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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주리라(출23:20-33) 이정식 20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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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이 힘든 세상과 일상 속에서 일하실 때에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첫째는 홍해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급하게 인도하실 때처럼, 하룻밤 새에 심한 동풍을 불게 하셔서 바다를 가르시고 마른 땅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하나님의 일을 목격하거나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일의 결과를 바꾸시고 은혜를 느끼게 하시고 일처리를 급속도로 해주셔서 감사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주시는 방법으로도 일하십니다. 오늘 출애굽기를 통해서 그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무엇을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주시는가 하면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가나안 땅 근처에도 가기 전에 미리 말씀하시기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히위 족속, 가나안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등이 있을 것인데, 그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저 이방 민족들을 쫓아낼 때 단번에 쫓아내시지 않으시고 조금씩 조금씩 쫓아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하게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어서 예상하지도 못한 사이에 일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양질전환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듯이, 충분한 양이 채워져야 질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물도 100도에서 끓지만, 끓기 전에 99도가 될 때까지는 데워져야 합니다. 충분히 데워질 때까지는 끓지 않다가 100도가 되면 액체가 기체가 되어 끓어오릅니다. 양이 질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야가 되었든 10년 동안 파고 또 파면 그때서야 실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 이 본문의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말씀을 아침 QT시간에 읽으면서 두 가지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두 가지 마음이 들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두 가지 마음 중에 하나는 위로입니다. 어찌됐든 하나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일하시는구나 생각하니 위로가 됩니다. 두 번째 마음은 여전히 답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이 언제 끝나는가, 언제 이 일이 이루어질 건가, 언제 내가 원하는 만큼의 기쁨과 즐거움이 오냐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말씀을 보면 이 두 가지 마음이 생깁니다. 위로와 답답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세상에서 말하는 양질전환의 법칙을 말씀하고자 하느냐 하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이 일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9절에 보면,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1년 안에는 이민족을 쫓아내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 하면 가나안 땅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을 갑자기 행하게 되면 그 땅에 승냥이가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황폐한 땅에 들짐승이 거하게 되면 그 땅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몰아내겠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시는 일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갑자기 내가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면 좋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어차피 주실건데, 어차피 이루실건데, 그렇다고 해서 마냥 교만해지거나 변질되거나 하지 않을텐데 왜 안 주시느냐 이 말입니다. 그저 우리 생각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황폐하게 되어 들짐승이 살아 우리를 헤칠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답답한 가슴을 안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시기 원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별다른 목적과 소망에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주님은 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답답한 가슴을 안고 그냥 그날을 안타까워하고 과거를 곱씹는 일을 하기보다는 또 다른 관심사를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그렇게 하더라고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또 다른 소망을 품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소망에 중심을 둘 수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역사하기 원하실까, 이 시간 동안 주님께서 무엇을 안겨 주기 원하실까. 이스라엘 백성이 해를 당할까 염려하신다고 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그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 보호하신다는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 이루어주실까 하는 마음으로 답답해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별다른 소망과 목적에 마음을 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32-33절 보면 또 다른 소망이 더 있습니다.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23:32-33) 이민족을 쫓아낼 때 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도 쫓아내야 합니다. 만약 다른 민족은 쫓아내면서도 그들이 섬기는 신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망과 기쁨과 만족을 바라고 있지만, 결국 그 결과가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올무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듣고도 똑똑한 여러분과 저는 주님, 충분히 준비했거든요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기다렸거든요’ ‘수십 년 기다렸거든요’ ‘내 인생 지금까지 기다렸거든요. 이렇게 오래 기다렸어도 인생의 잭팟을 터뜨리지 못했거든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라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내 평생 너무도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47살이 될 때까지도 대학교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요즈음도 40 넘으면 대학 교수가 되기 어렵습니다. 신임교수를 채용하는데 먼저 된 교수보다 나이 차이가 나지 않거나 자기보다 더 많으면 어떻게 같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학교수가 된 이후 57세에 칸트가 세상에 내놓은 가장 유명한 책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역작을 쓰게 됩니다. 그런 후 환갑이 되어서야 칸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가 받는 평가는 이렇습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은 칸트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이후 철학은 칸트라는 호수에서 흘러 나갔다라고 말이죠. 이런 걸 대기만성이라고 하죠. 위로가 좀 되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도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위로가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이 너무 더디고 뭔가 빨리 안 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고 있지만 아직 충분한 것이 오지 않았을 때 이 말로 위로를 받습니다. 여러분,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대기만성이라 생각하시고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SNS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메이블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사람의 카카오스토리 글입니다. ‘뉴욕은 캘리포니아보다 3시간 빠르지만 그렇다고 캘리포니아가 느리다는 뜻은 아니다. 22살에 졸업하고서도 좋은 직업을 구하는데 5년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25살에 CEO가 되고 50살에 죽는 사람도 있다. 50살에 CEO가 되고 90년 동안 사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가 계속 혼자서 살고 누군가는 결혼을 한다. 오바마는 55살에 은퇴했지만 트럼프는 70살에 취임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대에서 일을 한다. 당신의 주위 사람들 중 누군가는 당신 보다 앞선 것처럼, 누군가는 뒤쳐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자신만의 시간대에서 각자의 레이스를 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을 질투하지도, 무시하지도 말아라. 그들에게는 그들의 시간대가, 그리고 당신에게는 당신의 시간대가 있다. 인생이란 자신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의 기다림이다. 그러니 안심하라. 늦지 않았다. 이르지 않았다. 아주 제시간에 있을 뿐이다.’ 감동적인 통찰입니다.

