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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하나님과 예수님, 형제자매와 사귀라(요한일서1장) 이정식 20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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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은 제목과 같습니다. 성도는 어떤 사귐으로 우리를 부르셨는가? 첫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 우리의 사귐은 형제자매와의 사귐입니다. 이 사귐에 빠져서는 안 되고 반드시 계셔야 하는 분이 계신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9절에도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며, 그 사귐의 힘과 은혜를 통해서 직장의 일, 가족의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람을 사귀는 것, 특히 우리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사귀는 것은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그분의 눈빛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분의 표정을 통해서, 그분의 말투를 통해서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좀 예민할 때에는 그분의 눈빛을 통해서, 그분의 표정을 통해서, 그분의 말투를 통해서 뭔가 좀 불편함이 있구나, 사귐이 원활하지 않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그런 때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를 여러분과 저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귐의 구체적인 본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끔 잊어버리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도 이와 같은 사귐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내 눈 앞에 보이는 사귐, 나를 환대해주거나 호의로 대하는 사귐, 나를 싫어하거나 힘들게 하는 사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반응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받고 배우려고 하는 그 사귐에 대해서는 조금 추상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든든한 빽이 되어주실 것이다. 내가 굳이 하나님 아버지를 배우려 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뭔가 나를 돌보아주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하고 막연하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신앙의 초기에는 좋습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났을 때, 아기와 부모님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사귈 수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부모님의 사랑과 젖을 통해 자라게 됩니다. 아기는 이게 사랑을 받는 건지도 모른 채로 부모님의 사랑과 젖을 통해서 자랍니다. 우리가 신앙을 처음 시작할 때도 이와 같습니다. 맞습니다. 옳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실 뿐만 아니라 정말 새롭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본받아가는 사람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기 원하는 것은 형제자매와 구체적으로 사귀기를 원할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더불어 사귈 것인가입니다.

   몇 주 전에 미국에서 농구황제라고 불리는 마이클 조던이라고 있습니다. 다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마이클 조던이 얼마 전에 헬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코비 브라이언트라는 선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농구황제이고, 코비 브라이언트는 LA레이커스라는 선수단에서 뛰었는데 농구를 잘 해서 은퇴할 때에는 선수시절에 달았던 등번호 두 개 모두 영구결번을 받는 영예를 얻은 선수입니다. 마이클 조던이 코비브라이언트의 추도사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코비는 코트 위에 모든 걸 다 쏟아부었습니다. 코비는 내 동생이며 단짝 친구 같은 존재였습니다. 코비가 얼마나 농구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지, 저에게 밤 11시반에도 전화하고 새벽 1시에도 전화하고 새벽 2시에도 전화했습니다. 제가 구사하던 풋워크 등의 농구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귀찮고 짜증이 났습니다. 하지만 코비가 가진 열정이 뜨거워서 그 짜증은 이내 열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가진 농구의 기술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가진 열정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것입니다. 콜라를 좋아하고 햄버거를 좋아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할 것입니다. 심지어 구걸이 필요하면 구걸해서라도 가질 것입니다. 코비가 그랬습니다. 코비는 그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농구선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코비와는 농구 이야기 외에도 사업 이야기, 내밀한 가족 이야기 등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게다가 코비는 농구를 더 잘하고 싶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라도 그 마음을 열 수 있는 재치가 있었습니다. 결국 코비를 아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 사귄다는 게 뭘까요? 교회에 모여서 예배 말씀을 듣고 식사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가서 때로 전화로 연락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의 사귐을 보면 이 사귐은 열정적인 사귐일 뿐만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농구기술 하나 전수받기 위한 이기적인 것만 아니라, 삶 전체를 함께 나누면서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사귐이었습니다. 바로 성경이 여러분과 저에게 들려주는 사귐을 굳이 비유하자면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의 사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적 없이 하는 사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가족 간에도 직장 속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열정 있고 목적 있는 사귐입니다. 분명한 성장이 있기 원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자 애쓸 때,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며 말씀을 깨닫기 원하고, 기도와 전도를 어떻게 하면 더 충만하게 할 수 있을지 묻고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 각자가 가진 얼마간의 간증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코비 브라이언트처럼 물어온다면, 나 역시 도전을 받아서 믿음에 더 신실한 사람으로 살기 원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코로나 19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수 주 동안 우리는 히브리서를 보았고, 야고보서를 보았고, 빌레몬서를 보았고, 오늘 요한일서를 보고 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이 모든 말씀이 동일한 목적으로 말씀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깜짝 놀랍니다. 말씀이 다르고 말씀을 받는 지역과 청중이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같은 목적을 향해서 성도의 변화를 요청하는지 제가 놀랍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 우리 교회의 신앙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유아기 때 신앙과 관계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보호하시는 신적인 존재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체화시키며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를 쓰다가 안 될 것 같은 어떤 벽에 부딪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부터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이 땅에 사는 동안 나의 말씀으로 삼기 원하고 젊은 날 열정을 가지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만, 살아보니까 불가능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초대교회 때부터 선택한 방법이 뭐냐 하면, 우리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세운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란 영적으로는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우리의 육체와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에는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라고 봅니다. 영은 구원받았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분량만큼만 하자고 생각하며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파와 교단들이 있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같습니다. 적당히 은혜 안에서 살자고 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들까지 생겨나는데, 그들이 곧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요한일서 15절을 봅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1:5) 야고보서에도 똑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17) 왜 주님을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으로 말씀하겠습니까. 우리 그림자가 많고 허물이 많고 죄악 중에 연약함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왜 주님을 빛이시오 조금도 어둠이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주님이고 우리는 사람이지라고 생각하라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사귀는 주님은 적당히 따라가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도 없으신 주님이 우리 사귐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계속 6-7절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6-7)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그때에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우리 영혼만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육체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못난 생각들, 자주 시험에 빠지는 마음들, 인간관계 속에 쩔쩔매는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과연 주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새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닮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이 사랑을 정말로 구체적으로 감격 있게 받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 속에서 끌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사랑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 자녀들에 대한 사랑, 이 둘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것이라고 이미 선언했습니다. 이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사랑의 평가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육체 가진 모든 사람이 가진 사랑일 뿐입니다.

