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이 불쌍한 신앙으로 어디 감히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평생을 믿음생활을 한들 우리가 거룩함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하면 멀리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처음 오실 때부터 2천 년이 지났건만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십니다. 천국이 지옥과 도무지 함께 할 수 없이 먼 것처럼, 신의 성품과 사람의 불쌍함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이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천 년 동안 이스라엘의 배반 속에서도 주님께서 축복하셨듯이 말입니다. 믿음이 흔들린 로마 공동체에게도 동일한 사랑과 믿음을 주셨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에게도 마찬가지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멀리 보시면 우리 안에 있는 이 괴로움과 곤란함이 도리어 위로가 됩니다.

   또 뭐라고 했습니까. 두 번째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1:9)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줄 깨달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우리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한 학자가 수치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신과 짐승의 중간에 두면 수치스럽게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사람을 신과 짐승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짐승의 약육강식이 이 세상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학자는 사람을 신과 짐승의 중간에 두는 한 사람은 수치를 면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거룩한 신의 성품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신의 성품을 주셔도 못 받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바로 세상의 천만인은 인류 역사를 통해 보나, 세상 역사를 통해 보나 사람을 신과 짐승의 중간 위치에 두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사람이요, 예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의 속한 모든 것을 받은 사람이요,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벧후1:4b)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인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나아가기 때문에 세상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서 보이는 현실은 소망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넘어질수도 있지만 이 소망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만이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고 신앙을 붙들 수 있는 유일한 힘이고 소망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은 지치지도 않으시고 물러나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결국 성도에게는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여서 마귀가 공격하기 쉬워도, 우리 안에 있는 이 소망은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도 이 소망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생각할 때 인간은 신과 짐승의 중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결론은 결코 소망이 없습니다. 거기에 주님의 은혜가 나에게 덧입혀진다고 하는 그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세상은 소망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누구입니까? 이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망이 되는가 하면 11절을 보겠습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1) 넉넉히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뭣이 넉넉합니까. 넉넉하긴 뭐가 넉넉하다는 말입니까. 내가 지금까지 달려온 신앙의 경험으로 오늘 내가 부딪힌 문제를 넘어갈 힘이 있습니까. 가만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 사도는 넉넉히 주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넉넉히’(플루시오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비유컨대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습니다. 목마를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는 내 두 발만 땅에 서 있고 다른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주님의 발은 안 보입니다. 그러나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어깨위에 목마 타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넘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쓰러지지 않습니다. 소망으로 사기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1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1: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적용해봅시다. 지난 주에 우리는 주일 점심식사와 오후예배를 한 달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마음이 좀 아픕니다. 주일을 온전히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이 반갑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결정한 결정사항입니다. 그런 결정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소망을 바꾸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다만, 종일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면서 얻은 믿음의 안정감, 내가 주님 앞에 뭔가를 했다는 안심 등을 얻기가 조금 어렵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내가 주를 섬기며 봉사하면서 얻었던 안정감과 안심을 누리가 어렵게 되었다면, 이렇게 합시다. 예배 후에 돌아가 일주일간 직장생활과 일상생활 속에서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더해가는 삶을 통해 믿음의 안정감과 소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새로운 기회를 만났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이제는 일상 생활 속에서 말씀을 향한 순종과 택하심과 부르심을 확증해 가면서 안정감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들어왔습니다.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단잠을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좋은 침대보다는 단잠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침대가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죠? 좋은 침대를 사려고 하다가 단잠을 놓칠까봐 하는 말입니다. 똑같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모여서 예배하는 교회만 교회가 아니라 삶의 예배가 더욱 교회스럽습니다. 맞습니다. 그렇다고 건물로서의 교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그 역시 아닙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섬김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보이는 교회, 모이는 교회, 건물로서의 교회가 믿음의 견고한 터가 될 수 있습니다. “집이 다냐? 아름다운 가정이 중요하지.”라고 말한다고 해서 집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 적용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흡족한 기쁨을 유지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 주일은 예배 후에 남아있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첫째, 수요일에 예배하러 오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사랑이 식어지려고 하면 같이 있는 시간을 늘여서라도 사랑을 붙들 수 있습니다. 주일 예배가 짧다면 수요예배를 도전하셔서 내가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수요일에 예배하러 오기 뭐하다구요? 그러신 분들에게는 둘째, 평일에 한 번은 교회에 오시기 바랍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교회 마당을 밟으십시오. 교회 오셔서 사택에 목사님사모님 계시나 안 계시나 살피지 마시고, 마당을 밟으십시오. 사역자도 프라이버시가 있습니다. 상담이 필요하시면 수요일 낮에 오십시오. 다른 날에 교회를 오시면 좋은 커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 잔 하시고 교회 마당을 밟으면서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도님들끼리나 남편이나 자녀들을 데리고 교회를 다녀가십시오. 믿지 않는 남편이나 자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러다가 커피를 대접하십시오. 내가 평생 먹어본 커피 중에 교회 커피가 가장 맛있었다.”고 할지 누가 압니까. 교회 냉장고에 교회 재정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놓겠습니다. 신앙생활 하지 않는 자녀들 데리고 와서 아이스크림 꺼내드시기 바랍니다. 혹 그 자녀가 내가 아이스크림 좋아하지만 송포 교회에서 먹은 아이스크림보다 더 맛있는 건 못 먹어봤다.”고 할지 누가 압니까. 교회는 여러분들의 교회입니다. 올해 표어가 그대들의 교회아닙니까. 커피도 끓여드시고, 아이스크림도 꺼내 드시기 바랍니다. 대면 전도 할 수 없으니 교회를 이렇게 경험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시기 천 년 전 이스라엘 역사를 바라보시고, 주님 오신지 2천년이 지난 지금을 바라보시고, 앞으로 오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베드로가 목회했던 이 교회들의 상황을 바라보시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주셨다는 사실을 오늘도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일상의 삶을 통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의 안정감을 얻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평일에도 교회에 오셔서 마당을 밟으시면서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 사랑을 표현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힘들어도 좋아하는 고백을 할 때입니다. 그것도 간신히 고백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감을 얻는 흡족한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입니다. 멀리 바라보시고, 내 죄를 깨끗이 씻으신 은혜의 사실을 기억하시고, 기죽지 마시고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 걸어가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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