   나에게 딱 맞는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의 통찰이지만 이 역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보게 하는가 하면, 답답한 가슴으로 살고 있지만 지금 이 시간에 나에게 풍성한 시간, 귀한 시간으로 허락하셨을 텐데, 이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을 주목하며 살 것인지를 주목하여 바라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 주리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출애굽기 1317절에도 주님이 조금씩 조금씩 일하셨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이집트에서 홍해바다를 건너서 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과 제가 아는 것처럼, 홍해바다를 건너서 가나안 초입 곧 블레셋 땅으로 건너가는 길은 3일 길이면 충분한 길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데 몇 년이 걸렸는가 하면 40년 세월이 걸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13:17)

   이스라엘 백성이 며칠 전에 애굽 군대가 수장되는 것을 보고 애굽을 떠나왔지만, 아직 정처가 없는 상태입니다. 정든 고향은 떠나왔고 아직 목적지에는 들어가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길에 수많은 대적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텐데 그 대적들이 길에서 막아선다면, 그리고 거기서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왜 나왔느냐. 왜 정든 고향을 버려두고 이런 고생길을 시작해서 여기서 적군의 손에 죽게 하느냐하는 생각이 들게 될 것이고 온 백성이 이집트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품는다면 막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맛보지 못한 채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 맛보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홍해의 광야 길로 길을 돌려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010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우리가 만나서 예배하는 이유는 없는 시간 쪼개어서 억지로 예배해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은 도적처럼 우리의 시간과 여력을 빼앗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기 위해서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 70년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70년이라는 세월은 아버지가 포로로 끌려가서 아들 손주를 볼 수 있는 세월입니다. 올해 상반기부터 코로나19로 계속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반기가 되면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경제활동이 계속 위축될 것이고, 국가간 봉쇄를 하고 있으니 모든 활동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먹고 사는 문제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인플레이션이다, 수요공급이 맞지 않아서 물가가 뛴다든지, 청년 실업률이 올라간다든지 하는 등의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말씀을 믿기보다는, 오히려 조금씩 조금씩 더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1-2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70년 포로생활이라면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이루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주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니 징계를 받는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에 하나님은 땅을 쉬게 했습니다. 70년 동안 땅을 쉬게 했습니다. 며칠 전에 처남과 함께 들깨 모종을 옮겨 심었습니다. 그런데 들깨 모종은 같은 밭에 3년 정도 심는 게 좋고 그 다음 해에는 다른 작물을 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계속 한 작물을 심으면 소출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70년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풍성한 수확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심을 회복하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가나안 땅을 주셨고, 그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이루셨습니다. 수천 년 지나서 바벨론 포로가 되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루시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간표 속에 살고 있든지 간에 주님은 주님의 풍성한 약속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어려움 속에, 답답함 속에 살고 있을지라도 이제는 나에게 어떤 소망을 주시려고 이런 어려움을 주셨는가 하고 물어보시고 말씀을 열어보시고 성도와의 교제와 기도를 통해서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수많은 목사님들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개척교회를 하면 주일에는 온 식구가 헌신하기 때문에 오후쯤 되면 탈진상태가 됩니다. 그중에 힘이 좋은 목사님은 이런 시간을 10년 정도 해내십니다. 그러면 교회는 풍성해질 수 있어도 정작 목사님 자신은 탈진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요? 도망가든지 안식년을 가지든지 해야 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가 송포에 온 지 13년이 됐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앞으로 13년을 더하면 은퇴할 나이입니다. 말이 됩니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못 쉬었습니다. 안식년 못 가졌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 형편에 안식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할 배짱은 없고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작년에 제가 화상을 입고 열흘 동안 병원에 입원해서 쉬었습니다. 제가 간증했습니다. 너무나 은혜가 되었고 큰 쉼이 되었다고. 그래서 하루를 1년씩 잡아 열흘이니까 도합 10년치를 다 쉰 겁니다.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화상 입은 흔적도 없이 다 나았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도 쉬셔야 합니다. 이렇게 적용하고 싶싶습니다. 우리 눈앞에 관심을 두고 있는 그 일은 별다른 목적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답답해하지만 맙시다. 그 시간에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만들기 원하시는지, 몸된 교회에 무엇을 더 보충하기를 원하실까를 생각하면 감사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은 주님께 더욱 관심을 두고 응답받을 시간입니다. ‘어떡할꼬! 어떡할꼬!’ 근심만 할 시간이 아니라 축복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적용하며 도전하기 원합니다. 안식일 문제입니다. 주일은 안식일의 뜻을 물려받은 날입니다. 예배 가운데 주일은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섬겼으니 끝났다가 아니라 주님과 생명의 교제 속에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좀 전에 개척교회 목사님 이야기했지만, 저부터도 설교준비하고 예배 봉사하고 이것저것 섬기니 바쁩니다. 