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사랑이 삶 속에 이루어지려면(디모데전서) | 이정식 | 2020-02-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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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먼저 한 영상을 소개할까 합니다. 이 영상의 주인공은 당시 27세였으니 지금은 아마 29세일 것입니다. 럭스로보라는 스타트업 회사를 창업해서 지금은 1천 억 가치를 가진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졸업하는 학생들 중에 나는 돈 많이 벌 거야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10분 정도 되는 영상이니 관심있는 분들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친구가 실패를 여러 번 했습니다. 6번의 실패를 했습니다. 그것도 기획이 다른 제품을 만들고 실패했습니다. 2년 전 우리 교회에서 전기가 들어오는 화분 선물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런 아이디어도 여섯 번의 실패 중에 하나입니다. 시장 조사를 잘 못해서 실패했습니다. 또 건축 자재로 유리를 많이 쓰는데 다른 색깔의 빛이 들어오는 유리를 만들면 좋겠다고 해서 만들었는데, 특허 신청을 하려고 했더니 일주일 전에 미국 회사에서 이미 특허를 내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때로는 유통을 몰라서 실패하고, 때로는 대기업과의 협업을 몰라서, 또 시장조사를 잘못해서, 시장의 세그먼트(영역)를 몰라서, 판매망을 몰라서 실패했습니다. 여섯 번 실패를 했으니 자본금을 많이 까먹었을 것입니다. ‘대학원에나 갈까’ 하고 포기하려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아이템이 처음 생각했던 교육용 로봇이었습니다. 이 제품의 타겟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저렴해야 하고, 둘째는 교육적인 효과가 있어야 하며, 셋째는 제품의 퀄리티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제품을 만든 후 영국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2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곧바로 영국으로 날아가서 만났습니다. 또 현지에 가서 다시 메일을 보내면서 ‘지금 여기 왔으니 와보라’고 해서 5개 회사 사람들을 만나고, 메일에 응답하지 않은 회사들에게도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며칠 만에 ‘한국에서 어떤 미친 놈 하나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최종적으로 한 기업에서 그 아이디어와 제품을 구매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제품을 판매하려고 하는데, 잘못된 버그가 380개나 발견이 되었습니다. 밤새워 수정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판매 며칠 전에 또 심각한 버그가 발견되었습니다. 고민하다가 곧장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날아갔습니다. 해당 기업에 가서는 사정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380개의 버그를 수정했다. 그런데 심각한 에러가 나서 한 달만 말미를 준다면 반드시 고쳐서 완성해놓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에서 계약이 한 달 연기가 된다면 손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영국 회사 사장은 웃으며 허락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네가 처음 우리 회사를 찾아왔을 때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뭔가를 반드시 해낼 눈빛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제품이 대박이 나서 현재는 50명의 직원들이 근무하는 스타트업 회사가 되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레고를 조립하듯이 로봇을 배우는 좋은 도구가 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랑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려면”입니다.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좀 전에 소개한 이 친구의 이야기와 같은 궤로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1:5) 지난 주에 여러분들에게 문자로 보내드렸습니다만, 한국어는 중요한 말이 맨 끝에 나옵니다. 너무 뒤에 나오면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 구절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사랑이니, 이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선물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주셔서 우리를 성도로 세우신 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은 사랑인데, 이 사랑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한 기업을 이루기 위해서 영국에서 들은 말은 ‘한국에서 어떤 미친 놈이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또 위기의 순간 많은 에러를 바로잡기 위한 시간을 달라고 했을 때 그 요청이 허락된 이유는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디에 중심을 두고 할 것인가, 또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눈빛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면 사랑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사랑이고, 하나님 말씀을 배우며 가르치는 목적도 사랑이고,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가는 목적도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에 미쳐가야 하겠습니다. 사랑에 미친다는 말은, 사랑을 이루려고 하다가 여러 번 실패하고 낙망하지만 다시 일어나 사랑을 이루려고 할 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저 젊은 친구는 창업 과정에서 여섯 번 실패했습니다. 오늘 디모데전서의 말씀 전체를 사랑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방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디모데전서 1장 7절부터 보면, 사랑을 이루려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7) 또한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딤전1:8참조). 하지만 율법은 불법한 자와 범죄하는 자들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이루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1:9)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정한 것이지, 사랑을 이루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시청 민원실에 공식적으로 민원을 넣기 위해서 가보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공무원들을 대합니다. 특별히 행정을 보는 분들을 봅니다. 가서 보니까 표정은 과연 공무원의 표정이었습니다. 저에게 말을 할 때는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제가 느낀 점은 혹시 불친절하게 대하면 다른 사람들이 민원을 넣으러 왔다가 그 사람이 민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불친절하다는 말을 안 들을 수준에서 친절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으면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똑같은 모습으로 일할 것 같습니다.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이상한 민원을 넣기도 합니다. 제가 간 그날도 이상한 민원이 들어왔던지 같이 일하는 옆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참~”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합당한 민원, 이상한 민원을 처리하면서 어떻게 항상 모두에게 친절할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불친절하지 않는 정도의 수준에서 일하는 모습 속에서 사랑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 사도가 디모데 목사에게 쓴 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사랑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 두 번째로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딤전1:18-19a)고 합니다. 