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만나와 메추라기(출애굽기 16장) | 이정식 | 2020-07-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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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살면서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는 것 때문에 만사의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성경에 에서도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권을 팔아넘기기도 했습니다. 장자권 보다 배고픈 걸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장발장은 물론 소설 속 인물이지만, 빵 한 조각 훔치다가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수많은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시장에서 훔쳐 먹다 잡혀서 두들겨 맞고, 그래도 배고프면 또 훔치곤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구와 함께 밥을 먹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윗 왕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의 수혜를 받은 인물이 므비보셋인데 남은 평생을 왕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를테면 직장에서 사장님과 함께 식사 자리에 함께 했다는 건 영광입니다. 정치인들이 대통령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지는 것도 영광입니다. 게다가 대통령 옆 몇 번째 자리에서 식사를 하느냐 하는 의전도 중요합니다. 의전을 잘 못하면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흥부는 배가 고파 형 놀부 집에 찾아갔다가 밥알 묻은 주걱 매를 맞았습니다. “너한테 줄 건 없다”는 매정한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서러움을 겪었습니다. 밥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밥이 없으면 어떻게 삽니까. 심지어 하나님은 말씀에서 우리 인생이 하는 모든 일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면 배(腹)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무슨 기업을 경영하더라도 그 일의 근본 시작은 배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헛소리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먹는 것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주일에 식사준비를 하다가도 다툼이 생길 수 있는 건 피곤하고 힘들기 때문이죠. 하지만 밥을 잘 먹는 것은 중요합니다. 제 친구가 직장암 3기로 투병 중입니다. 조금 좋아져서 며칠 전에 통화해보니까 자기 몸에 맞는 음식이 무엇인가 찾고 있더라고요. 고기를 먹으면 이틀도 안 되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답니다. 몸에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암도 이겨야겠고 몸도 건강해져야겠는데, 평소 같으면 고기를 먹으면 힘이 나지만, 몸속에 문제가 생기니 소화도 잘 안되고 몸을 더 힘들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자기 몸에 맞는 음식이 뭔지 찾아보는 중이랍니다. 평소에는 주님 은혜로 무엇을 먹든지 다 소화시킬 수 있지만, 몸에 문제가 생기면 내 몸에 맞는 음식을 섬세하게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신탕을 먹게 되었는데 거기에 엄나무와 옻나무, 인삼을 넣어 끓인 것을 먹었는데, 속이 편했다는 겁니다. 제 친구가 하는 말이 아마도 옻나무 때문인 것 같다고 했어요. 보신탕이 흡수력이 뛰어난 건 아는 바와 같은데,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말이 있듯이 옻나무에 있는 독이 도리어 속을 편하게 한 것 같다고 말입니다. 우리 몸이 그렇게 까탈스러운가 생각해 봅니다. 건강이 약해지면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모양입니다. 삼십 대 사십 대 오십 대 지나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가려먹어야 합니다. 이토록 먹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좀 더 이야기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들어간 지 3일 만에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먹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못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집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에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올 여름 수련회는 코로나로 취소가 됐지만, 예전 수련회 갔던 기억을 떠올려보십시오. 하루는 그냥 저냥 지나갑니다. 이틀째도 웬만합니다. 하지만 밥하고 빨래하고 하다가 3일이 되면 불평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을 하지’ 하는 생각이 들고 괜히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먹을 게 변변찮으니까 3일째 되는 날에 불평을 했습니다. 그 불평 소리를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준비하신 게 있는데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였습니다. 메추라기는 세상에 있는 메추라기를 주님께서 바람을 불어서 이스라엘 진 주위에 떨어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세상에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아침 이슬에 내린 후 마른 후에 희고 깟씨 같은 것이 생겼고, 그렇게 생긴 만나를 하루하루 거두어 40년 광야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만나와 한 달 동안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불평했습니다. ‘우리가 나온 애굽에서는 양파와 파와 마늘도 먹을 수 있었고, 고기도 먹을 수 있었는데, 그것도 못 먹고 만나 메추라기도 하루 이틀이지!’ 했습니다. 밥에 김치 하루 이틀이죠. 만나가 아무리 단맛이 나는 것이었다고 해도 아주 질렸을 겁니다. 그러나, 가난해서 먹을 것 다 못 먹을지라도 지금 먹고 있는 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전도서에는 너희가 먹고 마실 때 즐거워하라고 했고,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허락한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무엇을 먹든지, 내일 무엇을 마시든지 기쁘게 감사함으로, 그리고 맛있게 드시기 바랍니다. 먹는 이야기 좀 더 하겠습니다. 같이 축구하는 목사님이 목회가 잘 안 되어서 교회를 접었습니다. 이분이 제일 즐거워하는 게 뭐냐 하면 강이나 바다에서 조개나 문어 같은 걸 잡는 겁니다. 제주도 같은 경우에는 1년에 한 번 2만원 정도 하는 할인티켓을 구매해서 3박4일 정도 다녀옵니다. 이번에는 속초를 갔는데, 동해바닷가에서 바지락 같은 조개를 잡았는데 그걸 단톡방에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한 분 목사님이 댓글을 달기를 “부럽다”고 썼습니다. 저도 답을 하기를 “부럽습니다. 하나님도 신나하셨겠네요.”하고 썼습니다. 제가 사십 대만 되었어도 ‘목사님이 무슨 고기나 잡고 그런 걸 좋아하나’ 했을 겁니다. 지금쯤 와서 보니까 다 쓸 데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를 세운다고 열심히 하지만 너는 정말 즐겁냐는 거죠. 그 목사님이 조개잡고 문어잡고 하면서 정말 즐기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입합니다. 그만큼 즐거워하는 겁니다. 그분이 조개 잡으며 좋아라 할 때 하나님도 즐거워하실 겁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볼 때 자식이 별로 탐탁지 않은 일을 해도 그걸 자녀가 좋아하면 “너, 좋으냐? 니가 좋으니 나도 좋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정말 좋다. 놀아라. 잘 먹으라. 잘 마셔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예배 외에 좋아하는 일 있습니까? 