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세속에 물들지 말고 주위를 돌아보라(야고보서) | 이정식 | 2020-03-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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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 1절에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여러분과 제가 평생동안 주님을 기다리고 기대하면서 마음에 품을 말씀이 이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가물어서 이내 목을 축이지 않으면 죽기 직전에 있는 사슴의 갈급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시절을 따라 이렇습니다. 3월 4월 일정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있는데 속은 답답하고, 일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갈급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오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는 고백이 우리 남은 삶 동안에 진실한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고양 땅에 목사님이면서 독립운동을 한 배민수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중산동에 부부의 묘지도 있고, 삼애교회라는 연세대에 기증된 교회와 부지가 있습니다. 배민수 목사님은 믿음의 아버지로부터 나라사랑을 당부받았는데 “예수님도 나라를 사랑하라고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목사님이 그 유지를 받들어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어머니와 함께 참여한 시위에서 주동자로 붙들려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1년 6개월 형에 수인번호 228을 받고 함흥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물자수송을 위해 만들고 있던 기차 선로를 만드는 노역을 했습니다. 그런 감옥 생활에서 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감옥에서 하루에 2번 기도회를 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할 시간도 많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다른 죄수들과 찬송가를 부르고 복음을 나눴다. 내가 풀려날 때 5명이 성경책을 보내달라고 했고 나는 그것을 전해주었다.”고 했습니다. 배 목사님은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기도하면서 늘 밝은 표정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같은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 미쳤수? 여기가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감옥인데 어ᄄᅠᇂ게 찬송이 흥얼거리고 행복해 보인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배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나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늘 행복하오. 당신도 이것을 믿으면 언제나 행복할 것이오.” 이 고백은 마음에 아무런 갈등도 없는 것처럼 보여서 좀 그렇습니다. 왜 배민수 목사님이 감옥생활을 하면서 항상 기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1년 6개월이라는 전체적인 기간 동안에 그의 중심 속에 항상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할 때가 언제일까요?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려고 애를 쓰다가 때로는 핍박도 받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피도 당하며, 또 믿는 사람들로부터도 시기와 질투를 당하게 될 때가 아닐까요? 그럴 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오 주님,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핍박이 없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뿐일 때에는 이런 갈급함의 고백이 잘 안 나옵니다. 내가 한 달 동안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한 달 동안 얼마나 돈을 벌어야 하는지,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챙길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살다가 예배드릴 때 예배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위해서 말씀을 순종하다가 받는 괴로움이 나에게 닥쳐왔을 때, 그때 믿음의 사람은 ‘내가 더욱 주님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하니 주님 내게 위로를 주셔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하며 갈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격리 아닌 격리, 자가 격리를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 나오신 여러분들은 갈등 가운데 예배 나오셨지만, 코로나19에 걸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회사에게 혹시나 해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행동반경을 격리하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저도 최근 2-3주간 동안 제가 다닌 동선을 카톡에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일이 생길 때 지나온 일이 다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지난 번 한 분 집사님이 사도행전을 낭독하면서 사도행전의 신앙이 참 대단하다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사도행전 24장 5절에 보면 “전염병 같은 자들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에나 삶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목표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실하게 살고 예수님을 잘 믿었는데, 어떤 평가를 받았는가 하면 이렇게 신실하게 살수록 전염병같은 자들이라 비난과 조롱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6절에는 신실하게 살수록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제가 간단히 생각해볼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세상 사람들의 본이 되고 싶다는 삶의 목표는 반만 옳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실하게 살면 살수록 전염병 같은 자가 되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잠깐 기억해볼 수 있습니다. 왜 배민수 목사님이 자기 가문을 돌아보고 자기 교회만 세우면 될 터인데 나라사랑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실천했을까요? 그 결과로 감옥에 갇혀 그 좁은 공간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 분은 찬송을 하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렸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세상에 물들지 말고 주위를 돌아보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했습니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보낼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핍박 아래 있었습니다. 편지에 시작하기를 2-4절 보시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인가 하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입니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게 되는데 그 시험이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기고 살 것인지를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련은 욕심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이 시험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시험이 아니며, 국가권력으로부터 오는 핍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 속에서 나오는 욕심이 우리를 감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욕심이 비방을 낳게 되고, 죄를 낳게 되고, 몸된 교회 공동체를 흐트러지게 만듭니다. 