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4월 12일 죽임당하는 진리, 부활의 진리(마태복음28장) 이정식 2020-04-18
  • 추천 0
  • 댓글 0
  • 조회 292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5722326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인데 오늘 제목은 진리의 부활로 잡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리이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도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그러므로 이 진리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성령님도 진리이십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지난 주에 요한삼서에도 보면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로 오신 우리 주님은 여러분과 제가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라고 했으니, 우리 성도들에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향락을 기뻐하지 마시고 진리를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예수님 영접할 때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속에서 진리에 이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14:22b)고 하셨으니, 예수님이 진리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뭉뚱그려서 말씀하지만 않으시고, 선을 행하는 것이 곧 진리를 행하는 것이라고 풀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따라 선하게 행하는 것이 바로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또 어떻게 구원받으며 거듭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자라는 말씀을 들어오다가 어느 순간 성령께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또한 이 진리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2:5)고 했고,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곧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이 복음이 진리이십니다. 이렇게 진리에 관한 여러 말씀을 살펴보았지만, 믿음 생활하시는 여러분과 저는 이런 진리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성령 하나님도 진리이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선한 말씀이다. 진리 안에 산다는 것은 선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복음이 진리이기에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이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요한계시록 310절의 말씀처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알고 있는데, 이 말씀을 은혜로 받지만 잠깐 오해할 때가 있어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마치 예수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셔서 계셔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진리는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은 무수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족관계에 대한 말씀, 직장생활에 대한 말씀, 사회생활에 관한 말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말씀, 예배드릴 때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말씀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주머니에 넣고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것처럼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안에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 비좁은 마음에 주님을 우겨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주님 말씀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영접한 삶이고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삶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진리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는 자동차를 가지듯이 사서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잔치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이십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는 그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선하신 주님의 초대를 받아 그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은혜를 누리를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으로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구나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삶이야말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가끔 우리가 착각할 때가 있는데,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은혜 안에서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 주님을 영접했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뭔가 하면 약속의 처소인 천국을 향한 소망보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좀 더 강하게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지 않고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을 순종하려고 할 때 우리가 가진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로 우리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셨다는 은혜에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토리노 수의에 있는 흔적을 재현했다고 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늘 소망하는 예수님이죠. 백인에 인자하고 금발머리를 하시고 키도 훤칠하신 모습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예수님과는 다릅니다. 예수님 영화를 보러 간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돈을 주고 1시간 이상 영화를 보는데 저렇게 멋있는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BBC에서 2002년에 성경 자료에 근거하고 당시 유대인의 표준 얼굴에 바탕을 두고 그래픽으로 재현한 사진을 보면 전혀 다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실 때 가룟 유다가 말하기를 내가 입맞추는 이가 그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멋있고 인자한 금발의 예수님이라면 누가 봐도 표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맞춤으로 신호를 보내야만 구별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부 베드로와 세리 마태와 다 섞여 있는데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는 증거입니다. 성경 보면서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 참 신기합니다. 하지만 그럴 듯합니다.

   앞으로 인자하신 예수님 얼굴을 뵐 때마다 아니다, 저건 영화적인 상상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예수님 상일 뿐 우리 주님은 저렇게 평범하고 아무 아름다운 것이 없이 오셨구나하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3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입니다. 키도 대략 150cm정도였다고 추정했습니다. 생김새도 BBC에서 재현한 저 분보다 우리가 낫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흡사 저런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제대로 믿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가족 중에 장자인 예수님이 정말 우리가 바라는 예수님처럼 생기시고 근엄한 이야기를 하셨다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나사렛 절벽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이 진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진리 안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진리의 주님이 오셨는데도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8:40)고 했습니다. 또한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5:1)고 말씀했습니다. 찾아보니까 한 사람도 없었고,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7)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4) 또한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2:8)고 하셨으니, 성도들 중에 파당을 지어서 진리를 쫓지 않는 무리가 있다고 보고합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라고 말했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1:14)고 합니다. 또한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말하지 말라.”(3:14)고 했습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고 말합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1:25a)라고 했고,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1:8)라고 했고,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8:12)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8절에서는 너희도 진리를 대적하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기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아니라 예수 믿는 교회 안에서도 진리를 땅에 버리고, 진리를 대적하고, 진리를 막아서고,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진리를 잃어버리고, 진리의 도를 훼방하고, 진리를 배반하고, 진리를 거스려 거짓말 하고, 진리를 순종하지 않고, 진리의 도에서 돌이켜 허탄한 것을 쫓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생각해봅시다. 지금 우리가 진리를 쫓지 않더라도 꽃은 해마다 피어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 역시 진리를 쫓지 않더라도 잘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그나마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입니다. 진실은 억울한 일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밝히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든 육체가 싫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실은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는 것이지만, 진리는 우리 속에 있는 불의, 악을 다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진리를 견딜 수 없습니다. 