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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정결한 그리스도인의 기쁨(스바냐 3:9-20) 이정식 20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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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소망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경험이 반복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소망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이른 아침에 맑은 공기를 마시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10, 11시 점심시간을 지나 오후 2, 4시가 되면 마음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렇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맑은 아침이 밝아옵니다. 이것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팍팍한 삶 속에 있어도 내일 아침이 또 오기 때문에 그 아침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휴가철입니다. 올해 휴가는 별로 신통치 않겠습니다만, 아무튼 어딘가로 갈 수 있습니다. 계곡도 좋고 바다도 좋습니다. 우리가 왜 계곡으로 가고 바다로 갑니까. 계곡으로 가면 맑은 물, 시원한 바람이 있습니다. 바다로 가면 망망대해 푸른 바다와 청량감이 넘치는 파도소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곡물이 항상 맑은 물을 흘려보내고, 바다는 푸른 바닷물을 반복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거기로 갑니다. 아침을 소망하는 것은 매일 아침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시기하고 질투하여 내일 아침이 안 와버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맑은 아침을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이 우리 사는 모습이 못마땅해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침빛을 소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 반복된다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소망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소망인데, 우리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입으로는 소망이라 할 수 있어도, 내 삶으로는 결코 그리스도를 소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매일 아침이 반복적으로 경험되는 것처럼, 일 년에 한 번 맑은 물 계곡과 푸른 바다가 반복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반복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배의 목적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소망입니다. 아침에 동네 골목을 지나면서 묵상해보았습니다. 가는 길가에 보면 나무가 있는데 그냥 그대로 어김없이 나무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반대쪽 길가 밭에는 쑥이 있는데, 쑥이 벌써 철이 지나 대궁이가 많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쑥도 여전히 쑥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잡초들도 여전히 잡초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잡초가 쑥이 되지도 않고, 쑥이 나무가 되지도 않고, 나무가 풀이 되지도 않지만, 잡초는 잡초대로, 쑥은 쑥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똑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각 사람의 특징과 성품대로 지으셨습니다. 그 성품과 환경에 따라서 그대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초대교회 성도들도 행했습니다. 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하면 사도행전 243절부터 47절까지에 보면,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고, 믿는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공유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날마다 모여서 예배하며 떡을 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기를 좋아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심방하고 권유하여 하나님 말씀 앞에 서로를 세우기를 기뻐했습니다. 세상에 물든 악도 멀리 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라는 소망이 가득했습니다.

