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고난과 시련 중에 전진하기(벧전4:7-19) | 이정식 | 2020-02-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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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축복입니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처럼 들려요. 고난은 축복은 아니고, 축복이 됩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어려움은 막상 현재 겪을 때에는 아무런 해석도 목적도 다른 사람의 설명도 필요없어요. 정말 고난 가운데 부딪치게 되면 심지어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고난이 정말 불같을 때에는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고, 어떤 설명도 설명이 되지 못하고, 어떤 철학도 하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말씀드렸듯이 뛰어난 교수들이 막상 정부의 관료가 되고 나면 별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가는 삶의 모든 버팅기는 힘과 모든 이해관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수는 자기 전공 영역에서만 교수요, 철학자도 자기가 골똘히 생각하는 영역에서만 철학자입니다. 그래서 40이 되고 50이 되고 세상 살다 보면 ‘과연 무능하구나’ 알게 됩니다. 심지어는 목사님도 무능하구나 알게 됩니다. 어떤 때에 그런가요? 여러분과 나의 고난이 불 같을 때, 여러분과 제가 겪는 이 어려움이 ‘정말 세상 천지에 나밖에는 없다’고 생각될 그런 시간 속에 우리가 던져질 때 그렇습니다. 이때에는 고난밖에 없습니다. 아픔밖에는 없습니다. 괴로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축복인 것입니다. 그 고난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고난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난은 반드시 축복이 됩니다. 오늘 베드로전서는 사도들도 곧 고난을 당하게 되고, 로마 네로 황제의 핍박을 통해서 사도 바울도, 사도 베드로도 순교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비단 죽음을 앞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도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도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쓴 편지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 사도는 편지하기를 “고난 받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에는 ‘고난’이라는 말이 11번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선할 일을 하면서 너희 영혼을 주께 맡기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을 넘어 “불같은 시험”이라고도 했습니다. 또한 까닭 없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고난 곧, 애매히 당하는 고난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세상 속에서 당하는 고난도 있고, 또 성도들 사이에서 겪는 어려움도 있고, 목사님들끼리 서로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명도 안 되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귀한 말씀으로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14절 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고난 밖에 없고, 나밖에는 없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도 묵묵히 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요?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는 것입니다. 평강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고난은 없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상처가 나면 피부가 빨개집니다. 왜 빨개지는지 아시죠? 상처가 생겼다는 말은 균이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자정능력,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몸에 들어온 균과 싸우기 위해 피가 많이 몰리고, 그 피 속에 균과 싸우는 백혈구가 열심히 싸웁니다. 그 균을 이기기 위해 집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어떤 괴로움과 고난이 있을 때 온 마음과 영을 다해 집중해서 이기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도 여러분과 저와 함께 계시면서 바로 나를 집중하십니다. 나와 함께 고난당하시고 나의 눈물과 함께 하십니다.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고 할 그때에 주님이 정말 강력하고도 집중적으로 나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속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습니까?’ 물론 고난의 초기에는 말씀으로도 위로해줍니다.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격려와 위로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앙상히 나만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맹렬하고도 집중적으로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날에는 하나님이 왜 좋으신 분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지식도 공부를 하다보면 전혀 따로 놀던 지식들이 한 군데로 모이고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다른 목적, 다른 이유, 다른 전공 속에서 다루어지던 지식이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때에 희열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는 어떨 때 희열을 느낄까요? 똑같습니다. 우리도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이나 사도 바울이 한 말이나 다른 장면에서 한 말인데, 계속 공부하다 보면 어느 날 어느 순간 말씀들이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씀들이 다 나의 영혼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빌립보서에 뭐라고 했나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3-4) 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습니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라야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존중히 여기며 존경할 만한 분이 계시지만, 내가 겪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가 나보다 남이 낫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은 각자에게 별개의 고난과 별개의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집중적으로 계시고 그분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분과 동일한 고난이나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먼저 겪은 그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당한 어려움과 고난과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에게는 바로 제가 가장 분명한 대응책이요 해답이 됩니다. 하지만 저보다 더 심한 고난과 시련을 겪는 사람에게 저는 아무런 답이 못됩니다. 제가 목사로서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답이 된다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하나도 유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는다면 답이 되고 위로가 되겠지만, 저의 권면은 전혀 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사실입니다. 