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청년헌신예배"청년들아! 예수님 만나러 가자!"(행 9:1-18) | 이형주 | 2020-05-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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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 9:1-9(-18) 청년들아! 예수님 만나러 가자!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청년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는 청년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많이 공부한 사람입니다. 아주 보수적인 신앙그룹에서 반듯하게 자란 이 청년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이단무리를 직접 처단하기 위해 자기 생업을 뒤로하고 열정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이 청년이 누구냐면 바로 우리가 잘 하는“사울, 곧 바울”입니다(사울은 유대인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인식 이름입니다). 이 바울이라는 청년은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의 미치광이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 가는데 몇 날 며칠이 걸리는 다메섹이라고 하는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춰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비장함 마저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갑자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다. (행 9:3-5)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가 정오였는데, 한 낯의 뜨거운 태양빛 보다 더 빛나는 빛이 비추었습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질 수밖에 없었는데, 바울은 홀로 그곳에서 누군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던 바울에게 하늘로부터 눈부신 빛이 비추었고, 음성이 들렸다면 당연히 누구의 음성을 기대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냐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죽은 그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이단의 괴수 “예수”의 목소리라는 겁니다. 이때 바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요즘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래도 있다는데, “예수가 왜 거기서 나와!?”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세종대왕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왜 없지요? 그 사람들 모두가 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울에게 예수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 이단의 괴수는 이미 나무에 달려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목소리를 들었다고요? 예수님의 목소리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죽은 자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혈기왕성한 청년 사울을 변화시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살아계신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했는데,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바울은 죽음에서부터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성경에 약속된 바로 그 구원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갈망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라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바로 이 장면이 무려 3번이나 반복되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26장에서는 그때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행 26:14-15)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은 정말로 성경을 많이 공부했고, 누구나 꺼려 할 악역을 자처 할 만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며 일생을 바쳐서 열심히 살았는데, 정작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냐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것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소를 떠올려 보십시오. 엉뚱한 길로 가는 소에게 채찍질하는 주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가 인도받은 대로 가지는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가겠다며 버티고, 계속 가시가 돋친 채찍을 뒷발질로 차고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청년바울이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오지 못하고, 뒷발로 엄한 채찍만 발로 차다가 상처가 나고, 괴로운 상태라는 겁니다. 그의 신앙은 헛발질로 피멍이 들고 있을 뿐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의 삶이 딱 그랬습니다. ------- 사 랑하는 청년학생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배우고, 비장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정작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면, 우리도 과거의 바울처럼, 헛발질에 피멍만 드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 수년이 되었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설교를 들었으며, 이른바 제자훈련의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수두룩합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모두 삶에 변화가 일어나 예수님을 닮아가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제자훈련 과정을 마치면 모두 제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아요. 말씀을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알아도, 예수님을 내가 정말 살아있는 분으로 만나고, 경험한 적이 없다면 헛발질만 하는 신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신앙생활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오히려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은 너무나 막연한 믿음인 것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안다”라고 설명할 때 이 아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강호동을 알고, 유재석을 아는 것”은 진짜 아는 게 아니에요. 맞죠? “내가 이정식 목사님을 알고, 이태훈 집사님을 알고, 최영광 형제를 알고, 임제호 형제를 아는 것”이 아는 겁니다. 제가 처음 송포에 왔을 때 우리 청년들과 얼마나 서먹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애들이 또 은근히 곁을 잘 안주는 성격이라, 가까워지기 위해 알게 모르게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청년들의 표정만 봐도 속마음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도 있게 되었고,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헤아려줄 수 있을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또 우리 청년들이 제 마음을 얼마나 시원하게 해주고, 위로해 줄 때가 많은지 모릅니다. 이곳저곳 놀러 다니며 추억도 많이 만들었고, 같이 울고, 웃으며 마음을 나누어왔습니다. 이것이 아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것은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란, 단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내가 인지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깊고 진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나를 아셔서 같이 대화도 하고, 울고, 웃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곧 “영생”/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나?”라는 질문을 그래서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정말 만났나? 그래서 그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시 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없기를 바랄까요? 자신들의 마음을 또 행실을 판단하고, 심판할 존재가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기 마음대로 살고, 그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바울사도를 만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실제 살아있는 분으로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신앙생활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막연한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시며, 분명히 존재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실체를 알고, 끊임없이 소통하고, 이야기 하고, 이야기 듣고, 바라보고, 행동하는 실체가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살아있는 분으로 믿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살아있는 분으로 믿고,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드린 기도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드린 헌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막연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저 높은 하늘에만 계시고, 이 낮은 땅에는 안 계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무언가 열심히 하고, 간절하게 하는 것 같은데,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왜냐!? 실체가 없는 대상에게 예배하는 것처럼 예배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을 살아있는 분으로 여기면서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혹, 이 자리에 나는 아직 살아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신가요? 또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분명한데, 정말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더욱 생생하게 경험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 분이 계신가요? 