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히브리서 13장) | 이정식 | 2020-03-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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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모인 100만이 넘는 인파 속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이 올해 10월에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큰 집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정신을 아들이 물려받아서 온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생각이 ‘약간 시대착오적이다’ 생각했습니다. 요즈음 부흥회 한다고 날고뛰는 강사를 세워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마당에 6-70년대에나 통하던 그런 대형집회를 계획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이분들의 정신은 배우기를 원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전세계를 다니면서 순전하고 단순하고 명쾌한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세계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열리지 않던 땅이 구소련과 동구권이었는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1959년부터 기도했습니다. 1967년에 유고슬라비아에서 처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수년 동안 공산권에서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대중집회 가운데서 공산주의 체제를 공격하는 발언을 할까봐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체제 유지를 어렵게 할까봐 걱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서 유고슬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소련과 동구권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뉴욕타임즈 기자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당신이 공산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들이 이용하고 자기들 체제의 관용성과 우월함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걸 아느냐?” 빌리 그래함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한 말이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공산주의가 체제 선전의 도구로 나를 사용할 수 있지만, 내가 하는 선전은 더욱 위대한 선전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과 천국을 선전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즈음 우리 기독교계가 공산주의와 싸우기도 하고 북한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어떤 차이를 느끼는가 하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공산주의가 어떻든지 간에 그 안에 살고 있는 영혼을 향한 긍휼과 사랑으로 나아갔는데, 오늘날 우리 교계는 공산주의와 싸우려고만 애를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공산주의를 넘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자 하는 신념이 뒤로 물러났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이 떨렸다기 보다는 회개가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체제도 넘어서지 못하는 복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인가, 이념조차 초월할 수 없는 복음을 말하고 있는가.’ 올 10월에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님이 와서 집회를 할 것입니다. 저도 그 집회 어떤 부분을 돕기를 원하는데, 그 집회가 성공할 것인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미 우리 시대가 많이 변했고, 우리 성도님들이나 사람들이 그런 대형집회를 그다시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 사모하는 것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그 정신입니다. 복음을 향한 그의 열망과 확신을 사모합니다. 여러분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이 뒤로 물러가고 나면 모든 기독교의 깃발은 비뚤어지게 되고, 재정이나 인력의 모든 투자도 우선순위가 어그러지고 맙니다. 오늘 히브리서 3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여러분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방법은 특별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도전하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2절에 보시면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히3:2-3a)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신실하셨는가? 여러분, 오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주님을 본받을 첫 번째는,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 앞에 신실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에 가장 신실하기 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실까요? 오늘날 여러분과 저의 귀와 눈은 무엇을 듣고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임명하신 하나님께 신실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는 우리가 듣고 있는 수많은 말들로부터 우리를 건져내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비록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이며, 마음은 딴 곳에 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바로잡아 세워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되, 당신을 임명하시고 세우신 하나님께만 신실하기를 배우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쓴 이유는 당시의 성도들이 지금 배교 직전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는 성전이 멸망하기 전이고, 로마 황제로부터 모든 기독교인이 핍박과 죽임을 당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고달팠습니다. 여러분들도 지난 일주일 동안 코로나19로 인한 소식을 많이 들으셨습니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1분만에 감염되었다는 등의 보도를 보고 오늘 예배 나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우셨습니까. 그런데 이 당시의 성도들이 받고 있던 핍박은 예배드리다가 적발이 되면 죽는 것이었습니다. 죽기 직전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것이 즐겁고, 괴롭고 어려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믿고난 후 인생의 소망을 발견하고 힘있게 살아갈 터인데, 예배 드리는 것만으로도 핍박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잘 살려고 믿었지 죽으려고 믿었나’ 이 말입니다. 멋지고 간증이 풍성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했지, 핍박 중에 이리저리 도망 다디며 살려고 믿은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배교의 첫 번째 이유는 핍박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과 저보다 훨씬 힘든 점이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 후에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이 지어지면서 성전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예배드릴 만했습니다. 명동성당 정도만 가도 들어가는 입구에서 벌써 거룩해지고 싶고 마음을 단장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중세 건축 양식 고딕 양식이나 바로크 양식이 발전했습니다. 그런 거룩한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모든 죄를 씻어주는 피를 뿌립니다. 유대인들은 레위 지파들의 찬양소리를 들으면서 성전세를 내면서 예배했습니다. 그때는 핍박이 없었습니다. 예배는 오늘날 이슬람처럼, 이단 신천지이나 이단 하나님의 교회처럼, 질서정연하게 도열하여 거룩하고 절도 있게 진행했습니다. 가끔은 개신교가 너무 안일하게 예배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형식을 갖추어 예배하고 모세오경을 기초 구약말씀을 듣고 죄씻음 받고나면 마음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왜 성전에 가서 예배했느냐고 탓하지 않고 아무도 말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니까 그냥 가정집에 모여서 예배하니 거룩한 대제사장도 없고, 레위 찬양대도 없고, 피뿌림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데 보여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로 예배자로 만나서 신앙생활 하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며 배우고, 때로 관계 속에서 힘들어하기도 하는데 왜 우리를 잡아가두려 하고 죽이려고 하는가 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신앙이 제대로 가고 있는가? 