   세상도 자기 나름대로 선함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나가고자 하는 힘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을 보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이해관계 속에서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았어도 하나님의 길로 나가지 못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도 뭘 알기는 안다는 말입니다. 비록 그림자 같은 비전이기는 하지만 보고 칭찬할 줄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살지 못해도 칭찬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 그런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소망입니다. 스바냐 319-20절에 보면, “그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 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3:19-20)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불러 일 시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명성을 얻게 하고 칭찬을 얻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상을 받는 많은 그리스도인 연예인들이 수상하는 자리에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마음은 여러분과 저에게 칭찬과 명성을 안겨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앞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하고 뒤에서는 자기 영광을 다 취하는 그런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 따라 살면 칭찬과 명성을 받습니다. 그랬을 때 그 칭찬과 명성을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칭찬받는 일에 익숙해져야겠습니다. 명성을 얻는 일에도 익숙해져야 하겠습니다. 1세대 목사님들이 기도하실 때마다 부족한 종은 십자가 뒤로 감추어주시고하며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결말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칭찬도 명성도 충분히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 걸맞는 책임을 감당하므로 더욱 칭찬과 명성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20절 하반절에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계십니다.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3:20) 세상은 소망이 없을 때, 너희는 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소망 있게 살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주님의 말씀과 뜻을 지키며, 저들과 똑같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을지라도, 그 말씀을 이루려고 살아서 세상이 알 수 없는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번민 많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스바냐 3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3:5) 여러분과 저의 마음 가운데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불의가 가득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보다 하나님 말씀을 거절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천만 인이 그렇게 살지라도 여호와는 의로우십니다. 천만 신앙인이 불의를 행하신다고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아침마다 빠짐없이 의롭고 공의로운 빛을 비추십니다. 이를 반복적으로 행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의롭고 공의로운 자가 없지만, 주님은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의로움과 공의를 부어주십니다. 매일 아침 말씀을 보고 계시나요? 우리가 어디에서 우리를 참으로 인도할 목자를 만나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가십니까?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만 의롭고 공의로운 말씀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치가 이런데도 하반절에 말씀하기를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바로 서있는지 서있지 않는지, 말씀이 나를 주관하고 있는지 주관하고 있지 않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누구를 향해 하신 말씀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소망을 회복합시다. 소망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점점 더 나빠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더 나빠졌는지 확인해볼까요? 스바냐 16절에 보니까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입에만 소망 마음으로는 반대하는 겁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바냐 112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복도 화도 내리지 않으신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안 계신단 말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섬기는데도 주님이 복을 안 주시고, 주님 안 섬기는 사람은 복만 잘 받는 걸 보니 복도 화도 제대로 분간하여 내리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선지자도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 살고, 합법적인 틀 내에서 이득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심방을 가면 깜짝 놀랍니다. 평소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에 한 번 만나서 예배하고 헤어지니까 한 사람이 인격으로 보이지 않고 숫자 1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분이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똑똑하니까 3초만에 그 사람의 말투, 표정, 행동을 보면서 스캔을 할 수 있습니다. ‘이분은 이런 사람인가보다.’ 하지만 교제를 해보면 그분의 속내가 어떤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뿐입니다. 내가 바쁘다 보면 다른 이에게 내 시간을 내줄 틈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함께 경험하고자 하는 소망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경험할까요?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하는 경험을 날마다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는 말씀만 듣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내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은 복도 화도 내리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저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너무 몰라요. 그래도 빤히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가다보면 어디까지 몰려가겠는가 하면, 스바냐 117절에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행동 하나 하나가 잘못된 것을 넘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과 명성을 입을 사람으로 지으셨는데, 이내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택한 백성이었어도 스바냐가 예언하기 전에 이미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남은 유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예언했지만 유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게 하셨고, 70년 동안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대적이 된 이스라엘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정결케 하십니다! 70년 포로 생활할 동안에,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490년 동안 안식년 율법을 지키지 않아 쉬지 못한 땅을 쉬게 하셨습니다.

   스바냐의 말씀을 받는 청중들이 누군가 하면 포로가 된 후에 남은 사람들입니다. 정결케 된 남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가진 공동체로 다시 세우셨습니다. 남은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스바냐 215절에는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대적한 이스라엘의 결론입니다. 요한계시록 310절에는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구령상담할 때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원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으로 주님 복음을 듣고 마음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람이 된 우리가 정결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주님을 향한 소망을 반복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을 때, 다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70년 포로생활하면서 그 고생을 시키신 이유는 정결케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반응할 수 있도록 다시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똑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 은혜로 마지막 날에 주님께로 갈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티켓을 구입하셨습니까? 그것으로 우리 주님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무엇으로 갑니까 이 땅에서 받는 명성과 칭찬으로 가는 것입니다. 아니, 그걸 받아야 천국 간다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로움과 공의로운 소망을 아침마다 경험하듯이,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빛을 경험하듯이, 맑은 계곡물의 깨끗함을 경험하듯이, 주님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지켜가는 자에게 우리 주님이 천국의 영원한 보장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중하냐. 이 땅에서의 우리 신앙이 어떠하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느냐 안 받았느냐가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복됨이, 말씀을 향한 헌신이,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교회 오십니까? 교회 오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들려주기 원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교제해 보면 코로나19로 인해 성도님들의 삶의 현장이 너무 팍팍하더군요. 부친 한 분은 몸이 불편해서 못 오셨고, 식사하는 시간이 불편해서 오전예배만 드리고 가시는 분도 계시고,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들어서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일이 많아 너무 바쁘다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 이렇게 팍팍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오실 때는 하나님의 현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궁금해 하시면서 나오셔야 합니다. 요새 제가 좀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손주들을 마음 놓고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들과 손주들을 불편한 마음으로 만나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해요. 그러나 여러분 안식일은 종일 드려져야 합니다. 주일은 종일토록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 교제를 나누는 날입니다. 우리 주변의 교회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렇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현장이 아무리 팍팍하여도 하나님의 현장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정결케 하기 위해, 깨끗케 하기 위해 날마다 말씀의 빛을 비추십니다. 우리가 성경책을 여는 순간, 거룩함이 무엇인지, 형제자매의 교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장입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저 모두를 하나님의 현장으로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우고 계획한 곳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게 서서 세상의 칭찬과 명성을 입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온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칭찬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진 후 얼마 안 되어서 네로 황제의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모이지 못하게 됐습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이지 못하게 하니까 비밀 장소에서 비밀리에 모여서 예배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오르페우스교라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이 종교는 축제의 신을 섬기는 카니발니즘을 추구하는 종파였습니다. 그 신봉자들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현현을 위한 광란의 축제를 열고 짐승이나 어린아이를 산채로 찢어 그 피와 살점을 나눠먹던 행태 때문에 악명이 높았습니다. 주후 64년 로마 대화재를 기점으로 황제 네로가 기독교인을 극심하게 핍박한 후 로마제국 전역에서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신의 뜻에 어긋나는 종교로 규정했습니다. 이때부터 초대교회는 항상 비밀리에 주일예배를 드려야했는데, 비밀리에 드린 예배 때문에 심각한 오해를 낳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예배를 사랑의 교제(성도의 교제)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눔(주의 만찬)’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을 로마인들은 오르페우스교의 축제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하는 사랑의 교제는 집단적인 난교로 오해했고,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은 어린아이를 죽여 나눠먹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죠.

