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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슬기로운 부부생활(엡5:20-33) 이정식 202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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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에 말씀을 나누었어야 합니다. 지난 주에 521일이 끼어있었고 21일은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부부의 날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전하지 못했는가 하면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를 한 번 보고 말씀을 전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뭐 결국은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마음이 좀 불편했고 억지로라도 보려고 했지만 안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그 드라마가 종영하고 난 후에 페이스북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불편했다. 그랬지만 끝까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성도님들 중에는 그 드라마를 보신 분이 계십니까? 또 제가 아는 목사님이 예배시간에 제가 부부의 세계를 좀 보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괜찮으시던가요?”하고 물었더니, 성도님들이 대답하기를 목사님, 절대로 보지 마세요. 정신건강에 안 좋습니다.”했답니다. 자기들은 봤으면서 말이죠.

   부부관계로 들어가기 전에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여러 관계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만 해도 부모, 부모와 자녀, 직장상하, 사제 등 모든 관계 속 질서와 태도를 쓰고 있습니다.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8가지를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는 건강과 생명 유지입니다. 요즈음 많이 관심을 갖고 있죠. 두 번째는 음식입니다. 좀 더 맛있고 풍성한 식탁은 행복입니다. 세 번째는 잠입니다. 단잠을 자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네 번째는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내세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라도 죽음 이후에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성적 만족입니다. 일곱 번째는 아이들의 행복과 건강입니다. 그런데 카네기가 정리한 이 일곱 가지는 비록 쉽지는 않지만 충족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정말 갖기 원하지만 충족되기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바로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곧 중요한 사람이 되고픈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믿음 안에서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 믿을 때 우리가 가졌던 느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하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믿음과 느낌은 종종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수 중에 이효리라고 있습니다. 이 가수가 이상순이라는 음악가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결혼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외였다고 합니다. 한쪽이 기우는 결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만했던 거죠. 그런데 이효리는 이상순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는데 사람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였습니다. 하루는 집안에 쓸 의자 같은 가구를 만들고 있었는데, 남편 이상순이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부분까지 꼼꼼히 작업하는 걸 보고는 아무도 안 보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상순이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잖아.”하면서 이런 사소한 기특함이 자존감을 높여준다는 걸 알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슬기로운 부부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홀로 된 가정도 있고, 종종 다투는 가정도 있을 수 있고, 또 멀리 가서 힘든 일을 해야만 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모습이 되었든지 간에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부부생활이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는 믿음 안에서도 옵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사소하지만 내가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는 일들이 반복될 때도 옵니다. 그렇게 될 때 부부관계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부부는 오랫동안 살다 보면 서로 역할이 고정됩니다. 습관적으로 누가 이걸 하고 누가 저걸 하는지가 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나면 우리가 서로 평면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사람은 본래 입체적입니다. 전인격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전인격적으로 입체적으로 자기를 발휘하며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가 잘 못해서가 아니라 이미 나 자신을 향한 불만이 생겨나기 때문에 원망이나 불평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부부생활이란 서로에게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나 스스로 기특하고 대견할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내가 나를 사랑했고 그래서 이미 내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또 유명한 드라마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입니다. 그 드라마는 두어 번 보았습니다. 거기 보면 의사들이 외과의사면 외과의사, 산부인과 의사이면 산부인과, 소아과면 소아과 의사 생활을 하다가 일이 끝나면 밴드를 만들어서 연주하며 노래합니다. 기타를 치고, 베이스를 두드리며, 키보드를 연주하고 드럼을 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노래를 만들지는 않지만 즐기던 대중가요를 연주하는 것입니다. 참 신선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로망을 느끼게 됩니다. 저도 목사님 사모님들과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클라리넷과 플룻을 배웠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니까 실력이 늘지는 않지만 말이죠. 사실 저는 기회가 된다면 밴드를 하고 싶습니다. 잊고 지내던 소소한 일상을 풍성하게 가꿀 수 있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 드리고 싶은 말씀은 취미생활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딱 보니까 환갑이 지나신 분들은 별로 소망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미 틀린 것 같습니다. 틀렸습니까? 아닙니다. 왜 틀렸습니까? 마음은 청춘이요 마음은 십대 아닙니까? 도전해보십시오. 또 어떤 젊은 가정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제 아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입니다. 애들 키우는 것만으로도 바쁩니다.’ 하지만 가능합니다. ‘애도 키우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바빠 죽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좀전에 전도사님이 업무를 마치고 올라왔네요. 전도사님이 최근에 목공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좀 고민을 했습니다. 전통적인 담임목사와 조력자의 관계로는 대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깐 고민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목요일 아침에 나는 축구하러 갑니다. 그대는 목공하시오,” 시간을 떼어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행복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기 원합니다. 50대 이후를 사시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우선 중요한 일부터 해놓고 어느 정도 삶의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은 것 해야지.’ ‘우선 가족 경제를 좀 탄탄하게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가져야지.’ 우선 중요한 이것도 제대로 만들어놓지 않았는데 무슨 취미생활이며 여유를 부린단 말인가 하며 생각해온 것입니다. 여기 서 있는 저까지 그런 시절을 살았습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가족 경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딴 일에 정신을 쏟는다는 것은 이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행복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또 나 스스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고 사는 삶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요 입체적인 인간입니다. 전인격적인 사람이고 총체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면 부부생활도 원만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사소한 일 앞에서도 서로 다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0-21) 22절에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셨고, 24절에도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고 했습니다. 25절에 보니까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고, 28절에 가보면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316절 하반절에는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도 너를 원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원한다는 말은 다스리며 지배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범죄한 직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아내나 남편이나 우리 속에 나쁜 본성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는 욕구라는 말입니다. 