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야곱과 그 가족의 하나님(창세기 35장) | 이정식 | 2020-05-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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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서 멀리 여행을 하다가 돌아오게 되면, 집 근처로 올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자유로를 타고 이산포IC로 들어와서 제2자유로를 타면 빨리 집에 오는데, 그 길을 타지 않고 망향국수집 앞을 통과해서 옵니다. 그러면 눈 앞에 시골적인 풍경과 논들이 보이는데 참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좀 더 멀리 갔다가 돌아오게 될 때에는 ‘고양 일산’이라는 팻말만 봐도 안심이 됩니다. 미얀마 선교여행처럼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경우에는 인천에 살아본 경험이 조금도 없는데도 인천국제공항 불빛만 봐도 ‘집에 다 왔다’는 평안함이 찾아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여러분과 제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갈등을 겪는데, 우리 영혼이 안식을 누릴 때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의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 때다 라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집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교회는 하나님의 집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오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집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우리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내가 하나님의 집에 거한다는 확신이 들어왔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의 집에 있는 마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앞을 알 수 없는, 결론을 알 수 없는 곳에 헤매다가 주님 앞에 내 마음을 내려놓고 내 속을 터놓고 보면 그때가 하나님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혹 교회에 와서도 쉼을 누리지 못하는 분이 계신가요? 이 교회에 와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 분이 계신가요? 그 비밀의 장소는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경험 속에 있습니다. 절박할 때에 주님을 불러본 그 경험 속에 하나님의 집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가 이 땅에서 경험한 모든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 평안과 안식과 능력을 누렸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이 야곱의 삶과 같은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창세기 35장에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고 있거든요. 벧엘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베이트’는 집이고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입니다. 벧엘이 교회는 아닙니다. 야곱이 올라간 이 벧엘은 어떤 벧엘인가 하면, 야곱이 속임수로 형 에서의 축복권과 장자권을 다 빼앗은 후에 형에서가 동생을 죽이겠다고 작정했을 때 그로부터 도망가다가 돌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 찾아온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 벧엘입니다. 이 작은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내 죄짐을 깨달았든지, 내 상황이 정말로 절박하든지 했을 때 만난 주님, 그런 하나님을 만난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 있을 때 우리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야곱의 삶을 보면, 또는 야곱의 가족사를 보면 여러분과 제가 다 축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야곱의 인생사가 이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 에서를 속여서 다 빼앗은 것을 알고 살과 피를 나눈 형 에서가 동생의 잘못에 대해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가 이와 비슷한 사건을 겪었다고 하면 어디가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벌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는 가족입니다. 또 야곱이 도망가서 삼촌 라반의 집에 갔는데 야곱이 라반의 딸 레아와 라헬과 결혼을 했습니다. 역시 피를 나눈 레아와 라헬인데 얼마나 시기와 질투가 심했는지 모릅니다. 레아는 사랑받을 만한 총이 없었고, 둘째인 라헬은 야곱이 처음부터 사랑했습니다. 7년 동안 열정페이로 섬기면서도 한순간처럼 지나보낼 수 있었을 만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네 아들을 먼저 주셨습니다. 장자 르우벤을 시작으로 시므온과 유다와 레위를 낳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가정들에 어떤 아픔을 가진 가정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품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사건을 겪었으면 이 아이가 이런 모습일까’ 하고 말입니다. 야곱의 열한 아들이 태어날 때 레아의 마음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을 때 그 마음이 그렇게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사무쳤으면 아이를 낳을 때마다 속마음을 드러내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르우벤이 대표적입니다. ‘내 억울함을 풀어주셨다.’ 요즈음 젊은 부부 같으면 애지중지 태교를 할 것입니다. 모차르트 이펙트 음악을 들려주고, 나쁜 건 안 보여주고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생각만 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하지만 레아와 라헬은 태교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억울함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뱃속에 열 달 동안 있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을까’ 중간 결론을 말씀드릴까요? 우리가 아이를 품었을 때 어떤 마음을 품었던지, 아이가 어떻게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 어떤 것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가족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신문기자가 있어서 야곱의 일대기를 알았다면 이 가족은 정말 너무 심한 가족입니다. 될 가족이 아닙니다. 야곱의 출생을 보아도 형의 발뒷꿈치를 잡고 나온 아이니 손가락질을 당할 만했습니다. 형 에서를 향해서 동생 야곱이 어떻게 그렇게 독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 결과 형이 동생을 죽이려는 뜻을 품기까지 했으니 이 가정은 될 수 없는 가정입니다. 결혼을 했더니 두 아내가 아이를 경쟁적으로 낳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그 가정에 무슨 평안이 있었겠습니까. 