1백 명을 목회하든 1백만 명을 목회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겪은 고난과 시련에 대해서만 가장 힘 있게 말씀할 수 있고 위로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 지금 누구보다도 힘들게 겪고 있는 고난이 있다고 생각하시죠? 그 고난은 누구를 위해서인가 하면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고,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그런 고난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언젠가 여러분이 해답이 되시고, 여러분이 격려자가 되시고, 여러분이 목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입니다. 이는 놀라운 것입니다. 이 일에는 어떤 사람도 침범할 수 없고 간섭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목사인 저도 여러분의 삶에 간섭할 수 없어요. 목사는 여러분의 삶에 간섭하기 위해 여기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똑같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고자, 여러분의 영혼과 고난이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서 ‘주님 나에게 왜 이러십니까’ 하고 불평도 하고 항변도 하면서 그 일을 감당해 낼 때, 주님이 친히 여러분과 저를 대면하시고 다루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실 것을 안내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다 선생이요 목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위로자요 권면자인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따라 여러분과 저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나이의 분량을 따라,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한 분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겠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돈 잘 벌어서 관리직이 되어 잘 사실 분이었습니다. 목사 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분 마음을 역사해서 일을 그만두게 하였고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목사가 되게 하셨으면 목회가 잘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 수 년이 지난 지금도 목회가 힘듭니다. 빚도 생기고 카드도 써야 했습니다. 애들도 많이 낳았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아이 낳는 것을 장려해왔기 때문에 많이 낳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여럿을 낳았습니다. 돈이 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님이 평생 농사를 지으셔서 땅 얼마간을 사셨는데, 두 아들에게 땅을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둘째는 이런저런 일 때문에 그 땅을 벌써 다 팔았습니다. 큰아들인 이 목사님이 저에게 하는 말이 눈이 자꾸 그리 가더라는 겁니다. 팔아먹겠다는 말이 아니라 눈길이 자꾸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상태입니다. 저도 서울에 살던 언젠가 돈이 궁할 때 종로 어딘가에 있던 햄버거 파는 집에 알바를 구하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집안의 가장이니까 어떻게 해결은 해야겠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말씀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항상 설교하고 도전하면서도 이런 내 모습을 바라보게 하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한두 번도 아니라 계속 반복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덧붙여 하는 말이 “이런 생각이 반복은 됩니다. 여전히 눈길은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여기 두시고 이런 모습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또 자꾸만 내 마음을 들추어내는 데는 뜻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주님이 되시고 나는 다만 내가 되며,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가르쳐주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말을 듣다 보면 그 땅을 팔까 안 팔까가 궁금해집니다. 지금까지도 안 팔았고 앞으로도 안 팔 건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이거 지금 급한 데 쓸려고 손대는 순간 하나님이 훅 불어서 날아가 버리게 하실 것 같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정도의 깨달음과 두려움은 있지요. 그래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궁한 처지, 남들처럼 흥왕케 되지 않은 목회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목사님에게서 배웁니다. 존경합니다. 제가 연합회 일을 하면서 이런 목사님 저런 목사님을 만납니다. 대형교회 목사님도 만나고 개척교회 목사님도 만납니다. 그런데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만나면 하등 영적인 도전을 받지 않습니다. 오는 수요일에도 이와 관련된 말씀을 볼 것입니다. 잘 되어 있으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의 지혜 경영의 지혜는 있지만, 한 사람이 맞닥뜨리는 삶과 인생에서 주는 지혜에 대해서는 귀가 막힙니다. 누가 참된 지혜자냐? 하나님이 주시는 액면그대로의 고난과 시련 가운데 그대로 거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만히, 답이 없는 채로 기다리며 수고하는 동안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계심을 알게 해주시는 데서 삶의 지혜를 얻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래서 그분 목사님과 교제할 때마다 마음이 뻥뚫립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들에게 고난을 영접하고 고난을 맞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베드로 사도가 여러분과 저에게 주는 고난은 인생에서 받는 고난과 별개로 거룩한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받는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전서에서 말하고 있는 고난은 성도로서 새롭게 살아가는 신앙적인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생의 고난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여러 가지 실제적인 권면을 합니다. 국가와 제도를 순종하라고 합니다. 조금 있으면 국가가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죽일 텐데도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대통령이 누가 되었든지 순종하라는 말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정하셨다면 그 제도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성도와 이웃에 대해서는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상전과 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난리입니다. 시청도 구청도 예방과 방역 업무로 아주 분주합니다. 일산 지역이 아닌 덕양 지역에서 목회하시는 분이 너무도 정이 많고 봉사정신이 투철하셔서 명지병원, 시청에 떡으로 위로했습니다. 들어보니까 어디는 구청장이 한 달 동안 집에 못 들어갔다고도 합니다. 잘했습니다. 보통 때에 우리는 하기 좋은 말로 공무원은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이런 비상시국에 누가 일하겠습니까? 바로 그분들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몇몇 교회의 협찬을 받아서 떡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당신의 구역이 아닌 일산서구청과 동구청에도 떡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과했다 싶었습니다. 