또 성도들 간에 교제 속에 서로 갈등이 있어 힘들어하곤 하는데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예배가 힘들어요. 주일을 섬기는 것도 일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그나마 저는 대기만성이라는 말로라도 위로를 받습니다만, 사실 저는 주일에 말씀을 선포하며 섬기는 속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예배와 안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때는 아브라함과 언약한 때보다 430년 후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에 대한 말씀은 아브라함과 언약하기도 전인 창세기 1-2장에 이미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율법 말씀도 없고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언약도 없을 때 최초의 약속이 안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신 그날은 여섯째 날까지 주님 일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으니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수고를 끝내고 완성하신 완성자의 만족이 있고, 완성한 자의 평안이 있고, 완전한 자의 쉼이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 곧 쉼에 대해 잘못 이해하시면 안되겠습니다. 백화점 점원들은 주일에 일하고 월요일에 쉽니다. 그렇다고 월요일에 쉬는 것이 안식은 아닙니다. 주일에 피곤한데 목사님이 교회 나오라고 하면 목사님이 여러분의 안식을 빼앗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쉬는 게 안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셔서 나를 인도해주심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돌보심으로 인해 마음에 평안과 만족이 있으니 그 만족을 누리는 것이 바로 주일입니다. 제가 종일 예배를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은 꼭 지켰지만, 안식년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철저합니다. 얼마나 안식일을 지키는가 하면 1973106일에 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쟁을 주도한 이집트와 주변 중동국가들이 어떤 날 전쟁을 개시했는가 하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국들이 123차 전쟁에서 모두 패배한 터라 이번에는 꼭 이겨야 되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최적한 날을 골랐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쉬는 날 공습을 시작한 것입니다. 전쟁 발발 초기에는 이스라엘이 당연히 밀렸지만 결국은 주변국들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전쟁에 이기고자 할 때 안식일을 골라 전쟁전략을 시도할 만큼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기도에 축복이 되었습니다. 1950625일 새벽에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함께 하신 분들 중에 절반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승만 내각의 많은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새벽에 공격을 한 것입니다.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이 이렇게 안식일을 잘 지켰는데 잘 못한 게 있습니다. 평생 못한 게 뭐냐 하면 안식년을 못 지킨 것입니다. 안식년 못 지키기를 몇 년 동안 못 지켰는가 하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사사 시대를 지나 마지막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 선지자와 다윗 시대부터 490년 동안 안식년을 갖지 못했습니다. 6년째까지 땅에서 곡식을 심어먹고 7년째 해에는 땅을 놀려서 땅심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안식하지 못한 해만큼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으니, 70년에 7년을 곱하면 490년이 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온 것은 양으로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는 것이요, 주님이 오심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에는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고생하며 갈등하다가 교회에서 찬양하며 예배하면서 안식합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에 와서도 갈등하며 고생하기도 하니 이게 무슨 안식이냐할 때도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말씀으로 도전을 받으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믿음에 어린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지나서, 정말 주님이 가나안땅에 있던 신을 쫓아내야만 했던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 예수 닮지 않은 모습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싸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주일에 아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당연히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을 때 주님은 별다른 일을 행하시는데, 그것을 넉넉히 넘어갈 수 있는 마음의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소망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주님 안에 평안을 누리고, 일주일 동안에 살아오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나빠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감사함으로 모든 삶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시간입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맡겨드리는 시간이 주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에 안식하지 않고 산다면, 바라는 것을 주어도 그것이 도리어 그를 해칠까 주저하실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얻었지만 그것이 올무가 되어버리는 것이라면 주님이 얼른 주시겠습니까. 그 모든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늘도 예배하고 내일도 예배하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내가 만족할 만한 최고의 순간을 빨리 주지 않아서 답답하신 분이 계시다면, 위로받으십시오.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답답한 마음 외에 주님이 내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성도와의 교제 속에서 내가 보충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안식일을 정말로 안식일답게 충분히 휴식하시고 안식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전하셔서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은 반드시 넘어가야 할 일이니, 세상 신을 반드시 쫓아내야 할 것이니, 쫓아내기 위한 싸움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신다면 주님이 우리 안에 더욱 소망있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SNS를 통해서 세상 펀치를 많이 맞으실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과 저의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교회로 교회 되게 하시고, 주일로 주일 되게 하시고, 예배로 예배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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