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할 때에는 자기가 속였던 만큼 삼촌에게 속임을 당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일한 대가를 안 주고 속였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이제 때가 차서 자기 식구들을 다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려 할 때 형 에서의 낯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천사와 싸웁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싸워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간의 20여 년 고생을 기록한 대목이 34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세겜 땅에 왔더니 여기 또 하나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말로 한 명의 딸 디나가 있었는데, 세겜 추장의 아들에게 연모를 받고는 겁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양을 치다가 돌아오던 아들들이 그 말을 듣고 분노했고, 아들들 중에 시므온과 레위가 복수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세겜 족속 중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다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모략을 세워 할례 받게 한 후 3일째 되는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에 칼과 창을 들고 들어가서 모든 남자를 몰살시켜버렸습니다. 잔혹하게 복수했습니다. 그런 후에 기록된 말씀이 창세기 35장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35장 1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35:1) 하나님이 두려워 떠는 야곱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야곱이 지금 왜 두려워할까요? 야곱은 고향을 떠난 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 세월 지나고 돌아왔으니 야곱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세겜 족속의 남자는 다 죽였지만, 가나안 땅에 기르가스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등 많은 이방족속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족속들이 그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디서 굴러온 부족이 우리 이웃 족속 남자를 멸했다. 모든 남자들을 멸할 만큼 잘못한 것은 아닌데 죽였으니 이 족속은 살려두면 안 되겠다.’ 하고 모든 주변 족속들이 동맹을 맺고 쳐들어온다면 야곱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야곱은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모면할 방법이 없는 분노 아래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길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대적을 만든 것입니다. 그의 두 아들 시므온과 유다가 꾸민 일 때문에 말입니다. 20여 년 동안 고생고생하면서 부자가 되어 아버지 집에 돌아왔는데 살 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어려움들이 웬만할 때에는 스스로 돌파할 수 있습니다. 내 수단이나 내 친구나 인맥이나 돈을 통해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내 모든 수단과 방편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어려움 앞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가족사에 아픔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잠깐 정리해드렸듯이, 야곱은 태어날 순간, 형 에서와 함께 살던 때, 삼촌 라반에게 가서 가정을 이루며 살 던 때, 그리고 거부가 되어 돌아오는 순간들마다 경험했던 일들은 오늘날 네이버나 뉴스를 통해서 우리가 접하고 있는 잔혹한 어떤 가족사보다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분개할 수 있을 만한 사건들을 모두 가진 야곱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성경에 어찌 이런 가족사를 기록해두셨는가 하고 생각할 만큼 야곱의 가정은 엉망입니다. 그러나 이 야곱이 너무 놀라운 야곱이 되었습니다. 이 야곱이 놀라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벧엘, 곧 하나님의 집에 그가 피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야곱에게 놀라운 축복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5장 5절에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웃 족속들이 동맹을 했으면 야곱 가족들은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다. 그 노여움은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창49:5,7a)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34장 30절에는 야곱이 두 아들을 꾸짖기를,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멸절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추격하는 자가 없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밧단 아람에서 라반의 눈을 피해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라반은 쫓아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라반에게 나타나서 라반을 말리십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존 뉴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를 작사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실한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6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갑자기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정상적인 가정 같으면 안 좋은 소리를 해도 다 받을 수 있지만, 어려서 상처를 입은 아이는 좋은 말도 삐딱하게 들리기 십상입니다. 11살에 의붓어머니 손에 자라게 되었는데 더 삐딱선을 타다가 노예선을 타게 되었습니다. 존 뉴턴의 눈에 노예는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대하고 살벌하게 다루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 일을 했던지 22살에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는데 평생 만나지 못한 폭풍우에 휘말렸습니다. 존 뉴턴은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기도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건져주십시오.” 하나님이 존 뉴턴을 찾아오셨고 만나주셨고 그 폭풍우 속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경험하고 지은 찬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양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즐겨 듣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형제복지원이라는 기독교복지단체의 불법과 비리가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은 목사님으로 섬기고 있지만, 이분도 11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갔습니다. 