아무런 거룩한 모양도 없어 보이는 초대교회 예배를 드리면서 핍박 받기보다는, 차라리 전에 모세를 따랐던 우리 선조들처럼, 성전 예배를 드렸던 것처럼, 눈에 보이도록 짐승의 피를 모든 성물에 뿌려 거룩하게 하던 때처럼, 그때로 다시 돌아가는 게 맞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꿀떡같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깨우쳐주려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멋있게 신앙생활 하며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며 피뿌림을 통해 죄사함 받아 깨끗해진 것처럼 여기지만, 그런 죄씻음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며 대제사장의 제사 또한 해마다 반복해서 드려야할 불완전한 제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죄를 위해 단번에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원히 우리를 속죄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대제사장과도 다르고, 모세와도 다른 이 예수님을 따르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요지입니다. 저도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우리 교회 예식을 좀더 거룩하게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교회의 규모에 따라서 모든 예전이 깔끔하고 체계적이며 좀더 준비된 모습으로 행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교회에서 선물을 드리는 작은 일에도 절차와 예법을 갖추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제가 주님 앞에서 정말 취해야 할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기 원합니다. 첫 번째로 주 예수님께서 당신을 임명하신 하나님께만 신실하셨음을 우리가 배우기 원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3:13-14) 그러면서 오늘 3장에서 예로 들기를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할 때를 예로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생활할 때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직전에는 더 심한 노역을 시켜서 재료도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으면서 더 많은 벽돌을 만들라고 해서 더욱 힘들었습니다. 고센 땅에서 이스라엘이 울부짖었는데 그 음성을 주님께서 들으시고,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이집트에서 건져내셨고 건넌 후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받고 광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집트 땅에서는 잠잘 수 있는 집이 있었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있었고, 보호해주며 다스릴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광야에서 살다보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쉴 수 있는 집이 있나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나요, 대적의 손에서 보호하며 지켜 줄 왕이 있었나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었죠?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히3:9-11)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귀한 것을 얻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먹을 양식, 내가 마실 물, 내가 쉴 수 있는 집, 나를 위해 일할 공무원, 나를 지켜줄 왕이 내 소망이 아닌가? 그렇다면 뭔가 말입니다. 여러분 기억합시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과 저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집도 없고 절도 없고, 지켜줄 왕도 없고, 배불리 먹을 음식도 목마름을 채워줄 물도 없는 곳이 광야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간혹 물을 주시고, 매일 만나는 주셨지만 부족하고, 내일 무얼 먹을까 걱정해야 하고, 이제 좀 지낼 만하면 다시 천막을 거두어 옮겨야 하니 피곤할 뿐인데.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원하셨고,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일하실 때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고 보여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결국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읽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처지입니다. 그동안 모세 율법을 가지고 대제사장을 통해 성전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면 되었는데, 온전치 못한 데서 건져내어 새롭고 산 길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건져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랬으면 더 나은 무엇인가가 와야 할 것 같은데 도리어 예수 믿고 나니까 핍박이 오고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눈에 보이는 거룩한 예식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뿐 거룩한 뭔가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잡혀있고, 자기를 지키는 안전망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다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가 네이버NAVER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매일 전해오는 뉴스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잠깐 빼앗길지라도 다시 돌이켜 주님께서 내게 주신 안식과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나를 부르신 주님께만 신실해야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7-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할 두 번째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78-9) 주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주님은 여러분과 저의 몸을 원합니다. 나는 잘 되고 잘 살기를 원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몸을 원합니다. 이 몸은 이제 곧 핍박받을지 모르고 붙잡혀 가둠을 당할지도 모르고 주님처럼 채찍에 맞을지도 모르지만, 여러분들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핍박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무서워서 ‘하나님 나 그런 신앙 원치 않아요. 나 안녕하고 잘 살려고 신앙생활했지 다른 건 원치 않아요. 나를 힘들게 만들고 통곡하게 만들고 고생하게 만든다면 저 안 따라가겠어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도 복음의 능력에서 조금 무너져 있고, 여러분도 함께 복음이 요청하는 부르심에서 조금 멀어져 있습니다. 요즈음 이렇게 어두운 시국에 이 시간들을 도리어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는 데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라고 했고, 히브리서 6장 1-2절에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했고, 히브리서 8장 1절에는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고 했고, 히브리서 12장 2절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어떤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까?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던 것처럼, 먼저 행하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을 기억하면서 이 몸이 어려움을 겪게 되며 때로 죽음에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눈물과 통곡과 간구와 소원을 올려드려 응답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도전을 쉽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심령을 받지 않는 모든 기독교는 타락하게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부르심을 응답하지 못하는 모든 교회는 뒤로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하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주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나요. 이미 여러분과 제가 받고 있는 이 소망과 예배의 평안과 생활의 안정은 충분히 감사한 것입니다. 적다 모자라다 말하지 마십시오. 