좋아하는 일 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 있어야 예배도 즐겁습니다. 일상 생활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못 누리면, 예배도 신통치 않습니다. 제가 100% 확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행복하지 않은데 예배가 행복하다? 거짓말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행복한 뭔가를 하십시오. 괜히 하나님 앞에 ‘왜 돈을 안 주십니까, 왜 주셔도 충분히 안 주십니까?’ 떼쓰지 마시고, 있는 형편에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좋고 주님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드실 때에도 기쁘고 감사함으로 드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이 별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이 만나를 주실 때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그날 양식은 그날 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날그날 주시는 만나가 은혜라고 말입니다. 만일 만나를 보관해두면 썩고 부패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는 이 말씀을 듣고도 남겨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똑똑하니까 말이죠. 농사를 지을 수 있어서 오늘도 내일도 먹을 것이 있으면 안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내일도 내려오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왜? 만나는 땅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온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때로 번개도 주시고 비도 내리시는데 햇빛도 주시는데 그 모든 건 사람의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있습니다. 그것처럼 오늘 내려온 만나가 내일도 내려오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보관해두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벌레가 나고 썩었습니다. 20절에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16:20)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계속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16장 33절부터 보시면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출16:33-35) 하루가 지나면 썩어버리는 만나를 항아리에 넣어두고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보관이 되었을까요? 네, 보관이 되었습니다. 대대로 기념하라고 하셨으니 보관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만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열왕기상 8장 9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왕상8:9)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언약궤 앞에 두고 함께 보관하였는데, 지금 만나 항아리도 없고 아론의 지팡이도 없습니다. 심지어 언약궤도 지금은 없습니다. 이 셋은 다 천국의 모형인데 모형은 전부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때 그 끼니로 육체 속에 들어가면 힘을 내고 분해되어 없어집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가 먹고 입고 사는 문제이지만, 이 모든 것은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침 끼니는 점심 먹기 전까지 효력이 끝납니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그 끼니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평생 고민합니다. 평생에 사는 목적이 되기까지 합니다. 모든 수고의 목적이 너의 배를 위한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먹을 때 우리가 행복합니다. 우리가 행복할 때 주님도 행복하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다 먹이셨습니다. ‘그거 다 썩는 양식인데 뭘 그런 데 집착하느냐’ 하고 윽박지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에 다 주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음식은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고, 결국에는 썩는 것임에는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말씀을 주기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원 구절은 신명기 8장 3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8:3) 이스라엘이 고생한 것은 못 먹어서 고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고생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먹을 것이 주어졌습니다. 먹는 것 때문에 어려웠던 것은 아닙니다. 모세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병에도 걸리고, 구덩이에도 빠지고, 불뱀에도 물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1세대 중 대부분의 사람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이 실패를 읽게 하시고 보게 하시겠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과 여러분과 저에게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못 먹어서 고생한 것이 아니요, 만나에 질려서 고생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고생했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은 만나와 말씀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또 풀어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고백한 한 여인이 있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우며 우리는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종종 이런 모순적인 결론에 맞닥뜨립니다. 어려운 시절을 견디어 낸 사람이 선한 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 말입니다. 반면에 별 어려움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인생을 기뻐하는 일을 더 어려워합니다. 이 사람을 인터뷰한 작가가 말하기를 “삶은 꽤 공정한 것이며, 행복은 상대적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말인데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해보니까 실제로 이런 역설적인 결론이 내려지더라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선한 삶을 더 소중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잘 산 사람일수록 선한 삶에 대한 소망이 없다고 합니다. 시골 어르신들을 봐도 종종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사셨는데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 하기를 결단코 싫어합니다. 반면에 부족함 없이 산 사람들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고 아픈 고백을 하면서도 삶을 기뻐하며 즐길 줄 알고, 선한 삶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즐거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까 몰라야 되겠습니까. 선한 삶이 소중하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할까요 몰라도 될까요? 