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가두어놓을 수 없는 것들(빌레몬서) | 이정식 | 2020-03-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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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부터 미니멀라이프, 심플라이프 등의 단순한 삶이라는 개념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요즈음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네요. 갈 곳도 없고 일정도 사라지고 이제 저 같으면 집 교회 나머지 한 군데를 다녀오면 하루가 지나는 단순한 동선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단초롭고 단순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런 삶 속에서 어떤 유익을 발견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이 시간을 선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좋은 점만 있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도 계십니다. 이 땅에 살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돈이 궁핍해서 겪는 어려움입니다. 인생의 소망을 끊기도 하고, 모든 젊은 날의 꿈을 다 덮고 자기 생의 소망을 내려놓게 되는 일까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더 벌기 위해서, 혹은 적당한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어려운 시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에 가두어져 있다고 하지만 자연세계 속에서 가두어질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1층 식당에 보시면 알겠지만 꺾어놓은 교회 벚꽃가지에 꽃망울이 피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봄날에 모든 식물에게 허락하시는 싹을 틔우고 꽃망울을 맺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젠가 600년 동안 땅에 묻혀 있던 연꽃씨를 적당한 발아 환경에 심었더니 연꽃이 피었다는 기사를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라연꽃입니다. 그 씨앗이 600년 동안 가두어져 있었다가 적당한 발아조건에 두었더니 꽃이 피었습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말라기 4장에 보면 외양간에 있던 송아지가 봄날을 맞아 뛰어노는 것도 막을 수 없습니다. 소를 키워보신 분들은 압니다. 겨우 내내 외양간에 있던 송아지가 마당을 넘어질 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뿐만 아니라 혈기가 왕성한 아이들이나 청소년들도 그들이 움직이며 다니는 것을 가두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자연세계 속에서도 가두어놓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힘들게도 하고 전염병도 힘들게 하지만 이보다 더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빌레몬서에서 그런 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에는 주요 등장인물이 세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노예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부자 빌레몬이 나오며, 그 빌레몬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네시모가 나옵니다. 요약해드리면, 오랫동안 주인의 집에서 섬기며 종살이하던 오네시모가 주인의 재물에 손을 대어 훔친 후에 도망을 갔습니다. 레위기서에도 있지만, 특별히 로마법에 따르면 주인의 것을 훔치고 달아나면 최고 사형까지도 가능했습니다. 아마 오늘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를 보면 빌레몬은 굉장히 어진 사람입니다. 비록 종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지만 인품이 괜찮은 사람이고, 또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여서 언제든지 마음으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빌레몬이 과연 이런 사람이었다고 하면 문제가 좀 더 심각해집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비롯한 모든 종들을 선대하고, 종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대하고 호의를 베풀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이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것을 알고도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도망갔습니다. 여기서 주인의 재물을 훔쳤다는 말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신뢰하여 돈궤를 맡겼거나, 누군가에 전달해주도록 심부름을 시켰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맡긴다는 것은 신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큰돈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지 않지만, 추측하건데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신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호의를 베풀고 신뢰를 주었던 종이 자기를 저버리고 도망을 갔을 때 빌레몬이 품게 될 마음이 어떻겠습니다. 그 배신감, 인간에 대한 배신감으로 빌레몬의 마음은 완전히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하는 말로도 위로되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없으면 호의를 베풀지도 않을 것이고 돈궤를 맡기지도 않을 것인데, 그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교회에서 실망하고 돌아가는 많은 경우가 이와 같은 문제입니다. 천사 같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줄 알았고, 호의를 베풀 것 같고, 말로는 뭐든지 다 해줄 것 같은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 신뢰에 금이 가는 일을 당했을 때, 그는 평생 교회를 다시 찾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당음 마을 너머 사시던 할아버지에게 수 년 동안 전도했었습니다. 젊은 날에 역삼동에서 포도밭 농사를 지었던 분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분의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믿을 만했던 장로가 돈을 떼먹은 것입니다. 신앙생활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말입니다. 성도와 성도가 함께 선한 공동체를 이루어갈 때, 우리 각자는 우리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서 다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많이 노력하고 계십니다. 혹시라도 내가 무슨 폐를 끼치거나 근심케 했다면 미안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다시 이런 잘못을 하지 말아야지 합니다. 상대방의 속은 몰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믿고 함께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노력에 찬물을 확 끼얹어버리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에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지만 다시는 발걸음하고 싶지 않을 만한 일, 그 일을 오네시모가 행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떡하든지 선을 지켜내고자 애를 쓰는 사람의 마음을 꺾어놓는 아주 못된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애쓰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줄 믿습니다. 