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선한 일에 전념하기 위해(디도서3:1-11) | 이정식 | 2020-02-28 | |||
|
|||||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뜻은 선한 일에 전념하고 선한 일을 이루는 당신의 백성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원받고 교회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생활 현장에서도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 하면 디도서 1장 1-3절을 읽어드리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1:1b-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는데, 언제부터인가 하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 안에서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이 행실로 나타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이제 어떤 분들은 복음을 오해하거나 복음이 연약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뭘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율법 아닌 율법에 갇혀 삽니다. 대학 들어갈 때까지 그런 삶을 살다보니까 복음을 이해할 때 그런 제약과 갇힌 삶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얽매인 환경에서 건짐을 받는 것도 복음이 맞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뭔가요? 단지 인생의 얽매인 삶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죄악 되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옮기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전통적으로 종교라고 할 때 절에 가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오면 좀 시끄러우니까 스파를 하고, 단전호흡을 하고 하면서 평안을 얻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평안을 얻지 못하고 그런 곳에 가서 평안을 얻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교회는 좀 시끄러운 공동체이긴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뭡니까? 신앙은 뭡니까? 신앙은 시끄러운 곳에 있다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은 싸움인데 무슨 싸움인가. 죄악된 행실을 할 수밖에 없는 나를 건져내시고 나를 씻으시고 새롭게 해주셔서 이제는 선한 일을 위해 열심을 내는 당신의 백성을 삼는 싸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하나님의 능력 Power of God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종종 실패하고, 또 사람의 연약함과 잦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실망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복음은 그런 일에 실망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살기 위해 살았지만, 이제 이 복음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는 힘입니다. 아담은 산 영일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입니다(고전15:45참조). 예수 그리스도 없는 사람은 살기 위해 사는 사람이지만, 예수 모신 사람은 살리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주님의 복음의 능력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착각하지 마시고, 복음이 얼마나 귀한지 교회가 얼마나 귀한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정부에서 예배 모임이나 종교활동을 자제하라고 권면했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디도서 3장 1절에 보면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복종합시다. 하지만 신앙의 모임에 관한 권면은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좀 답답해서 말씀드립니다. 병이 깊어지면 병원 의료진은 흩어지는 게 아니라 더 모입니다. 관공서의 공무원들도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더 모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민들에게 일의 상황과 정부의 지침을 알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군인들은 전쟁이 나면 더욱더 모여서 싸웁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전쟁에 싸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부 관료들이 예배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느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 모임이 동창생들의 모임입니까? 아니면 한 달에 한 번 등산 가는 산악회 모입입니까? 말 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타기로 모이고, 자동차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모이는 동호인들의 모임입니까? 여러분, 교회는 영적인 관공서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는 곳이고, 더욱 문제가 올 때마다 위기가 올 때마다 이곳에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면서 세상에 빛을 비추고 저들을 살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동창생 모임으로 생각하시고, 동호인들의 모임쯤으로 생각하시고 산악회 모임 수준으로 생각하신다면 오지 마세요. 그러나, 위기가 올수록 내가 나라를 지키고 관공서 공무원들이 지칠 때 우리가 뒤에서 격려하는 영적인 관공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필코 교회 오시기 바랍니다. 어떤 마음으로 오시는가 하면 행주산성에서 싸울 때 군인들이 부족하니 행주치마를 두르고 돌을 날랐던 아주머니들의 그 정신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관공서 공무원들이 지쳐 쓰러지면 거기에 들어가서 돕겠다는 정신으로 나오시고, 병원 의사들이 쓰러져 주사 놓을 사람이 없으면 우리가 들어가 주사를 놓겠다는 그런 정신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다 도망갈 때 우리도 도망가고, 다 흩어질 때 우리도 흩어져서는 안 됩니다. 시대의 영혼을 책임지는 교회의 역할을 포기하지 맙시다. 디도서 3장 8절을 봅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여러분, 저는 직업적으로 선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다 아시는 것처럼, 직업적으로 선한 일에 종사한다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도를 세우고 사회를 돌아보고 사람들의 영혼들을 생각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저보다 여러분들의 싸움도 만만치 않은 싸움인 것을 압니다. 제가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연구소에 있으면서 교회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계속 말씀을 주실 때고 신분 상으로는 연구소 연구원이었을 때입니다. 그러니 연구소 일을 하면서 때로는 교회 일을 하게도 되었습니다. 아마 그때 누군가가 ‘왜 연구소에서 연구 일을 하지 않고 교회 일을 하느냐’고 지적했다면 지적받을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일을 잘했다 못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께서 직장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 두 사이에 끼어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직장과 직업 윤리를 갖추며 그 직장이 잘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하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을 이루어가야 하는 싸움을 함께 싸워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선한 싸움이 직업상 선한 일에 종사하는 저보다 약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지금까지도 잘 싸워오셨지만 앞으로도 잘 싸우시기 바랍니다. 디도서 3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에 힘쓰게 할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면 누구나 선한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해 봅시다. 