그렇게 되려면 자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실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가까워졌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 2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요한복음 6장 58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8) 조상들이 먹고 죽은 건 만나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건 만나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왔지만 하늘로 올라가지는 못했습니다.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내려오실 권세도 있고 올라가실 권세도 있으셨으니 여러분과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만나는 먹을 수 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먹습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어떻게 먹습니까. 어떻게 먹어야 영생을 얻습니까? 믿음으로 먹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소화시켜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의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1년에 한우 소고기를 한 번 먹을까 말까 합니다. 그러니 한 번 먹을 때 참 기쁘겠죠. 그런데 영생을 얻었다 하는데 소고기 먹을 때만큼의 느낌이 안 와요. 뭐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 아닙니까. 영생의 기쁨이 사라지면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생을 맛보지 못함은 우리 마음에 탁류(濁流)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속에 흙탕물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이고 먹고 사는 일은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많은 배고픈 사람들의 배를 채우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오니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요6:26)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4:32) 그렇다면 이 양식은 예수님과 여러분과 저의 양식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내 삶에 잘 된 일로 우리 신앙이 끝난다면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신앙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면 주님의 양식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곧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나를 부르셔서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고, 이 땅에 파송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게 하시고 그 일을 온전하게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판단과 결정은 항상 플러스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일을 위해 플러스가 되는 쪽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빼고 빼는 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빼는 것이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빼십시오. 지우십시오. 딜리트 키를 누르십시오. 없애버리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주님을 위한 일이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도록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일을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없던 일도 만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구약시대에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더라는 걸 교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축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보고 뭘 배우라고 하셨는가 하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 영생하도로 위해서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똑부러지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고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인 우리, 하나님 앞에 거듭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어떤 간절함으로 할 것인가, 얼마나 내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느냐가 내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빈약한 삶에서 좀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축복의 고백을 하는 것으로 신앙을 마친다면 그는 아직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오늘 먹고 없어질 만나만 먹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영혼을 위해 모든 수고와 정성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드릴 것이 뭡니까? 내 모든 영혼, 내 모든 몸을 가지고, With all my heart, with all my soul,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이 성도의 마땅한 삶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지금까지 주님이 나를 길러주셨고, 인도하셨고, 나를 보살펴주셨다는 고백으로 마친다면 그 만나 그 메추라기를 잘못 받은 것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과 저에게 보내주신 것은 그분이 우리 생명의 주, 영생의 주님이 되셔서 그분이 하신 일을 함께 하라고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청년들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일반 동호회나 단체들에서 하는 것과 비슷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단체 생활에서 사람 간에 겪는 갈등이 있는 것처럼 교회 생활도 그렇습니다. 관계 속에서 생긴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비슷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이런 것밖에 없다면 영생은 어디로 갔습니까. 주님의 부르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살아갈 소망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한우 고기를 먹을 때 그렇게 힘이 나고 기뻐서 ‘살맛 난다’ 고백한다면,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의 소망은 더욱 힘이 나고 기쁘고 살맛나야 할 줄 압니다.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일을 만드셔야 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셨다면 기도합시다. 부탁드립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주님이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걸 알고 계셔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도는 영생을 위한 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먹을 것을 위해, 내일도 먹을 것을 위해, 그 다음 날도 더 잘 먹을 것을 위해 신앙을 다 쏟아 붓는다면 엇길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회는, 성도의 수준은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으십시오. 영생의 소망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주님 일에 동참하고 싶은 소망이 우리 마음에 생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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