디모데목사 잘 되라고 하는 권면이 아니라, 디모데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 공동체 전체에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는 권면입니다. 이런 이유로 목사에게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했습니다. 교회는 유기체입니다. 서로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사랑에 낙망하고 옳지 못한 행실을 하면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던 사랑은 급속도로 식어질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람이 바로 목회하는 목사입니다. 개인적으로 목회자가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자기 실망감에 갇혀 믿음을 굳게 붙들지 못하거나 착한 양심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면 교회공동체 전체의 사랑의 수준은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제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목회적인 번민 때문에 사랑이 식어진다면,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분별의 영이 있는 분은 저를 붙들어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세 번째로 교회 안에 사랑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바울이 권면합니다. “남자들은 거룩한 손을 들어서 기도할 것이며, 여자들은 정절로써 선행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장하라”(딤전2:8-10참조)고 권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에게 대장부처럼 믿음을 가지라고 권하는 것 옳습니다. 여자들에게도 대장부처럼 믿음을 가지라고 권하는 것 합당합니다. 동시에 자매님들에게는 하나 더 부탁하기를 선행으로써, 정절로써 자기 자신을 꾸미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선한 행실과 절제와 사랑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단장하라고 합니다.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로 오후 2시만 되면 질병관리본부 본부장이 나와서 브리핑을 합니다. 이 여자분이 침착한 모습으로 조근조근 브리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여러 신문에 칭찬이 자자합니다. 국민들의 마음이 동요될 수 있고 괜한 공포심이 번질 수 있을 때에, 사실에 기초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 안심이 됩니다. 아름답기를 사모하는 것은 모든 자매님들의 소망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억합시다. 우리가 언제 아름다운가. 하나님이 주신 성품을 따라 단정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볼 때 그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성도님들이 벤츠나 BMW 같은 고급승용차를 모시는 분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비똥, 구찌, 샤넬 같은 유명 브랜드를 사용하는 분들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로 나 자신을 가꾸기보다는 내 속에 있는 인내와 절제가 내 표정과 내 얼굴과 내 목소리에 드러나기까지 수고하며 가꾸는 그 사람을 보면 우리 안에 사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행실로 자기 자신을 단장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저렇게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겉으로 꾸미는 외모 때문에 시험 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참 신기한 것입니다. 사랑은 있다가도 없는 것 같고 없다가도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실 천성적으로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자녀입니다. 생각해보면, 부모는 자녀가 응애 하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원히 자녀와 사랑에 빠집니다. 밀당이 필요없는 사랑이죠.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들어서 알기는 해도 피부에 와닿지 않습니다. 조금 알 뿐입니다. 저 역시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후에야 ‘날,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하고 느끼며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 외의 모든 사랑은 만들어가야 할 사랑이며 이루어가야 할 사랑이고 형성해가야 할 사랑입니다. 네 번째로 교회 안에 사랑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디모데전서 3장에 교회의 직분과 질서를 따라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감독과 집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목사가 되어야 하는가.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딤전3:2-4)라야 합니다. 어떤 목사가 말씀을 아주 은혜롭게 잘 전한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집에 가보니까 가정 안에서 잘 못하는 모습을 본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교회 안에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황금의 입이라 할 만큼 잘하는 설교는 ‘단지 입에 말일 뿐이구나.’ 하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은 저만큼 뒤로 물러가버릴 것입니다. 목사만 아니라 교회의 또 다른 직분인 집사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라야 할지니”(딤전3:8-9)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많은 말씀을 보고 있지만,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 저는 너무 많은 말씀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예민한 것이고 민감한 것입니다. 어느 한 군데가 잘못되면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사랑도 쉽게 사그러질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온전해지기 위해서 교회 안에 세워진 직분자들이 자기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여러 성도님들의 사랑이 일어난다고 해도 세워진 집사님들이 온전하지 않게 행동한다면 그 사랑이 온전하게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있던 사랑도 무너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에 미치기로 작정하려고 하는 겁니까? 사랑에 미치기로 작정하고자 하는 눈빛을 발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 목사에게 하나 더 권면합니다. “누구든지 내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네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2-13,15) 사도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몇몇 지역의 목회를 맡겨놓고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연장자인 사도 바울이 목회할 때하고 젊은 디모데 목사가 목회할 때하고 교회가 받아들이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인생의 연륜이 짧기도 하고 말씀의 진보도 이제 이루어가고 있기 때문에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진보를 이루어야 할 젊은 목사가 어떤 이유로 그런 진보를 이루는 데 힘쓰지 않는다면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겠고, 또 그 때문에 사랑이 식어질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는 또한 젊은 목사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동일한 권면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으로만 서로를 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의 진보를 서로 이루어갈 때, 곧 말씀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진보해갈 때 그 말씀 안에 있는 사랑이 교회에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로 교회 안에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참 과부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딤전5:5) 그렇지 않고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6) 우리가 이렇게 한데 모여 사랑을 주고받을 때는 있는 것 같은 사랑이지만, 이제 집으로 돌아가 홀로 있을 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랑이 뭐냐, 어디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민감한 것입니다. 