이 시험은 우리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잠언 30장에서 거머리에 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거머리가 몸에 착 달라붙어서 빨아먹듯이, 무덤은 족한 줄 모르고 삼키며, 물을 다 스며들게 하는 땅은 또 물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도 만족을 모른다고 했습니다.(잠30:15-16참조) 욕심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일반 세상 속에서도 같은 고백을 하기를 욕망의 전차를 멈출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는 일반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이나 다 함께 매어있는 것입니다. 잘 다스리다가도 좀 더 강한 자극을 받게 되면 우리 욕심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약이겠지 하고 20대, 30대, 40대를 지나가면서 반복되는 자기 실수와 다른 사람들과 세계와 사회를 바라보게 되면, 그때부터는 슬슬 내 안의 욕심과 싸우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건 싸워야 될 게 아니구나. 욕심을 도전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구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절망하고 실망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6-18) 여러분과 저를 거듭나게 하신 것은 진리의 말씀인데,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듣고 순종하며 싸워가야 할 것도 진리의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욕심, 버틸 수 없고 제어하기 힘든 욕심 앞에서 힘들어할 그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갈급히 주님을 찾을 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진리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두 눈 뜨고 항상 목격하는 욕심을 보며 낙담하지만, 그때 전능자 하나님으로 우리를 돕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초대하셨습니다.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올라가서 보니 너무 황홀하여 우리가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마17:5참조) 찬송가에도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우리가 우리 욕심에 지쳤을 때 나오지 않겠습니까. 우리 앞에 예수님만 있기를 원합니다. 목사도 없고, 우리 곁에 있는 성도도 없고 오직 주님만이 내 앞에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많은 날들 동안 의지했던 것에는 실망밖에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시키십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진리의 말씀만 붙잡고 살라고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죄를 낳고 사망을 낳게 되는 욕심을 따라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낙담과 실망할 그 순간에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이대로 살아서는 백년 인생을 살아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걸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욕심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복되는 실망 속에서 한풀 꺾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우리가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흘러가는 신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말하기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우리는 종종 온유함으로 받지 않고, 도리어 말씀이 헛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례를 보여 달라고 말이죠.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산 사람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가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뽑아낼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나의 욕심과 마음에 심어진 진리의 말씀이 끊임없이 부딪칠 때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도록 애를 쓰라고 도전합니다. 27절에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돌아볼 사람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고 나쁜 곳에 안 가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속은 나의 욕심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 가운데 두 번째는 빈부를 차별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2장 1-2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약2:1-2) 또 6절에 보면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욕심이 너무도 큰 대적인데, 2장에서 말하는 빈부를 차별하고 부자를 우대하는 일도 만만치 않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를 높여주고 그가 몸된 교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 역할과 유익을 보고 그를 높여주는 것, 반면에 나도 모르게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쉽게 대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뇌물은 모든 일이 잘 되게 합니다. 성경도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군가에든지 재물로 섬김을 받으면 마땅히 그를 섬기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담임목회를 시작한 초기에 한 분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예배에 어떤 남루한 차림을 한 사람, 알고보니 도와주어야 할 일 밖에 없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 우리교회가 영접할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말이었습니다. 작은 교회에 큰 부자가 오기는 쉽지 않지만, 또한 작은 교회라도 너무 가난한 사람 역시 못 들어온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의도했거나 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 돌볼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좀 피곤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자를 대우하는 반면 가난한 사람은 차별하기 쉽습니다. 누군가 재물로 교회를 잘 섬기면 그에 합당한 인정을 받는 것은 마땅하나, 우리는 그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섬겨야하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올 때 얼마나 우리 마음이 열려있는가.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2:8) 최고의 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법이라고 했으니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그 이웃이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이웃이라면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우리를 괴롭히고 실망케 하고 다른 지체들에게서 낙담하게 되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보일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새벽기도를 하고, 교회 일정을 따라 충성되이 섬기고 신실하게 살아도 잘 안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결국은 안 되는 건가. 우리 신앙은 여기까지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이 이렇지만 야고보 사도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좀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약2:16-17) 피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부탁하신 말씀을 피하면 죽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 중에 세 번째 시험은 더 놀라운데, 야고보서 3장 2절을 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평생 동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말이요 혀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못박기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6-8) 우리는 야생 동물을 길들일 수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라든지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채널을 보면 사자도 길들이고, 코끼리도, 코브라, 악어도 길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스릴 줄 알아도 다스리기에 실패하는 것은 혀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길들일 수 없는 것을 길들이라면 말이 안 되는 것이죠. 