격려한 일은 선한 일이 맞지만, 그렇게 하려면 일산 지역 연합회 회장과 사전에 상의를 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인정을 받지만, 여기 사람들은 바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제가 아무래도 말을 낼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비방하지 말아야죠? 법에 맞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면 반드시 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저보다 십 수 년 더 위의 목사님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시기 전에 협조와 양해를 구했으면 더 덕스러울 것 같습니다.’하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랬습니다.’하고 답이 왔습니다. 사실 하나 하나에 주목합시다. 나와 직접 관계된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방하거나 비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를 아예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비방과 오해가 쌓여서 서로 업신여길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삶의 태도를 너무 늦게 배웠습니다. 저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는 한참 참다가 억울함을 이야기하고 직접 이야기하기 민망하니까 때로 비방도 하다가 합니다. 이제 50을 넘어서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비방할 것, 결국은 돌려 말할 일, 결국은 말을 내게 될 일이라면 정공법으로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뜨겁게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싫어하거나 미워하기 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물으면 됩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실관계와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을 말했을 때 상대가 이상하게 반응한다면 그때는 전쟁입니다. 하지만 합당한 대접을 받으면 문제가 소멸됩니다. 회사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다면 상사에게 찍힐 수도 있겠습니다. 직장생활 하시는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처음 들을 때는 기분 나쁠 수 있지만, 나중에는 고마워하고 나중에는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도간의 교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몸된 교회를 세우다가 어떤 고난을 당할 때 그때에도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와 성도 간에 주님 일을 하다가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말 못할 고민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다 그래, 인간은 어쩔 수 없어’하고 결론내리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문제는 예수님이 재림하셔도 안 돼!’라고 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절망이나 낙담에 부딪치면 마음이 떨어집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씀에 주목해보겠습니다. 제가 가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읽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씀도 그런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보통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셔서 내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라고 읽습니다. 내가 좀 더 거룩해져야지 합니다. 내가 항상 거룩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본 뜻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대하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대하라. 여러분과 제가 인생을 살면서, 성도 간에 교제하면서 많이 실망하고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거듭났다고 하는데 구원받은 사람도 이 정도인가. 역시 사람의 성격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변하는구나’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런 고백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구별된 신성한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세상으로부터 더렵혀지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서나 이루어질 말씀이라고 여기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우리 수준으로 낮추는 것은 주님을 끌어내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말씀일 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서부터 오염되거나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것은 겁주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성도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어떤 사람의 부패와 실패에도 전형 영향받지 않으며 항상 계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요청하시는 예수님을 멸시한다면 그만큼 고생하는 곳이 지옥 형벌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정당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주의 말씀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항변할지 모릅니다. ‘내가 그랬습니까. 함께 믿는 다른 성도들 때문에 그랬습니다. 목사님들 때문에 그랬습니다. 교회 때문에 그랬습니다. 나 혼자 생각한 게 아닙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향받았을 뿐입니다. 나도 정말 잘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누구 누구 누구 때문에, 인간의 한계 때문에, 에덴 이후 인류 역사를 보더라도 뻔한 이치라는 생각이 들어 그랬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가서도 이렇게 항변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고, 내가 내 말씀을 거룩하게 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거룩함도 항상 동일하시니, 왜 너는 나의 거룩함을 받지 않고 사람을 따라 세상을 따라 생각했느냐고 되묻지 않으실까요? 왜 네 생각대로 사람들을 따라 이 세상을 따라 인생의 한계를 긋고, 교회의 한계를 긋고, 말씀을 말씀대로 받기를 거절했느냐 되묻지 않으실까요? 베드로전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 삶 중에 허락하시는 고난은 축복이 된다는 것,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간섭하실 수 없으며, 그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성도로서 주님 앞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무수한 말씀으로 권면하고 계신데, 이 모든 말씀은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실패 어떤 낙담 어떤 절망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하나님 말씀의 거룩함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순종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전진해가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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