선한 공동체가 되어가도록 하실 것을 제가 믿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는 중에 이와 같은 어려움을 만났다면 어떻게 할까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전염병의 어려움이 있지만, 치사율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을 만큼 괴롭지만, 선함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비할 바 없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공동체 안에 살면서 선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을 만났을 그때도 우리가 여전히 포기하지 않도록 하고, 그런 가두어짐에 사로잡혀 있지 않게 할 어떤 것이 있을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빌레몬서 1장 3절을 보시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속한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인사말로 은혜와 평강이 있을 것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찬물이 끼얹어진 교회 공동체 위에 가두어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항상 우리 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심한 곤란을 겪고 있을 그때에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은 넘치도록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거절했을 때, 오직 하나님의 참된 선을 유일하게 증거할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셨을 때, 온 인류와 전 세계에 참된 선을 증명하신 사건이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참된 선이야말로 영원한 것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아담 때부터 앞으로 영원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죄와 악이 어마어마하게 쌓일지라도 우리 주님의 은혜는 그 위에 항상 넘치도록 있음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이 닫혀있는 빌레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계시기를 축복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또는 지난 3개월 동안 고생하고 있는 여러분과 제 삶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도록 계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가두어놓을 수 없는 것이 뭔가 하면 빌레몬서 1장 9-10절을 봅니다.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갇힌 상태입니다. 오네시모도 갇혀 있는 바울에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주석을 보면, 여기서 갇힌 상태란 감옥에 있다기 보다는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28장 30-3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셋집에서 생활하였고, 그곳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집밖으로 나갈 자유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여러분과 저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입니다. 요즈음 우리들은 스스로 격리시키기도 하고 외출을 자제하기도 하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 정부로부터 가택연금을 당한 상태입니다. 좋을 일이 뭐 있겠으며 감사할 일은 또 뭐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갇힌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을 낳습니다. 바로 오네시모와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고 거듭하게 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마치 갇혀 있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유인이었을 때 수천 킬로미터를 1차 선교여행부터 4차 선교여행까지 다녔는데, 이제 갇힌 자로 있는 동안에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충만한 사람은 비록 육체는 감옥 같은 곳에 가둘 수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겠다는 소망만큼은 가두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과 제 마음 속에도 이런 소망이 점점 더 강건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 만큼 갇혀 있지 않습니다. 전염병으로 우리가 생활에 얽매임과 불편함을 겪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습니다. 그 어떤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증거하고자 하는 이 소망은 가두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도 가두어질 수 없는 소망입니다. 세 번째, 가두어놓을 수 없는 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11-1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전에는 너에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너에게 공히 유익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너에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나의 심복이니라.” 그리고 다시 15절에 말하기를,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것으로도 가두어질 수 없습니다. 사실 오네시모가 행한 일을 여러분과 제가 겪었다면 오네시모 인간성을 문제 삼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보다 더 강하게 믿고 있는 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은 변하지 않아.”라는 말입니다. 이런 부정적 확신에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합니다. 15절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께부터 받은 계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그런 짓을 한 것은 본래 나쁜 사람이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쿨하게 본성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빌레몬에게 손해를 입히고 배신감에 밤잠을 못 이루게 만든 이 일이 왜 생겼던가. 오네시모가 주님을 알지 못했던 상태에서 범죄한 후 나 바울에게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셨고, 그리고 전에는 무익하고 손해를 입혔지만, 이제는 나 바울과 너 빌레몬에게 영원히 유익한 종이 되게 하시려고 섭리로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교회를 돌아보지 않을 일을 당할 때에도, 또 다시는 다른 성도와 진실한 교제를 하지 않겠다면 우리 마음 문을 걸어 잠글 만할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행동 때문에 내 마음을 닫았고, 그런 채로 두 달, 석 달, 1년이 다 지나가도록 교회생활도 심드렁하게 해왔지만, 이제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구나. 나를 이런 매임에 가두어둔 것은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가두어두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원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안에서 감사와 찬양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함께 있지만 이미 죽은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유구한 역사 동안 실망하게 만들고 낙망하게 만든 그런 일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삶,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삶을 사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반복적으로 인생을 경험할지라도 우리의 심장은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릴 줄 아는 데 있어야겠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현대 시대 사람들의 문제점을 한 단어로 평가했습니다. 영어로 integrity, 번역하면 신실함, 온전함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을 정의하기를 신실함(온전함)이란 내 안에서 하는 말이나 내 밖에서 하는 행동이 같은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기를, 내가 집안에서 생활할 때나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여행지에서 생활할 때의 모습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서로 실망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삶을 그리워하는 눈을 주셨는데도 왜 낙망합니까. 