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홍해바다를 건너가라(출애굽기 14장13-31절) | 이정식 | 2020-06-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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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잠을 좀 잘 잘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개 10시간이나 13시간 이상 푹 자고 나면 상쾌함이 찾아옵니다. 몸은 아주 가벼워집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어제 그랬습니다. 아홉 시 경에 누워서 잠이 들었고, 새벽 2시 반쯤 깨었다가 아침 일곱 시까지 쭉 잤습니다. 제 몸이 상쾌해졌습니다. 마음도 가볍습니다. 보통은 오래 누워있으면 머리가 아프고 몸이 피곤합니다만, 가끔 피곤했던 몸이 곯아떨어지고 나면 상쾌합니다. 그런가 하면 놀지 못해서 힘든 사람은 잠을 안 자고 놀아도 그게 힘이 됩니다. 젊은 사람들이 가끔 그렇게 합니다. 어떻습니까? 쉬는 것이 되었든 노는 것이 되었든 온 몸이 상쾌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가끔이라도 그런 새롭게 되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찌 그런 날만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 헌신을 하지만 위로받지 못하는 헌신을 하기도 합니다. 봉사를 하지만 합당한 보상이 없는 봉사를 하기도 합니다. 또 비전을 말하지만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비전이 되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구원받고 은혜 안에 살고 있지만 마음이 허전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우리 구원의 증거는 예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감격이나 새롭게 되는 변화를 주셔서 그렇지 실상 우리 구원받은 증거는 주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위로받지 못하는 헌신, 합당한 보상이 없는 봉사, 지지를 얻지 못하는 비전, 예수 십자가 외에는 증거가 없는 구원에 내몰리게 되면 마음이 허전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홍해바다를 건너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홍해바다 앞에 서 있는 모세도 그렇게 홍해바다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습니다. 똑같은 상황입니다. 홍해바다가 열리리라는 무슨 증거가 없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3년 반 동안 가물었다가 드디어 비를 주신다는 약속을 듣고 나서 손바닥 만한 구름이 생긴 것을 보게 되었고, 그 구름이 증거가 되었고 징조가 되어서 힘 있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홍해바다가 갈라지리라는 어떤 증거도 어떤 징조도 어떤 흔적도 없는 그 바다 앞에 모세가 몰려있습니다. 모세만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전부 코너에 몰려있습니다. 모세야 하나님이 부른 사명자로 서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온 것입니다. ‘오기 싫다 오기 싫다’ 하며 버티다 버티다 떠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홍해바다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마음이 주저앉겠습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그렇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홍해바다 앞에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래도 하나님께 받은 믿음이 조금 있어서 13절처럼 말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 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14:1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격려하면서 모세에게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가게 할 것이고 애굽 사람들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귀뜸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대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하고 말했고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모세의 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사실을 살펴보면서 같은 마음을 품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출애굽기 3장 4절에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며 목축을 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를 찾아오셔서 모세를 부르셨고 곧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모세를 불러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모세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제가 누구라고 이집트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나오게 하라 마라 하겠습니까?”(출3:11참고)하며 묻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a) 하나님의 답을 듣고 모세가 올라갔죠?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없는 이유를 한 가지 더 말합니다. “주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하기를 ‘니가 만난 하나님이 누군데 우리를 니 말을 따라야 되느냐. 그 신의 이름이 뭔데?’ 하고 물을 것입니다. 제가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출3:13참조) 그럴 때 하나님이 대답해주셨습니다. “나는 야훼 하나님, 곧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다”(출3:14참조) 나는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창조하며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일을 행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모세가 올라가야 되겠죠? 갔나요? 안 갔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4장 1절에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렇게 말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내 소리를 듣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모세에게 그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증거가 없는데 제가 뭐라고 제 말을 듣겠습니까?”(출4:1참조)하고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알았다’ 하시고 두 가지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손에 든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었고, 그 뱀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 빼니 문둥병이 발했고, 다시 품에 넣었다 빼니 손이 깨끗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 만난 증거도 있으니 올라가면 되죠? 그래도 안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저는 입이 둔한 사람입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소서”(출4:10,13참조) 이쯤 오니까 모세가 좀 답답한 사람 같습니까 아니면 그저 이해가 됩니까? 모세가 이해가 되면서도 답답하시죠? 네,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내십니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그가 말을 잘 할 것이고, 너는 형 아론에게 신과 같이 될 것이다.”(출4:15-16참조) 모세는 하나님께 말씀을 듣고 아론에게 말할 것이고 아론은 모세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듣게 될 것이니, 그가 하는 말을 이스라엘 백성이 들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드디어 모세와 아론이 이집트 왕 바로 앞에 나아갔습니다. “바로여, 하나님의 백성을 내보내십시오. 