   이런 오해가 주후110년까지도 계속되었는데, 소 플라니우스 총독이 사실 확인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조사한 결과를 트라얀 황제에게 보고서로 올렸습니다. “그들(기독교인들)은 정해진 날 모여 그들이 신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에게 기도문을 낭독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엄숙한 선서를 하는데, 이 선서에는 사악한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기, 절도, 간음, 무고한 모함 등을 행하지 않을 것과, (기독교인으로서) 그들이 소명을 받은 책임을 거부하지 않을 것을 선서합니다. 이렇게 한 뒤에 보통 그들은 모임을 해산하고, 다시 모일 때는 보통의 무해한 식사를 합니다.” 건전한 모임을 하는 것을 확인했다는 보고서입니다. 그러니 초대교회 때부터도 온 세상으로 칭송받으면서 동시에 의심의 눈초리를 항상 받은 것입니다. ‘도대체 저 집단은 뭘 하는 집단인가하고 말이죠.

   오늘 우리 교회들이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교회가 전염병 확산의 온상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교회들은 그런 비난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감염자가 생기면 교회가 폐쇄되니까 큰일은 큰일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조사할 경우에 건전하고 건강하면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제가 건강하고 건전하게 예배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소망의 끝이 아닙니다. 그건 세상의 관심사입니다. ‘, 위험하지는 않네.’ 그러면 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소망이고, 그 소망을 위해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고,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며, 세상이 몰랐던 하나님의 빛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세우는 데에 여러분과 저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있습니다. 동감하십니까?

   저는 지금까지 저를 여러분의 담임목사로 기쁘게 섬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마 웬만한 교회들보다 훨씬 더 여러분이 깊이, 그리고 헌신적으로 섬겨주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공식적으로 요청드립니다. 저를 돕고 저와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어야 합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 말씀과 달리 엉뚱한 곳으로 간다면 저를 꾸짖으십시오. 그러나 말씀에 비추어 옳다면 우리 삶의 현장이 거부신호를 보낼지라도 따르시기 바랍니다. 정히 저를 따르기 싫으시다면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의롭고 공의로운 빛을 비추시니 소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장이 우리 삶의 현장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기필코 세상으로부터, 먼 친척들로부터 저들은 하나님의 자녀다.’ 칭찬과 명성을 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는 목적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이유이며, 서로 심방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마음이 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아도 주님이 70년 포로가 되게 하셔서라도 반드시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 시국에 어제 함께 축구하는 목사님 자녀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신촌성결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아주 이른 시간에 가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교회 식당으로 갔습니다. 요즈음 여러분이 공공기관에 가셔도 경험하시고, 식당에 가서도 경험하실 것입니다. 출장부페를 불렀는데 배식하는 시간에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녔습니다. 의자는 한쪽 방향으로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국에는 그렇게 하면 됩니다. 왜 예배가 왔다갔다 해야 합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이 왔다 갔다 해야 합니까. 오늘부터는 그런 논의를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어떻게 하면 이 명성 이 칭찬을 살아생전에 우리 신앙생활 속에 누릴 것인가. 아침마다 비추시는 주님의 의로움과 공의로움을 경험할 것인가 하는 데에 우리 마음이 가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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