그런데,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야고보 사도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17절을 보시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3:17)라고 했습니다. 내 의지로 내 육체로는 결코 길들일 수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갈급히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오늘 저녁에도 오늘 하루 동안의 말실수로 아파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 두 분도 아주 오랫동안 원수처럼 사이가 멀어져있습니다. 동역자로서 주님을 위해 몸된 교회를 세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등지게 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저는 지금 목사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올무에 걸려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어떻게 혀를 길들인다는 말입니까? 여기서는 야고보 사도가 우리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3:2a) 야고보도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실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말할 때마다 실수했고, 깨닫지 못한 말을 했습니다. 서로서로 누가 크냐 하면서 공격하기도 하고, 내가 주님의 수제자가 되겠다고 욕심을 부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야고보 사도는 실수가 많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여러분과 저와 다른 점은 그런 고백을 하면서도 떠내려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니 위로부터 난 지혜를 따라 살려고 애를 쓰자고 도전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신앙생활 가운데 낙심도 양이 차야 합니다. 실망해서 도무지 신앙생활을 지속할 맛이 없어져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문득 돌이켜 생각하면서 ‘내가 이러려고 주님 믿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이런 사람 만들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주님은 이런 것을 목표로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랬냐 하면 우리가 마치 포기하고 낙담한 채로 살아가는 신앙이 목표인 것처럼 산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결단코 그런 우리와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는 다툼과 시기와 질투입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4:1) 우리가 서로 미움이 생기면 다투게 되고, 그 다툼이 심해지면 시기와 질투가 진행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더 아름답고 강건하게 세우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일상 중에 서로 삶의 방식 일하는 방식이 달라서 생기는 다툼은 우리를 정말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헌신의 과정 속에서 이런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어떨 때 괴롭습니까? 나도 내 양껏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데, 거기에 뜻이 안 맞고 일의 앞뒤가 맞지 않으면 다툼이 생기고 시기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생기는 다툼과 시기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시기가 많다고 했지만, 남자들도 시기가 많습니다. 저도 시기합니다. 이렇게 사람 사는 세상에 없을 수 없는 게 다툼과 시기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다툼과 시기를 어디에 비유하는가 하면 간음에 비유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4:4) 간음한 여인이 우리 가까이 있다면 품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툼과 시기를 하는 사람이 세상과 벗 되는 것과 같고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하게 권면하기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7-8)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어디까지 도전하는가 하면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아, 도저히 안 되는구나’ 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차라리 울고 슬퍼하며 애통하라고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에서 욕심을 대적할 것에 대해,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에 대해, 혀와 말을 길들일 것에 대해서, 그리고 다툼과 시기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제가 믿음의 동지가 되기 원합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함께 서로 세워가는 믿음의 동지가 되기 원합니다. 끝으로 야고보 사도는 이 모든 시험을 이기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3-15) 말과 혀로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있습니까. 다툼과 시기에 신앙에 절망한 사람이 있습니까.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해서 양심에 찔린 사람이 있습니까. 도저히 욕심을 어떻게 하지 못해 절절 매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3년 반 동안 기근이 생겼을 때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엘리야도 욕심에 지쳤고,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마음을 품었고, 혀와 말을 길들이지 못해 힘들어했고, 다툼과 시기에 괴로워했다는 말입니다. 그때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눈물로 슬퍼하고 애통하며 통곡하면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위로부터 난 지혜에 의지하며 순종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안 되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안 되지만,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그때그때 우리를 다스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묵상한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품고 자비로 안으셔서 우리를 순종케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기억합시다. 주님은 이런 믿음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언약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동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는 누군가 넘어져도 용납할 수 있습니다. 함께 세워가기 위해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적이 없으면 비방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정적인 신앙을 한 번도 의도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목표를 새롭게 할 수 있기 원합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을 새롭게 조정하기 원합니다. 주의 부르심을 따라 마음 편하게 걸어봅시다. 너무 애달파 할 것이 없고 너무 괴로워할 일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소망하고 갈급하기만 하면 주님은 여러분과 저를 순종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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