그 욕구 이면에 있는 욕망은 내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이 건강하게 표현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서로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읽을 때도 잘 읽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찌라하고 읽을 때, 마치 남편은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아내는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읽게 되면 가부장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성경이 지어질 때 이미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 속에 가부장적인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 속에 가부장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우고 익혀온 문화 속에 가부장적인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그렇게 읽을 뿐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28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아내는 남편의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닙니다. 가시 하나 박혀도 우리 전 마음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몸이 아프면 다 아픈 것입니다. 소유하는 관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또한 29-30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미 에베소서 520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는 양육하여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서로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서로가 자존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장을 열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전에는 목사님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성공시키십시오. 그래야만 가정에 평안이 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내들이여, 남편을 성공시키십시오. 남편들이여, 아내를 성공시키십시오. 서로 양육하며 보호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우리는 그 몸의 같은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너무 오랫동안 부부생활을 해오시면서 서로 정해진 패턴대로 살아왔다면 오늘 성경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부부의 세계라든가 불륜 이런 것들이 왜 나오겠습니까. 여성중앙이라는 잡지에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있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를 꿈꾸는 일이 왜 생기는가. 그것은 새로운 남자와 새로운 여자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뭘 꿈꾸는 것인가. 새로운 나를 꿈꾸는 것이다.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정해진 역할을 행하도록 요구하고 평면적이고 딱딱한 관계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총체적이고 전인격적인 인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풍성한 나를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직 내가 모르는 내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평면적인 사람으로 억압하고 눌러놓으면 내가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하고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불륜이란 그런 나를 찾아간다는 분석이었습니다. 좀 새로웠습니다. 좀 놀랍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나를 회복하려고 하는,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몸부림이었구나. 단지 그 방향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 것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카네기가 제시한 일곱 가지는 충족될 수 있지만, 잘 채워질 수 없는 여덜 번째 소망 내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회복하며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부부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시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또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또 자기 자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양육하는 것이고 서로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부부생활에 제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부모자식 간에, 사제지간에, 성도와 성도 간에, 상사와 직원 간에, 우리 자신과 타인 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좀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제가 장년부들과 함께 전라도 보성에 있는 민간정원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 정원에 갔더니 참 멋지고 귀여운 강아지가 따라왔습니다. 말이 강아지지 그 종 자체가 원래 크지 않은 종이라 나이는 꽤 먹은 개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개가 잠깐 경계를 하더니 제가 잔디밭에 앉아서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좋아하니까 금방 따랐습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하지 않는 유일한 동물이다. 암탉은 달걀을 낳고 소는 우유를 주고 카나리아는 노래를 한다. 하지만 개는 먹고 살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을 사랑할 뿐이다.’ 조금 후에 그 개가 온몸으로 과격하게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일행 중에 한 분이 약간 경계하면서도 다가오고 싶어하는 모습을 한 컷 찍었고, 온몸으로 과격하게 애정표현을 하는 모습을 한 컷 담았습니다, 그 사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제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놨습니다. 제가 가끔 열어봅니다. 열어볼 때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왜 그렇게 좋아할까요? 제 마음 속에 이렇게 달려들면서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못됐습니까? 제가 잘못된 소망을 품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타인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누군가를 이처럼 사랑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토록 사랑받고 싶어한다는 걸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이런 욕망을 다른 데 투사시키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독점하고 싶어하고 지배하고 싶어하는 대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순간 그 마음은 나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주장하고 지배해서라도 내가 독점적인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독점적인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소망이 충족되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부부가 서로 그런 관계를 요구하려고 하고, 자녀들에게도 그런 것을 요구하려고 하고 직장에서도 그런 것을 요구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를 잘못되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부부의 내밀한 사정에 대해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부부관계 이전에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그 기특한 순간을 자주자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 장소가 학교가 되었든, 직장이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헌신하며 나를 던지고 몰입할 수 있기 바랍니다. 단순한 취미생활로는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헌신되어야 합니다. 몰입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생계에 충실하다가 자기 취미생활에 몰입을 한다면 갑자기 불편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일상생활도 잘 안 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할까요? 그 빈자리를 내가 메꿔주는 것입니다. 우리 부친님 한 분이 팔십 평생 안 하시던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습니다. 내가 대신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죠.

   건강한 부부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서로 장난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입니다. 글쎄요, 칠십이 되고 팔십이 되면 장난할 여유가 생기는 것도 같습니다. 가끔 다큐에 보면 그렇게 늙어가는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장난을 친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정형화된 패턴으로만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사람과 살아있는 또 다른 사람이 만났습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와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가 만난 것입니다. 내가 아직 모르는 당신, 당신이 아직 모르는 나. 나 자신이 아직 모르는 나, 당신이 아직 모르는 당신이 서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재미있다고 말해줘요. 사랑은 무릎연골과 같습니다. ‘무릎 연골은 우리 몸을 지지해주는 역할을 하며, 관절이 흔들거리지 않게 고정시킵니다. 충격을 흡수하고 분산시켜서 관절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합니다. 그런데 연골은 사용량이 많아지면 쉽게 파열될 수 있습니다. 운동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운동을 해서 주변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 슬기로운 부부생활을 원하십니까?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려고 애를 쓰시고, 의도적으로 나를 기특하게 여길 수 있는 순간들을 만들어 가시고, 취미생활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29절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5:29-30) 이렇게 한다면 우리 부부 생활이 새롭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끝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종종 있기를 바랍니다. 앞에서는 부부관계보다 우리 자신을 좀더 새롭게 만나는 데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든 문제들을 같이 분담하고 나눠야 합니다. 그럴 때 자기 할 만큼만 하고 만다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고마울 만큼 마음을 써준다면 내 아내인데도 내 남편인데도 고마운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남편에게, 아내에게, “고마워하고 말할 수 있는 가정들이 많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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