참 과부에게는 젊은 자매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디모데전서는 목회서신이니 다시 목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목사가 잘못하면 두세 증인을 세워서 고발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5:19) 예수님이 너무 사랑하셨던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고 말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고 꾸짖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사랑하고 저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고발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어떤 잘못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처럼 인가 하면 다윗처럼 말입니다. 범죄하고도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2-3년을 그냥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목사가 잘못될 때에는 이 교회를 선물하신 주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그를 고발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단들이 와서 괜히 고발하여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신실한 두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목사에 대한 고발 이전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는 말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을 배나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신실한 목사를 배나 존경해야 합니다. 다만 잘못될 경우에는 책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리와 자격이 성도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하면 하나님이 교회에 선물하신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리더십이 행해져도 ‘하나님이 하시겠지, 하나님이 다루시겠지’ 합니다. 조금 생각을 바꿔봅시다. 교회가 시끄러운 것 자체를 싫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시끄러운 것 딱 질색입니다. 하지만 죄를 끌어안고 회개도 않으면서 조용히 있는 것보다 시끄러운 게 훨씬 났습니다. 부부도 싸움을 합니다. 시끄러운 거 질색인데 왜 싸웁니까? 사랑이 온전케 되기 위해서 싸웁니다. 싸우는 것은 과정이요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도 이런 법도가 옳게 세워져야 합니다. 인정이 많은 우리들은 이 부분이 좀 약합니다. 면전에서 서로 책망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많이 약합니다. 서로 꾸지람하는 일에 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로 작정한다면 우리는 이런 모습을 행할 수 있도록 품어야 하겠습니다. 쉬쉬하고 귓속말로 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이 강건해지도록 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로 교회에 사랑을 이루기 위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올무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9-10a) 우리는 모두 부하고 싶습니다. 좀 더 가지고 싶고 여유로운 삶을 살기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바램입니다. 그런 정상적인 마음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라, 과도하게 욕심을 내어 부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주는 일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과도히 부하려고 하면 성도들간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동창생이 30년 만에 연락이 왔다. 별로 기대할 만한 전화가 아닙니다. 20년 만에 전화가 왔다. 그것도 별로 기대할 만한 전화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친구 관계나 지인의 관계를 끊어지게 하고도 아무런 도덕적인 문제를 느끼지 않도록 하는 사회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면 오히려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실인가. 사람들 간의 관계를 깨뜨리는 일이 세상을 얼마나 우울하게 바라보게 하는 일입니까? 선한 사업에 부하기 위해서, 때로 나누어줄 일이 있을까 하고 전화해야 합니다. 자기가 부하고자 하면 사람들의 관계를 깨뜨리면서까지 행하게 됩니다. 될 수 있으면 교회 안에서는 경제적인 관계를 맺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기업이 요구한다고 해서 한 인간에 대한 존중을 벗어나는 범위까지 행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사이에 세상에 있는 사랑을 덜어내는 행동이며, 지워버리는 행위가 될 뿐입니다. 내게 유익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사랑을 해칠 수 있는 여러 가지 측면들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여러 말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미치고자,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데 작정되어 있지 않다면 작은 실패들과 잘못을 겪으면서 사랑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사랑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저 젊은 기업가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리고 오늘 디모데전서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뭐니? 사랑이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목적은 뭐니? 사랑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뭐니? 사랑이니! 교회를 세워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목적은 뭐니? 사랑이니! 이 사랑을 잃고는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허물어뜨리고 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오늘 졸업하는 친구들이 여기 있습니다. 사랑은 이벤트가 아닙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가운데 사랑이 만들어집니다. 내 삶에 성실한 그 성실 속에서 사랑이 만들어집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1:12-14) 이 말씀으로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너무 늦은 나이에 교회에 나왔다고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에 이미 우리가 사랑을 이룰 여러 가지를 준비시켜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충성을 한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가두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알지 못하고 행한 그 못된 행실 속에서 충성을 보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이력을 가졌든지 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사랑을 이루어가는 일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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