선한 일에 전념하자. 직업적으로 선한 일에 종사하는 사역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선한 일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주님이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신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디도서 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왜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셨느냐. 불법 가운데서 구출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단지 우리가 살기 위한 고민도 적잖이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지만, 어떻게 하면 나를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어떻게 하면 복음으로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과 불법 가운데 살면서도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고, 그 주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전념하는 사람으로 인도할까 하는 이 싸움을 싸우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디도서는 짧은 편지인데도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 목사에게 왜 이렇게 강한 싸움을 부탁하고 있는가 하면 그레데 섬 사람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그 증언이 참되도다”(딛1:12-13a) 이 성경 구절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대학에서 배운 논리학 책에서도 그레다 섬 사람 곧 크레타 섬 사람들에 대한 지문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크레타에 사는 사람이 말하기를 “크레타 섬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말을 믿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크레타 섬에 사는 크레타 사람이 말하기를 “크레타 섬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라고 할 때 이 말을 신빙성 있게 들을 수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바이러스도 창궐하는데 제가 여러분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네요. 아무튼 이 말에 따르면 크레타 섬 사람들은 원래부터 거짓말쟁이이기도 하지만, 사실 교회 때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크레타 섬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세운 사람들에게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서 선한 일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디도서 2장에는 생활 속에 선한 일에 대한 교훈이 나옵니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은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2:2-5) 며 등등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과 상전들에 대한 권면도 나옵니다(딛2:9) 이런 교훈들은 디모데전서에서 나온 말씀과 같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상전과 종, 정부지도자와 성도에 대한 생활의 준칙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당부하는가 하면 복음을 받았다고 하고 자유하다고 하면서 교회에 모이기만 좋아하지, 일상 속에서나 관계 속에 선한 일을 하며 주의 말씀을 빛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밖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 거짓말쟁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이런 신앙을 눈 뜨고 못 보겠으니 디도 목사야, 선을 위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하게 된 것입니다. 투쟁하라. 잘못된 교리, 건전하지 못한 지식을 가진 성도들과 싸우라고 합니다. 디도서 2장 5절 하반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는데, 만일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2장 10절에는 또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2:10)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하느냐. 하나님의 교훈이 우리가 순종할 때 빛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빛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순종하지 않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받게 하는 것입니다. ‘너는 말은 잘하지만 행실은 둔하구나.’ ‘너는 교회 다닌다고 하면 행실이 그러니 너를 보고는 교회 가고 싶지 않다.’ 목사들의 문제는 여러 번 언론에 노출되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여러분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복음이 주는 사랑과 자유만을 노래할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받게 하는 것이고, 복음을 지워버리고 어둡게 만드는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디도 목사에게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목사여 똑바로 사역하라. 뒤로 물러가지 말고, 성도 수 채우려고 애를 쓰지 말고, 성도들 비위에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전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선한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디도서 1장 15절을 봅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라고 했습니다. 누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낼 수 있다고 합니까?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더러운 사람들은 누구냐? 그 다음 16절 상반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1:16a)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인데,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행위로는 실천적으로는 부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더러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깨끗해야 바이러스도 안 달라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깨끗해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과 제가 가만히 생각해볼 때 아직 남아 있는 인간에 대한 불신, 염증, 환멸을 이길 수 있는 복음을 가지고 계신가요? 디도서 3장 3절을 봅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3:3) 사도 바울이 자기 스스로를 향해 하는 말입니다. 또한 디도 목사도 구원받기 전에 그런 상태였다고 말하고 있고, 여기 구원받은 우리도 전에 이런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지금 생각해봐도 ‘나 좀 괜찮은 사람이었는데’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 모두가 존재 자체가 더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살고자 하는 일에는 민첩했지만,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일에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럽고 부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런 우리에게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딛3:4) 그렇게 죄악에 팔린 사람이었고 더러운 사람이었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15) 여기서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고 고백할 때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든 부패하고 더러운 마음을 씻어내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셔서 다시 지음을 받았습니다. 