주님이 왜 고초를 당하셨습니까? 진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나지 않으시고 대한민국에서 나셨다면 우리 민족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것입니다. 전 세계 어떤 사람도 진리를 사모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진리 밖에 살아도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이 날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진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진리 없어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 말고도 관심 기울일 대상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진리를 거절한 모든 사람들의 최후를 드러낼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 역시 최후에 부활에 참여하게 하시고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으로 가볼까요.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28:1-3) 주님의 천사는 주님의 종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셨을 때 천군천사를 동원하셔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러 온 천사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천사만 해도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었다고 했습니다. 지키는 사람이 그를 보고 무서워 떨다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도 그렇게 변화하여 사람들을 두렵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대로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의 죄와 허물에 대한 징계를 대신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시신으로 계셨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5절에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28:5-6) 여기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관심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고, 때로는 예수 믿으면서도 진리에 대해 민감하지 않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도 베드로는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언을 듣고 그대로 범하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뼈아픈 실수를 용서하시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후에는 실수하지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베드로 복음 진리를 거스리는 행동을 했습니다. 창기와 세리,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하셨던 주님처럼 이방인과 식사하고 있는데, 멀리 야고보 사도가 오는 것을 보고 옛 율법을 생각하고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일이 이렇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진리를 땅에 버리고, 진리를 대적하고, 진리를 막아서고,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진리를 잃어버리고, 진리의 도를 훼방하고, 진리를 배반하고, 진리를 거스려 거짓말 하고, 진리를 순종하지 않고, 진리의 도에서 돌이켜 허탄한 것을 쫓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는 것은 좋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욱 헌신적으로 살아가야 할 것은 주님의 진리 말씀에 참여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사도의 실수를 통해 보면 이런 삶이 만만치 않은 일이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됩니다. 진리 안에 산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우리를 흔들림없이 붙잡아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은 첫째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애쓰는 사람이야말로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사진기법 중에 반영사진이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찍으려고 하는 대상과 물에 비친 이미지를 함께 담는 기법입니다. 가만히 보면 알겠지만 사실 물에 비친 이미지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물 위로 배가 지나가면 그 물결에 비친 그림자는 일렁이고 맙니다. 하지만 물 위에 있는 본래의 대상은 진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 일을 할 때 진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물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헛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목사와 성도들의 타락과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물결에 일렁이고 마는 저런 것이 아닐까하며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은 무엇을 확인해주십니까. 신앙생활이야말로 저 원본 대상과 같은 것이니, 참된 삶이요 영원한 삶이고, 오히려 세상 삶이야말로 저 헛것처럼 저 그림자처럼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이것을 영원히 증명하신 사건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믿음 생활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이 있기에 이 부활이 세상 삶에 빳데루를 거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가치를 위해, 모든 관계를 위해 전심으로 투자해서 벌 만큼 벌었고 좋은 것도 가졌지만, 그런 삶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은 선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기록되는 삶입니다. 이 사실을 온 천하에 증명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넘어지고 사도 베드로도 넘어졌기에 신앙을 지킨다는 것 보통 문제가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무엇에 민첩해야 할까요? 세상 물정에도 민첩해야겠지만, 더욱 민첩해야 할 것은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는가 생각할 수 있기 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가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비록 2주 동안이었지만.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받을 때에도 나의 허물을 드러내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는 그런 말씀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회복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나에게서 나올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주님께로부터 공급받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전도의 삶을 회복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8-20)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새로운 것이 자꾸 나와도 이 말씀들이 참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로 한 번 돌아봅시다. 얼마나 귀한 분들입니까. 때로는 답답하기도 하고 질투도 하고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잘하고 계신 것입니다. 김남조 시인의 겨울바다입니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味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매운 해풍(海風)/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虛無)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靈魂)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무만이 가득 찬 인생입니다. 그래도 그는 기도의 문을 더욱 뜨겁게 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면 바다 속에 인고의 물기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바다에 무슨 물 기둥이 있겠습니까. 물 기둥이 세워져본 들 그것이 눈에 보이겠습니까. , 그런데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의 터요 기둥입니다.(딤전3:15b) 하지만 눈 씻고 찾아봐도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이 희박하고 너무도 희미하다고 할지라도 그 진리의 물 기둥 인고의 물 기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실망한 다음 곧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시험들고 복음 진리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하면 누구나 시험들 수 있구나. 시험 든 사람을 보며 내가 실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붙들어 세워야지. 내가 주님의 부활을 믿고, 내가 첫째 부활에 참여할 것을 믿고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애써야지. 이렇게 다짐하시는 부활주일이 되기 원합니다. 지금 세상이 교회를 얼마나 미워합니까. 교회가 잘못한 행실들이 드러나서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진정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도 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8-19)

   될 수 있는 대로 우리 잘못 때문에 비방 받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하지만 내가 믿음 안에서 잘 살면 세상의 본이 되겠지 하는 생각도 반만 옳은 생각임을 기억합시다. 내가 진리를 위해 수고하는 한은 의를 위해 수고하는 자를 세상은 미워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입시다. ‘내가 믿음 안에서 잘 살아 복을 얻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게 하겠다.’ 좋은 목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높은 목적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정말로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면 오히려 세상의 조롱이 되고 비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이렇게 기도해야하지 않을까요. 첫 번째는 나의 실패와 실수 때문에 세상의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는 나의 신실한 삶으로 얻은 복으로 세상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정말로 진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할 우리들에게 주님이 주신 첫 번째 말씀이 평안하냐!”(28:9)라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쁨을 누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4월 19일 하나님의 사랑(호세아 14장) 이정식 2020.05.06 0 282
다음글 3월 22일 하나님과 예수님, 형제자매와 사귀라(요한일서1장) 이정식 2020.04.11 0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