   우리는 꼼짝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을 먼저 깨닫고 깊이 헤아리는 과정에서 주의 사랑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한 번 이루어낸다고 해서 우리 연약함이나 죄인됨이 아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목마른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자기 농구 실력이 나아지기 위해서 최고의 선수 마이클 조던을 찾아갔던 것처럼, 여러분과 저는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내 속에서 이 사랑을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이 갈급함에서 건져내 주시고, 내가 정말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청장년의 신앙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를 누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부르신 분은 당신이 아니십니까. 빛이시며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주님께 내가 배우기 원합니다.’ 이런 사귐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입니다.

   요한일서 419절을 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19-20) 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지난 주에 한 분 집사님과 비슷한 내용으로 교제했습니다. 보이는 바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보이지 않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실제로 사랑을 하다 보면, ‘사랑 못합니다.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 그냥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으로 남아주세요. 나는 그저 사랑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그만두겠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세요,’ 이런 말이 굴뚝같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이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온 고백입니다. 역사가 아무리 바뀌어도 사회가 아무리 진보하더라도 똑같이 반복되는 그리스도인의 고민은 한결같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먼저 권고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하면 결코 주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고 내 마음이 힘겨울 때,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주님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다. 그분은 여러분과 저를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코비가 조던을 짜증날 만큼 괴롭혔던 것처럼, 주님을 괴롭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똑같이 부족하지만 믿음의 선배들, 신앙의 선배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하죠?” 물어보십시오. 우리는 함께 지어져갈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두 번째 특별한 은혜를 주십니다. 첫 번째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영접하기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답답해하는 일에 대한 응답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18-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셨으니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죄 없다고 말하는 게 도리어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진리 속에 있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놀라운 선물은 용서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보통 요한일서 19절을 예수님을 영접할 때 고백하는 말씀으로 자주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씀은 신앙의 실천 속에서,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형제를 미워하고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때 , 나는 주님 몰랐을 때에도 똑같은 장벽에 부딪쳤고, 이제 주님 알고 난 후에도 같은 벽에 부딪치는구나!’ 하며, 주님 앞에 자백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인정해버립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 자백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이 사실을 고백하면, 우리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잘못한 행실 때문에 우리 마음에 수많은 불의가 가득하게 됩니다. 이때 모든 불의란 악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선한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며,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 앞에 잘못한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부모님의 전혀 상관없는 한 마디를 해도 내가 한 일을 알고 저러시나하는 조마조마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똑같습니다. 우리가 고백하지 않으면 그 불안과 괴로움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고백하면 그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누구처럼 말입니까?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주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거짓선생들이 나타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처럼 어두움은 조금도 없는 주님처럼 살려고 해보니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아야 되겠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잘 안 되니까 영혼만 구원받고 육체는 썩어질 것이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네 마음이 좋아하는 대로 살아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의 모습이며 적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4:1-2)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무슨 뜻입니까? 왜 주님이 육체로 오셨는가. 주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육체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몸과 영이 다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요한일서 57-8절에 보면,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영혼만 구원하시겠다고 하면 십자가로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실 때 만지기만 해도 치유됩니다. 