안팎이, 집안에서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내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선한 말과 아름다운 표정을 짓는데, 세상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직장생활에서 서로 불신하는 이유가 뭡니까?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신실하게 어디에 있든지 투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측가능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잘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목사님들과 축구를 했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우리편 선수 손에 축구공이 맞았습니다. 핸드링입니다. 공이 손에 맞은 걸 여러 사람이 봤습니다. 하지만 심판이 못 봤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물었습니다. “맞았어, 안 맞았어?” 그러니까 이분이 하는 말이 “안 맞았어!” 그 말을 듣고 있던 우리 편 선수가 “아이, 맞았잖아요.” 그랬더니 그분이 막 화를 내는 겁니다. 심판이 결정할 일을 왜 나서서 말하냐고, 선수에게는 권리가 있는 거라고, 네가 그러면 나는 뭐가 되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게임은 결국 우리 편이 졌습니다. 쉬는 시간에 감독 목사님이 와서 하는 말이 솔직하게 시인하라고 한 우리 편 목사님에게 와서 “그렇게 하는 거 아냐. 지금 이기고 지는 경기에서 심판이 못 봤으면 심판이 결정하도록 해야지. 뭐가 그리 솔직하다고 나서서 맞았다고 하는 게 어딨어. 그건 솔직한 게 아니야. 축구를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하는 겁니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여러분 월드컵 경기에서 신의 손 마라도나가 골 넣는 장면을 보셨죠? 헤딩을 하는 척했지만 손으로 결승골을 넣었고,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우승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저렇게 꼭 했어야 하나’ 하면서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사실 모든 경기에서 결정을 하는 건 심판입니다. 심판이 못 봤어도 그가 결정합니다. 선수들 중에 누구도 자기가 핸드링 반칙했다고 해서 손 들고 고백하는 사람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고, 또 이게 정상적인 규칙이기도 합니다. 프로경기에서만 그렇지 않고 이런 태도가 일상 중에도 많이 퍼져 있습니다. 그게 꼭 잘못된 건 아닙니다. 게임의 룰이니까요. 하지만 게임의 룰에서는 통하고, 이기고 지는 중요한 경기에서는 통한다고 하여도, 일상생활 속에서까지 이런 원칙을 사용한다면 그는 신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람이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셨을 때에는 우리의 선한 양심과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만나서 함께 지어져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세상 사람들도 신실한 사람, 온전한 사람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직장생활 가운데 여러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곳에서 굳이 내가 잘못한 거라고 손을 들겠느냐 하는 겁니다. 법정에 가서 결론내릴 때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도 며칠 후면 드러날 텐데 뻔한 거짓말을 합니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했지만, 알고 보면 이틀 후에 말하는 것과 열흘 후에 알려지는 것은 정치적인 영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룰에 근거한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모습이 각 사람에게 일반화되는 것은 결단코 반대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맙시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신실하고 온전하게 행한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과연 그리스도인은 다르구나 할 것입니다. 한두 사람만이 아니라 무리를 이룬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다 그런 행동을 한다면 우리 모두를 믿음직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빌레몬은 결국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받아들입니다. 사도 바울만큼 빌레몬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같은 예수님을 모신 형제라는 데 대한 신뢰가 없다면 그렇게 할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빌레몬의 입장을 한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많은 종을 거느린 부자이기 때문에, 오네시모 한 사람을 버리는 거 아무 문제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 구하여 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도 바울의 편지, 게다가 사도 바울의 심복이 되었다고 하는 보증을 받고 오네시모를 영접하였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빌레몬처럼 행할 수 있을까요? 빌레몬의 선한 마음을 가두어놓게 만들었던 오네시모를 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두어질 수 없는 은혜를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섬김과 우리의 변화, 새롭게 되고자 하는 우리의 간구, 그런 가운데 우리의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가두어놓을 수 없는 것은 동지적 관계입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몬1:16-17) 좋지 않는 수많은 일로 우리를 낙담케 하고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하는 여러 일들 가운데 있을지라도. 여러분과 제가 동역자의 관계가 된다면, 동지가 된다면 빌레몬과 오네시모와 같은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네시모라고 마음이 편할 상황이 아닙니다. 주인의 것을 훔쳐 도망갔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믿었지만 마냥 돌아가는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거리낌이 없었겠습니까. 차라리 다른 주인에게 가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게 좋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갑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갑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사도 바울과 빌레몬이 동역자일 뿐만 아니라 오네시모가 함께 믿음의 동지가 된 것입니다. 너무도 놀라운 관계입니다. 이런 만남, 이런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고, 우리 믿음을 끌어내리는 어떤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동역자의 관계를 품는다면 그런 일이 우리를 가두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수많은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목마를 그때에 주님께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 가운데 ‘주님, 내가 이 마음 가지고는 신앙생활 못하겠습니다.’ ‘주님, 내가 이 마음 가지고는 저 사람 못보겠습니다.’ 고백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뜻대로 구하여 회복하고 해방되는 응답이 있기를 원합니다. 중세 시대 흑사병부터 스페인독감, 홍콩독감 등이 세계에 닥쳤습니다. 그때에는 마스크도 소용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믿음의 선배들은 전염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코로나19는 약한 것입니다. 우리의 위생만 관리해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주님을 따라 살기 원하는 여러분, 만약에 우리 생전에 어떤 방역도 소용없는 전염병이 닥친다면,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환경이 다가온다면,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질병이 다가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가진 우리가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을 준비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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