선을 위한 민첩함이 조금도 없던 우리가 이제는 연약하지만 선을 위해 전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지어졌고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 이 땅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씻음과 다시 살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울 수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속이는 거짓선생들이 있어서 선한 싸움을 계속 싸우지 못하게 하며, 값싼 복음과 천한 사랑만을 노래하기에 이전의 부패한 행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을 사도 바울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디도 목사에게 강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의 성도들에게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도록 독려하라. 그렇게 목회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이는 저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속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배우고 익혔으니,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에게 가서 돕고 그에게 회개치 못한 행실이 있다면 권면하고 세워서 주의 공동체가 힘있게 선을 위해 전심전력하도록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여러분과 제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후에 집으로 돌아가 한 주간 동안 생활할 때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를 어떤 곳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되었든지 상관하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양심에 비추어서 주의 말씀을 빛나게 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디도서 3장 10-11절을 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3:10-11) 신천지는 정말 나쁜 신앙입니다.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도 나쁘지만, 교리적으로 나쁩니다. 스스로를 재림주라고 하는 것도 나쁜 이단의 표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참된 구원을 받고 선한 일을 이루도록 전념하여 애를 써야할 사람들에게, 너무도 쉽게 구원의 책 생명의 책에 당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거짓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악한 집단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이 힘드시죠?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피곤한데 교회 성도들과 또 관계를 맺으며, 잘 살아야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모르겠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정상적인 삶입니다. 자라나는 학생들이 시험에서 해방되는 것 정도의 얄팍한 복음을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에 당신의 이름이 속해있다면 수료증을 줍니다. 당신은 영원히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갈을 쳐도 유분수요 복음을 오해해도 아주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왜 이런 거짓복음에 미혹되겠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가진 복음이 명확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하나 복음을 위한 선한 싸움이 아주 오랜 싸움이고, 똑부러지게 ‘이거다!’하고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헛갈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고자 하는 싸움과 살리고자 하는 싸움, 이 땅에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민첩함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 민첩함은 자주자주 충돌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도 종종 헛갈려 합니다. 여전히 이 둘이 충돌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빨리 벗어버리고 싶은 사람, 선한 싸움과 진리의 진보를 계속 이루어가야 할 것인데 그저 천국에 있는 듯이 살고 싶은 사람들이 이단의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너무도 놀라워, 여러분과 저를 이 두 싸움에 끼어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삶에서조차 무너져가면서도 오늘도 내일도 이 선한 싸움을 계속 살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열망이 계속되는 한, 처음부터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해주시는 한,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이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선한 싸움에서 하나씩 둘씩 이겨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하며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끝으로 한 사례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신약에 보면 예수님께서 칭찬한 몇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성전세를 내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성전을 충분히 섬길 만큼 많은 액수로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두 렙돈이라는 작은 돈을 드린 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는 두 렙돈을 드렸지만,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막12:44)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흡족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 헌금 많이 하시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더러운 자에게서 깨끗한 자로, 불법한 자에서 선을 위한 자로 옮긴 이 은혜에 대해서는 나의 전부를 드림으로 반응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씀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냈구나 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합당히 행하였다라고 하십니다. 그런 합당한 행실을 보고 주님의 마음이 흡족하셨습니다. 물론 부모는 자녀에게 100을 주고 자녀들이 1만 생각해줘도 부모들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전부를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주님을 고백할 때 주님은 흡족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한 일에 전념하라고 하시니까 부담스러우시죠? 살아갈 일도 무척 힘든데, 살릴 일을 생각하라니 얼마나 부담스러우십니까?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선한 일에 전념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 합당한 반응이구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흠향하실 합당한 행실이구나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마음에 꽂아두시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얼굴로 바라보기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나를 흡족히 여기시는 눈빛을 보기 원하지 않으십니까? 저도 미약합니다. 연약한 게 너무나 많습니다.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 행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선한 일에 전심전력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받으시고, 그렇게 할 힘이 없거든 주님 앞에 간구하면서 나아가실 수 있기 원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이 교회를 높이 들어서 세상에 주님의 빛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