오늘 오후에 유엔에서 제시하는 그래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전 세계에서 한국은 최상위 소득 국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치, 경제, 모든 문화 생활을 누림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축복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우리는 작은 시련에도 마음이 흩어집니다. 여러분들이 착해서 그렇지 조금만 강팍하셨다면 지난 주에 저에게 전화를 했을 겁니다.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말이죠. 예배를 드리고 안 드리고, 잘한다 못한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주님 앞에 좀 죄송합니다. 우리 믿는 신앙과 심령이 좀 죄송한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를 영접하셨는데, 우리는 주님 앞에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취해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지만 우리 또한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의 때가 되면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성경을 썼던 것과 동일한 상황이 올 것이고, 앞으로 점점 더 기독교는 어려운 환경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제가 온몸과 온 마음으로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며, 주님이 모든 고난과 죽임당함을 다 겪으셔서 우리가 당할 어려움과 고난을 함께 동행하시며 그 시련을 관통해서 승리케 할 것이라는 그 믿음으로 승리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할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송포성서침례교회 목사로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 마음을 주시는 한, 여러분들이 그런 신앙으로 세워지기까지 인도할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저를 그런 목사로 세워지도록 도우셔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주님을 깊이 생각할 것은 히브리서 13장 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2-13) 하나님의 능력 많으신 아들이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성전 밖에서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니 예수님의 집이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자기 집에 계시지도 못하시고 성전 밖 버려진 땅에서 고난을 받으셔서 모든 고난 받는 자들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여기까진 좋아요. 주님이 고난받으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으니 좋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십니까.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무슨 말입니까? 죽자! 이 말입니다. 아니 세상에 비난받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려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침뱉음을 당하며, 채찍에 맞으며,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죽긴 왜 죽어. 핍박이 오면 다른 나라로 이민 가지. 핍박이 오면 잠깐 숨어있지. 끝날 때까지 숨죽이고 있지. 만일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핍박이 오면 끝날 때까지 숨어있으라!’하고 했다면 얼마나 마음에 위로가 되겠습니까. 역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지.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인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미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제 정신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람이 제정신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믿음이 너무 안일하고 연약하여 작은 시련 가운데에도 예배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기억합시다. 주님이 얼마나 강력하게 말씀하시는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나 안식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누구처럼요? 하나님의 기적으로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죽었던 것처럼, 핍박이 와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히브리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처럼 말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꼐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3:12,14) 이런 믿음의 대표자들이 히브리서 11장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벨이 그랬듯이, 에녹이 그랬듯이, 노아가 그랬듯이,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모세가 그랬듯이, 라합이 그랬듯이, 삼손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통곡하는 심령으로 썼을 것입니다. ‘오 주님, 우리가 지금 무너지게 생겼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승리하셔서 복음이 되셨는데, 교회가 흩어지게 생겼습니다. 어찌할까요? 도망갈까요 숨을까요?’ 마음에 심한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에게 주님께로부터 담대한 마음을 주시기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 땅의 일도 자기 영혼과 혼신의 힘을 다하여 수고한 결과를 우리는 높이 평가합니다. 주님도 여러분과 저에게 이런 것을 요청하시고 계십니다. 감격스러운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갈등을 아시고 힘 있게 버틸 수 있도록 힘주신다는 것입니다. 영문 밖의 고초를 다 겪어보셨고, 끝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살리심을 받으셨기에, 여러분과 저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다 아시고 도우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10장 33-38절을 봅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3-38) 아멘입니다. 특별히 34절에 대한 아멘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갇힌 자는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갇힌 자를 말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교도소에 구속된 그리스도인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동정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땀 흘려 번 돈입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모은 재산입니다. 얼마나 수고하고 애써 땀을 흘려 벌어둔 돈인데, 그것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여기라는 말입니까. 이 사람 정신 있는 사람입니까 없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소유를 지켜주시지는 못할망정 그걸 빼앗기는 것을 기쁘게 여기라니요. 빼앗기는 걸 기뻐해야 하나요? 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기를,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예, 주님 압니다. 알아요.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다는 것 알아요.’ 정말 압니까? 아니요 우리는 아직 몰라요. ‘네, 천국이 있고 영원한 안식이 있는 걸 알고 갈 때 되면 가겠죠.’ 이런 생각으로는 아멘할 수 없습니다.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아는 천국의 삶은 흐릿한 것이 아닙니다. 흐릿하고서야 두 눈 뜨고 내 소유 빼앗기를 것을 기뻐할 수 없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아멘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천국은 진실한 천국이어서, 이 땅에서 우리가 소유한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을 몰아낼 수 있을 만큼 확실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히브리서의 구원은 구원이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그런 안일한 질문이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접하셔서 주가 되신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온몸과 마음을 다 주고도 아깝지 않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 믿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 고난당하고 소유를 빼앗김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떨지 말고, 이 땅에서부터 안식을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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