우리가 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것입니다.”(출5:1참조)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왕이 믿음이 강한데 어떤 믿음이냐 하면 안 하기로 안 듣기로 하는 데에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여호와가 누군데 내가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내보내겠느냐 우리 이집트에는 온 신도 있고 다른 신도 있어서 그의 말을 듣지만 여호와는 대체 어떤 신이냐”(출5:2참조)하고 거절합니다. 사실 바로가 들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많고 힘 좋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노역을 시켜서 많은 경제활동을 하게 하고 요새 짓는 일로 이득을 크게 보고 있는데 왜 내보겠습니까. 이 사람들 빠져나가면 경제적인 손실이 큰데 왜 순순히 내주겠습니까. 이름도 모르는 신의 말을 왜 듣겠습니까. 바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모세와 아론을 힘들게 했습니다. ‘이것 봐라. 이놈들 힘이 남아있으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구나. 일할 때 제대로 된 재료를 주지 말고 생산은 더 많이 시켜야겠다.’하고는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들은 말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해방이 아니라 그전에도 괴로웠는데 더 심한 괴로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5장 21절에 보면, “당신들이 왜 우리를 바로에게 미움을 받게 하고 우리를 더 괴롭게 만들었느냐”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미워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믿음으로 떠나야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도 힘들고 모세도 힘들고 아론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출애굽기 6장 5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 언약을 기억했노라.”(출6:5)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어 내는 신음소리와 하나님이 들으신 신음소리는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가 힘들어서, 마음이 힘들어서 낸 신음소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들으신 신음소리는 영혼의 신음소리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바다로 내모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직 살만한 것입니다. 일하면 먹을 밥도 있고 고기도 먹고 가족을 건사할 벌이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혼의 소망 없는 신음소리를 듣고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신음소리를 말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살고 있지만 인생의 끝에 소망이 없는 삶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건져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여러 가지 힘든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있나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그 언약을 따라 소망 있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언젠가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알기에 홍해바다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는 아무 징조 없이 망망대해로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든지, 애굽 군대에 창칼에 죽든지, 힘들지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연명하며 살든지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홍해바다를 건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너가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거룩한 소망을 따라가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단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 앞에 모세가 서 있습니다. 모세가 여기에 오기까지 하나님이 어르고 달래고, 믿음 주고 확신 주시고, 이적도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의 이름도 야훼로 알려주시고 인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조금 생긴 믿음으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출14:14-23참조)하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 때 모세가 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뱀 꼬리 잡아 지팡이가 되게 할 때 모세가 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모세가 품 안에 손을 넣고 뺄 때 문둥병이 생겼다가 깨끗하게 될 때 모세가 한 일이 있나요? 아, 있긴 있군요. 손을 넣었다가 뺐군요. 그런 믿음으로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봅시다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게 하시는 말씀이 1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너는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동하게 하여라(전진하게 하여라) 너는 네 지팡이를 들어 올려 바다 위로 손을 뻗어 그것을 갈리라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 바다 가운데 마른 땅으로 들어갈 것이다. 보라 나는 애굽인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니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 뒤를 쫓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와 그의 모든 군인과 전차와 기병들 때문에 영광을 받을 것이다.”(출14:15-17) 왜 부르짖느냐! 왜 기도만 하느냐! 왜 생각만 하느냐! 왜 마음에 뜻만 품고 있느냐! 뭐 하라?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전진하라. 행동하라. 저지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동하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성경 전체를 한 마디로 정리하기를 “행동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행동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행동하기를 바라시고, 우리가 행동할 때 그 다음 스텝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헌신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봉사했지만 아무 보상이 없을 수 있습니다. 비전을 제시하지만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헌신하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입니다. 비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힙겹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때에 그 다음 스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생각만 하고 있고 기도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가 행할 때 하나님이 그 다음 일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보고 다시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2보 전진하기 위해 1보 후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드디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바다야 갈라지라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나니 홍해바다가 갈라졌습니까? 아니오, 바로 안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밤새도록 동풍을 일으키셨습니다. 