때로 말씀만 하셔서도 치유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천둥소리처럼 하늘에서 내가 너희 모든 죄를 사하노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육체로 오시고 사람의 연약함을 다 가진 채로, 찌르면 찔리시고 때리면 맞으시고 졸리면 주무셔야 하고, 조롱하면 조롱당하는 모양으로 오셨습니까. 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시는 예수님으로 오셨습니까.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우리 영혼과 연약한 몸을 가진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성령만이 아니라 성령과 물과 피로 증거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과 신앙도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내가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았고 이제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는 유아기적 신앙입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 아픈 몸과 아리는 가슴을 붙잡고 끊임없이 주님 말씀 앞에 나아가고자 하며 때때로 범하게 되는 잘못을 용서받으며 나아가게 될 때 우리 몸과 영혼이 주님과 사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사귐을 주님은 처음부터 설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 예수 나의 주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교회는 허망한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무슨 교파 무슨 업적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빛의 자녀가 아니고 어두움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일서 212절부터 봅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2-14)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 거듭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는 태초부터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청년들아 너희는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출생신고를 합니다. 우리는 다 출생신고를 했습니다. 예수 믿을 때에도 출생신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출생신고를 했다고 해도 아직 없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민등록증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주민등록증을 받으려면 18세가 되어야 합니다. 주민등록증을 받기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시달려, 게임 하느라 밤새우고, 밥 먹고,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실망도 하고 부대끼기도 합니다. 그런 세월이 지나 18세가 되면 주민등록증을 받습니다. 믿음 안에서 출생신고를 해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이제 천국에 가면 된다 하고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신앙을 이루어가기 위해 수고로움과 아픔과 괴로움 속에서 빛되신 주님을 따라가고자 하는 열정 속에서 살아갈 때 영광스러운 주민등록증을 받게 됩니다. 이제는 자립하라. 선생님 없어도 친구 없어도 너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너를 도우실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를 새롭게 할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도울 이 없는 광야에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성인이 되었으니 믿음 안에서 걸어가라.

   요한일서 227절을 봅니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여러분 우리는 어릴 때 부모님의 양육을 받습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요. 하지만 영적인 주민등록증을 받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내가 신앙생활 중에서 넘어질 때 우리를 건져내시고 상담해주시고 도와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영적인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나면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고 하는 말입니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목사로부터 떠나라는 말입니다. 그때부터는 모두가 동일한 처지가 됩니다. 목사도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도움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이고,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이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예수 안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오직 성령께서 빛의 자녀로 인도해가신다는 약속입니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며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가 신앙생활 가운데 만나는 어떤 피곤함 때문에 성장을 포기한다면 주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일서도 이를 말하고 있고, 히브리서도 말하고 있고, 야고보서도 같은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주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계속해서 용서받으며 사랑에 힘쓰면서 주님을 닮아가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세상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 우리가 빛 되신 주님께로 자라가기를 그만두는 순간,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세상의 모든 정욕과 자랑하고 싶은 욕망 속에 푹 빠지게 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사랑해야 하나요? 하나님 아버지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라.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3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내일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 무너지는 모습을 본다고 할지라도 이 소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악한 길로 접어들지 마십시오.

   코비가 조던을 귀찮게 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주님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주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나를 이렇게 변화시켜주셨구나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을 지켜온 것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신앙생활 속에 성령과 물과 피를 따라 증거되는 신앙의 푯대를 붙잡고 함께 지어져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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