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하나님의 사랑(호세아 14장) | 이정식 | 2020-05-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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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아주 간결하고도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고 또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이 말씀의 고백은 하나님 자신도 귀하고 보배로운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선물로 주었으니, 다른 어떤 요구사항에 대해서 왜 그것을 주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목사가 하기 좋은 말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께로부터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받고 싶은 것도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님께서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 말씀에 ‘모든 것’에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힘에 부쳐 하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에도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다가 두려워하는 것들, 그래서 내 신앙에서 아예 후순위로 밀쳐두는 것들, 내 일평생에 도전하기를 포기하는 것들까지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사실 이 말씀의 핵심은 이 땅에서 살면서 신앙생활하면서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가장 보배롭고 귀한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힘든 것은 없습니다. 그 힘든 예수님까지 주셨는데 어떤 것을 주지 못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 받은 우리에게는 모든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는 부름 받은 종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모든 성도에게 모든 언약의 말씀을 허락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꺼다 하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으니 사랑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죠.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은 우리들입니다. 이 사실이 명백한데도 호세아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나에게 약속된 축복이 다 온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내가 너무 축복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죠. 또 하나는 그 축복을 내가 받기 위해서 그 자격을 얻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기 때문에 도리어 믿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에서 독보적이었습니다. 요즈음 모든 스포츠 경기가 열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옛 하이라이트 화면을 자주 보여줍니다. 너무 잘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1위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데 소치올림픽에 나갔을 때 연기로는 당연히 금메달인데, 금메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김연아는 충분히 금메달 자격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원리가 자격이 있는 사람이 상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마땅합니다. 반면에 러시아 선수 소트니코바는 실수도 했는데 금메달을 땄습니다. 아마 소트니코바는 금메달을 받을 때 스스로 생각할 때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양심이 있으니까. 경기하는 선수는 자기 실력을 알고 어떤 연기를 펼쳤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 소트니코바는 소치 올림픽 금메달을 볼 때마다 볼이 빨개질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주는 문학상도 가작부터 해서 최우수상까지, 때로는 대상까지 있습니다. 해마다 제출한 작품들을 심사해서 상을 줍니다. 그런데 어떤 해는 우수상까지만 주고 최우수상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은 있지만 안 줍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문학상의 이름에 걸맞는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 그렇게 합니다. 우리 은혜가 많은 송포성서침례교회 성도들 같으면 최우수상 주면서 격려할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자격에 미달하면 상을 주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임금이 되면 세상이 저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잠언 말씀에서 종이 임금이 되면 사람들이 참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대통령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듯 우리 모든 삶은 자격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가지고 따지기 때문에,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내가 자격이 되나 안 되나 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지 않으셨을 때에도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었습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내가 너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었고, 광야에서도 네 발이 부르트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좀 알아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알지 못하면 고생을 하더라도 생고생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사랑을 안다면 광야 그 고생 중에도 평강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생 중에도 형통함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어도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오늘 예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여러분과 저도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축복을 어떻게 얻을까 하고 노심초사하기도 합니다. 물론 준비하는 것은 좋습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를 나중에 다시 선발할 기회가 된다면, 여러분 합당한 자격이 있는 분이면 좋겠지요? 잘못된 게 아닙니다. 이는 모든 일에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착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격이 있어야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호세아서에서도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부흥사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올 여름에 수련회를 계획하고 있지만, 그 수련회에 훌륭한 부흥강사를 초청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70년 80년대에 그분들이 전하는 말씀이나 지금 전하는 말씀이나 말씀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부흥사의 시대가 끝났는가 하면 부흥사의 메시지의 특징이 축복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도 축복에 있기 때문에 메시지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월을 지나면서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가 그렇게 얄팍한 축복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의 깊이가 놀랍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소망은 단지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좀 제대로 알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축복에 안달복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여러분과 제 마음 속에 축복을 원하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축복에 연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486장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3절 가사에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2절 가사는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1절 가사는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로 시작됩니다. 뭐하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 평안도 놓치고, 하나님이 주신 참 쉬는 날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참 죽을 일 쌓였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고백은 뭡니까? “은혜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와 같은 고백 속에 있으면 축복에 집착된 마음도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찬송가 34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후렴은 이렇습니다. “무슨 일을 만다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이것도 참 이상한 고백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는 고백은, 내가 항상 형통한 일을 만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 이 ‘무슨 일’ 속에는 엄청 괴로운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청나게 답답한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쉼을 빼앗아가고 죽을 일만 쌓이는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답답한 일을 당하든지 좋은 일을 당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는 고백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할 때 여기에 아멘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에 우리가 거한다면 우리에게 평안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축복에 포인트를 두고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 마인드로 돌아가고 맙니다. 