초등학교 4-5학년 무렵이었습니다. 그 정도 되면 지각이 다 나있는 때입니다. 한창 때에 새벽 4시 반에 깨워서 일 시키고 밥도 안 주고 오물을 먹이고 통장 넣어준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이런 악한 복지단체를 누가 운영했는고 하면 어떤 장로님과 처남 목사님이 했다고 하네요. 예배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왜 하겠습니까. 상황이 얼마나 비난받을 만한 상황인지, 얼마나 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인지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기독교 복지단체라고 하는데 그런 곳에 들어갔다 나온다면 생각이 정상적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아마 세상과 교회 모두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 목사가 되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끔 기독교계 내에 ‘가계의 저주를 끊으라’는 등의 말을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내가 문제일 뿐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야곱이 벧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야곱의 이전 문제가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험악한 생애를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이마에는 근심의 주름살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의 상처를 곱씹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얽매어 있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일므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사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35:10-11) 여러분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기사를 기억하시죠. 에서를 두려워해서 모든 가축 떼와 가족을 한 떼 두 떼 다 자기 앞서 보내고, 자기는 제일 뒤에 남아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했습니다. 뭐라고 기도했나요? “주님이 나에게 축복해주지 않으시면, 내 형에게서 나를 건져내주시겠다고 확신주지 않으시면 내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붙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이름이 ‘이스라엘’이니 이는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싸워 이겼음이라.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과거의 상처,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어두운 기억에 붙잡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싸우다시피 기도하는 것입니다. 11절에 하나님을 뭐라고 하고 있는가 하면 전능한 하나님이라. “전능한 하나님 아버지! 내 삶의 어두운 기억이나, 내 어렸을 때의 상처나 내가 자랄 때 겪었던 아픔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아버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능한 하나님 아버지 나를 복 주옵소서.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내가 가진 이 번민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주옵소서. 그렇게 해주실 때까지 내가 주님을 놓지 않겠습니다.”라고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위대한 점입니다. 야곱이 우리의 신앙의 선배가 맞습니다. 야곱을 통해 배웁시다. 우리는 각 가정마다 불평등한 조건 속에서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나보니 부모님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너무도 믿고 의지했던 분이 생각지도 못할 때에 세상을 떠나셨나요? 세상을 살면서 타인으로부터 많은 속임과 아픔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이런 모든 형편을 생각할 때 빌게이츠의 말이 떠오릅니다. “모든 사람은 불평등하게 태어납니다.” 예, 모든 가족도 불평등한 조건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평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창세기 35장 3절을 봅시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35:3) 하나님은 야곱이 겪었더 환난 날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렇게 응답하시고 하늘로 올라가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가는 길에서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돌베개에서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한 번 만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시고, 멀리 밧단아람에까지 가셔서 야곱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14절을 볼까요?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창35:14-15)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심리학의 시대입니다. 심리학이 우리에게 사람 마음을 잘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하지만 심리학의 한계가 뭐냐 하면 거기에 여전히 매어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에 매어있지 마세요. 지금이 중요합니다.’ 하고 아무리 말해도 심리학의 근원에 매어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전능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만이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상처를 쌓고 쌓고 또 쌓지만, 야곱은 무엇을 쌓고 있나요?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하나님 만난 경험을 세우고 쌓고 또 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사람입니다. 사람의 인지상정은 항상 과거로, 우울함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꺼내보게 됩니다. ‘내 아이를 잉태했을 때 좀 더 잘할 껄. 내 결혼 생활을 좀 더 잘할 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 다시 그런 반복을 할지라도 오늘 야곱이 세운 이 벧엘의 제단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불평등을 평등하게 응답하시고, 환난 날에 응답하시고, 그리고 내가 가는 길에 동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쌓고 또 쌓으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싸워 이겼다고 하는 야곱의 고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주님을 만난 분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내놓읍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다 고백해봅시다. 그리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따라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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