밤새 불었다고 했으니 최소 8시간을 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놀라운 사실이 있죠? 홍해바다는 좌우에 물 벽이 설 때까지, 마른 땅이 될 때까지 불었지만, 이스라엘이 진 친 자리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맞습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맞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코로나19를 만나서 조심조심 방어적으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가끔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코로나19를 대비한 일을 하고 있지만 내가 지금 네게 맡긴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대답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힘든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그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주신 영원한 소망을 따라 살 수 있도로 거룩한 소망이 끊임없이 공급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을 때, 당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 말하기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날 때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야훼 하나님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내 이름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를 건너가야 할 때 나타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야훼 하나님 곧 스스로 계신 하나님, 아무 징조가 없고 솜털만한 구름의 증거가 없어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톨의 믿음도 없어도 일을 지어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도 바로 그런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믿음도 없을 때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야훼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모든 죄의 저주와 형벌을 다 그 몸에 정하셔서 받으셨고, 모세가 자기 품안에 손을 넣었던 것처럼, 우리는 마음으로 듣고 입으로 시인했을 뿐인데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언약이 이스라엘만의 언약이 아니라, 신약의 사도들만의 언약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의 언약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힘으로 살아가느냐 하면 내 믿음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언약, 스스로 계신 하나님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주신 그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육체로 오신 분이 지저스 크라이스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물에 빠져 죽을까 걱정만 하고 있으며, 어찌 우리가 말발굽과 전차에 밟혀 죽을까 염려만 하고 있으며, 어찌 우리가 다시 돌아가 이 땅에서 수고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세상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비록 나의 현실은 그럴지라도 내가 사는 힘은 그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고난 중에 때때로 주시는 간증들로 살아가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간증이 있으나 마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소망으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건져낸 것입니다. 구출해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겪는 신앙의 기도, 우리가 맛보는 신앙의 경험들만으로는 증거가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우리에게 보너스로 주시는 것뿐입니다. 우리 믿음에 기름을 좀 쳐주시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완악한 사람들인지 몇 가지 살펴보면서 우리 마음을 내려놓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만큼이나 이집트 사람들도 완악합니다. 나일강에 피 재앙을 내리셨을 때 물이라는 물은 모두 피로 변해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으니까 이집트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가 하면, 나일강 가에 우물을 파서 거기서 나오는 샘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재앙을 버티고 견뎌냈습니다. 그 후에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생축 재앙, 독종 재앙이 왔을 때에도 버텼습니다. 이제 우박 재앙과 흑암 재앙 때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백성은 구별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고센 땅에는 대낮같이 밝게 하셨고, 이집트 백성들이 사는 땅에는 깜깜하여서 분간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유월절에 초태생과 장자를 치는 재앙을 만나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항복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잘못했다 생각해서 군대로 추격에 나섭니다. 이것이 바로왕과 이집트 백성들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게 사돈 남 말할 때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입니다. 저도 주님께 나아오는 데 27년이 걸렸습니다. 혹시 우리들 중에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받은 분명한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찾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그 십자가는 야훼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혹 우리의 신앙생활이 붕 떠있는 것처럼 보이고, 헷갈리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나아갈 분명한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아가지 말고 건너가라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로 구원받았으면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저지르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다음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당분간 우리가 시대상황 속에서 움츠리는 것은 정상적입니다. 우리는 잘 대처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듣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저에게 그런 삶밖에 없고 언약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 없다면, 그런 언약의 힘이 희미하다고 하면, 그것은 목사로서 제 잘못입니다. 우리는 연명하기 위해 신앙 생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삶이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확실히 붙드는 과정에서 나머지 다른 것들을 조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망과 저주를 홀로 다 지시고 해 받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으로 시인하고 입으로 고백하면 마른땅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제 주변에 어떤 도전이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응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다음 스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를 기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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