저도 그와 같은 말씀을 전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려면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박수를 치려고 할 때 우리 왼손을 내밀어서 함께 마주쳐야 박수소리가 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부흥강사의 스토리입니다. 제가 종종 전하기도 하고 우리가 함께 얽매어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격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 회개를 요청하시고 언약을 갱신하시면서도 항상 미리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호세아 14장 5절 보시면,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며 축복을 미리 전하십니다. 한편, 호세아 13장 마지막 절을 보면 “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하시면서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를 참 평안과 참 쉼을 주신다고 알았는데, 축복에 집착되는 순간 다 잃어버리며 참 평안과 참 쉼을 모르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고생하게 하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며, 나는 정말 너의 참 평안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려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11장 9절에 “나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 주면 하나 갚고, 꿀밤 한 대 먹이면 꿀밤 한 때 되먹입니다. 이 세상 일을 할 때에는 최선을 다해서 어떤 자격을 갖추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살다 보면 큰 물음표가 생깁니다. 내가 자격이 있는데,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데 원하는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이 답답한 심정을 우리는 겪어보았습니다. 제가 3년 동안 논문에 실패할 때도 답답했습니다. 열심히 애쓰고 신앙생활 잘 하고 있었지만 결과가 오지 않았을 때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 계속 집착되어 있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집착의 반대말은 몰두입니다. 영어로 플로우(flow)입니다. 몰두는 그 시간 자체가 즐겁습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몰입합니다. 하지만 집착은 결과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은 둘 다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광야생활로 고생하며 괴로움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묵상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몰두되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는 일념에 집착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평안을 전혀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람이라면 네가 자격이 없는 것을 보고 어떻게 축복하겠느냐. 선지자를 보내면 죽이고 선지자를 보내면 죽이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시면 회개하고 평안을 회복하라고 보내시는데, 사람들은 축복에 집착되어 있으므로 선지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축복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월이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호세아서 9장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찌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호9:7) 선지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순종을 명해야 하는데, 선지자도 견디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축복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그 축복을 안겨주지 않으면 선지자가 서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미친다고 했습니다. 차가 미치면 도로로 가지 않고 인도로 뛰어들고 상가를 덮칩니다. 미친 주행을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잘못된 주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발 물러나 보겠습니다. 축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준비할 것을 준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쳐주시는 만큼 주님을 예배하며 섬깁니다. 그렇지만 평안 중에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내가 끌어들이기 위해서 내가 집착이 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도 놓치고 축복도 놓치게 됩니다. 여러분 기억합시다. 내가 하나님의 축복의 관에 나의 관을 딱 맞춰야 축복을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시고, 하나님께서 때를 변경하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확신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의 집착을 잠깐 내려놓고 주님의 시간을 기다리면 반드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22장 22절에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가 없으리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여러분과 저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문을 닫아두십니다. 축복을 받지 못하는 시간은 내게 괴롭지만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닫고 계시는 시간입니다. 내가 열 수 있습니까? 나의 수고로 열 수 있나요? 나의 모든 자격과 더 많은 수고로도 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때 여십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때라는 게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할 어떤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는 순식간에 찾아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제 딸이 여기 있지만, 러시아에 있을 때 코로나19로 인한 그 어려운 시기에 순식간에 한국으로 날아올 수 있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하시겠지만,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순식간에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호11:1)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백성은 전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것은 제사와 예배다’ 생각하고 제사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한 채 그 일을 열심히 했더니,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선지자들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신앙생활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의 핵심은 우리의 자격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남극에 사는 펭귄 중에 황제펭귄이 있습니다. 황제펭귄은 아주 추울 때는 동료들과 등을 맞대고 부비면서 추위를 이겨냅니다. 황제펭귄 중에 한 마리가 무리와 함께 먹이를 찾아 이동을 하는 중에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자그마치 6천 킬로미터를 헤엄쳐서 뉴질랜드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뉴질랜드는 더운 나라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까 반팔 티셔츠를 입은 뉴질랜드 사람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그 표류해 온 펭귄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청년들이 하는 말로 이 황제펭귄은 ‘난 누구?, 여긴 어디?’하는 상태였습니다. 6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왔으니 배고프고 목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표류해 올 때에야 힘있게 왔을테지만, 다시 남극으로 혼자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못 갑니다. 이 황제펭귄은 사람의 도움이 절대 필요합니다. 꼭 이런 고아 같은 처지가 이스라엘의 처지요 우리의 처지입니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호14:3) 황제 펭귄은 고아 같은 처지입니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도움을 입지 않으면 남극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주님 의지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다보면 죽을 일 쌓인 곳으로 가버립니다. 열심히 순종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어떻게 하다보면 참 쉼을 잃어버린 길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의 잘못됨을 책망만 하지 않으시고 원래의 자리로, 원래의 사랑의 자리로, 원래의 축복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말씀이 로마서 8장 3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코로나19로 인해서 예배의 방식이나 모습이 바뀌고 있습니다. 혹시 이 가운데 어떤 사정 때문에 현장 예배에 참여하지 못해서 마음에 어떤 아픔이나 갈등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신가요?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겪는 힘겨움보다 훨씬 더 힘겨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위해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소망하는 축복도 약속하시고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받은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축복에 대해서는, 축복을 받기 위한 준비는 하되,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감사를 가지고, 확실히 주님의 때와 시간을 따라서 주실 것이니,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곳에 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나도 좋고 주님도 좋은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에 괴로움이 있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인한 기쁨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합시다. 축복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더디 오시지만 않고, 순식간에 부어주시기도 합니다. 이전보다 더 풍성한 평안과 여유를 경험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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