움츠러들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실지 아무도 모르지만, 주를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은 직접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 1:12-16) “그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입니다. 내가 전에 유대교에 있을 적에 한 행위가 어떠하였는가를, 여러분이 이미 들은 줄 압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고, 또 아주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내 동족 가운데서, 나와 나이가 같은 또래의 많은 사람보다 유대교 신앙에 앞서 있었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를 나에게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 바울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다면,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살아있는 분으로 믿고, 순종한 한 사람도 등장합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인지는 사도행전 22:12에 잘 나와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이”였습니다. 어느 날은 환상 중에 예수께서 아나니아에게 “기도하고 있는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다메섹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라는 악명 높은 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 도망갔는데, 환상 중에 예수님이 그런 요청을 하셨다고, 곧장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난 안가, 난 못가! 하는 반응이 정상이죠. 그런데 아니니아는 갔어요. 순종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반응했고, 순종했습니다. 아나니아가 그렇게 황당한 요구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살아계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에서 가끔 오며가며 인사하는 아저씨가 나에게 황당한 요구를 하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할 겁니다. 화를 낼 겁니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좀 이상하더라도 한두 번 더 물은 뒤에 그래도 변함이 없다면,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 그것이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가 순종한 것은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고, 신뢰할 만큼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아나니아의 선택은 정상이 아닙니다. 누가 봐도 미친 짓입니다. 잡아서 죽이려는 사람에게 제 발로 찾아간다니요. 환상 중에 환상을 보았다니요. 누가 봐도 말려야 할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울은 훗날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 5:13-14)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아나니아를 움직인 힘, 그가 순종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여기서 말하는 강권이란, 강력하게 움켜쥐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대단한 믿음을 가진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특수부대 훈련 같은 신앙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강력하게 붙잡고 이끌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단한 사람이 대단한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단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대단한 순종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순종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실 때가 있을 겁니다. 여러분 생각에 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위해 순종을 요구하실 때도 있을 겁니다. 또는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 일을 요구하실 때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말로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 하시는 방법은 때론 상상치 못한 놀라움으로 나타납니다. 뜻하지 않은 때에 뜻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일 하시기도 하십니다. 아나니아의 순종은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역자를 세웠습니다.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악마 같던 사람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든든한 동지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순종은 때로는 재밌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끝 으로, 모든 성도님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송포성서침례교회의 미래는 우리 학생, 청년들이라고 믿으십니까? 만약 우리의 학생, 청년들 중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사랑스러운 청년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바라보고,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도 전 세계의 수많은 교회에서 다음세대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2-30대와 40대를 포함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가나안 성도라는 무리가 있습니다. 교회 안나가를 거꾸로 해서 가나안 성도라고 합니다. 왜 교회를 떠나느냐? 교회에 실망했다는 겁니다. 교회의 어른들에게 실망했다는 겁니다. 성도님들은 돈 문제로 싸우고, 목회자는 부정과 비리, 스캔들로 얼룩져있고... 8-90년대에 학창시절을 교회에서 보냈던 세대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떠났거나 겉돌고 있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교회에 별로 크게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교회 나가기 싫은데, 그런 일들은 좋은 핑계이지 않습니까? 왜입니까? 교회에서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을 못 찾겠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예수님을 도대체 어디에 가서 찾아야 합니까?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눈부신 빛과 환상으로 나타나주시면 좋으련만, 산신령 같은 목소리로 불러주시면 좋으련만, 하나님의 임재는 꼭 그런 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그러면 내가 진짜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요청합니다. 우리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요 14:7-9)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보이시며 자기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다름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바로 그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십니다. 맞습니까? 나는 그분과 연합되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왜 내 교회를 박해하느냐, 왜 내 성도들을 박해하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회, 즉 예수님과 성도를 동일시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 사랑하는 학생, 청년들이 예수님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바로 나를 통해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님의 손길과 따뜻한 음성을 처음 느끼도록 해준 것은 아나니아를 통해서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아나니아는 악명 높은 핍박자 바울에게 찾아가서 그를 “형제 사울이여”라고 불렀습니다. 형제라는 말은 곧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아나니아는 원수 같던 사울을 가족으로 불러주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에게 처음으로 경험한 따뜻함이었을 겁니다. 그를 부른 목소리는 아나니아의 것이었지만, 바울은 틀림없이 그 목소리 속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음성과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가정의 불화를 겪고, 외롭게 지내던 시절에 친구를 따라 처음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목사님과 박미선 사모님을 포함한 많은 분들이 정말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셨습니다. 교회에 가면 그저 마음이 따뜻하고, 위로 받는 것 같았고, 이 사람들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어린 마음에 한 가지 확신이 있었는데, 이 교회에서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이 사랑이 이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구나!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는 거구나! 하는 것이 정말로 깨달아지고, 느껴졌습니다. 나를 사랑해주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의 말과 손길 속에서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구나, 지금 예수님이 나를 안아주시는 거구나! 하는 것이 믿어지더란 말입니다. 왜요!? 교회의 성도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신해서 세상에 세우신 자신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청년 학생들에게 예수님이 되어 주십시오.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이 되어 주십시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순종하신 겁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의 단단했던 마음을 녹이고,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이고 싸늘히 식은 열정에 다시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그 사랑만이 고집 부리는 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져 그만 집으로 돌아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 그 믿음, 그 생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학생, 청년들이 그 사랑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디에서요!? 바로 이곳, 송포성서침례교회에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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