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발을 닦아 주는 사람 (요 13장, 21장) | 이형주 | 2020-02-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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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 13:1-7 (본문전체 13장, 21장) 발을 닦아주는 사람 발은 특별히 못나거나 창피한 부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꾸며놓고 자랑하고 싶은 부위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신체 중에 발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면서 현실적인 곳이 아닌 가 생각했습니다. 발은 누구나 평범하잖아요. 우리는 어린 자녀를 씻겨주는 일 외에 살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줄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활하셨던 1세기의 유대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닦아 주는 일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샌들을 신고, 흙먼지가 가득한 길을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집안에 들어오면 가정 먼저 발을 닦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다만, 자신이 닦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종들이 닦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것은 너무나 평범하고, 인간적인 일이었고, 동시에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발을 닦는 행동”에는 인간적이고, 겸손한 것 그 이상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발을 닦아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서로 발을 닦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누군가의 발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시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자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맨 먼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다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자신의 힘이 닿는 한계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의 분명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정말로 친밀하고 다정하게 발을 닦아 주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왜 그런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신자, 보는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전부다 도망가 버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뽀득 뽀득 닦아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와 베드로를 포함 한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 일을 통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 무엇인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본을 영어로 하면, “패턴”입니다. 예수님은 발을 닦아주시는 것을 통해 제자들에게 하나의 패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서로 발을 닦아 주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만나는 족족 양말부터 벗겨서 발을 씻겨주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 패턴대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패턴, 곧 본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발을 닦아주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 속에는 당연히 용서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발을 닦아주는 일을 보여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용서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굳이 일일이 “너희가 이런이런 놈들이지만 내가 용서할게 이리 와서 발 닦자” 이렇게 안하셨습니다. 그냥 발을 닦아 주시는 겁니다. 그냥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겁니다. 이미 그 속에 용서가 담긴 겁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나타나셔서 일일이 “내가 용서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냥 밥을 지어주십니다. 이미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의 행위 속에 용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 닦는 것을 통해 보여주시고, 요청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배신자, 실망스러운 사람들, 원수 같은 인간들이라도 그들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생색내지도 말고, 용서한다고 드러내지도 않는 그런 사랑을 하라”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향해 사랑에 대하여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도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새로운 말씀, 새로운 계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새로운 모범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모범이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예수님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제자들과 3년을 동고동락하시며, 몸소 보여주셨던 그것을 지금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면서 하나의 패턴으로 설명해주신 겁니다. 그것을 아주 단순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용서와 섬김”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와 섬김의 완성, 끝판 왕이 바로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통해 미리 기념하셨고, 이제 곧 실제 순종하심으로 보여 주실 가장 완전한 사랑, 친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바로 그 사랑을 받아 누리고, 그 사랑으로 그 사랑처럼 가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용서와 섬김, 그리고 자기희생의 단계까지 나아 갈 수 있는 비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사랑하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한 놈은 돈 몇 푼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나머지는 깡그리 도망갔습니다. 괜히 얼쩡거리다가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발 닦여서 잘 먹여 놓았더니 돌아오는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끝까지 하는 사랑의 결과는 그랬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를 보고,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도 그런 실패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너무나 연약하고, 우리의 의지라는 것이 너무나 무력하게 꺾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이 너무 갑작스럽고, 부담스러워서 그 사랑을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혹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사랑을 하자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계속 “네, 예수님 제가 사랑은 모르겠고요, 그저 열심히 예수님가신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하고 의욕을 앞세울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이 결국은 실패하지요. 그럴 때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요청은 아주 간단합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 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먼저 받으라는 겁니다. 일단 예수님이 주시는 일방적인 용서와 섬김과 자기희생의 그 사랑을 받으라는 겁니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예수님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후 5:19에서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화목하게 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는 것이고,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이고 싸늘히 식은 열정에 다시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한다는 것은 고집 부리는 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져 그만 집으로 돌아오라고 타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온갖 고초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완벽한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럴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사랑을 받는 것이 어쩌면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신뢰받는 것을 더 어려워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달아난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시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달아난 베드로는 다시 고기잡이를 하러 고향으로 내려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들렸고, 제자들 앞에 두 번이나 나타나셨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고기잡이나 하러 다시 고향에 내려 갈 수가 있습니까? 베드로가 지금 왜 이러는 걸까요? 베드로는 지금 자기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조차 베드로에게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용서하실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절대로 스스로를 용서 못하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베드로와 같은 마음이 있으신 분 있으신가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실망해서 스스로를 원망하고,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기도 다짐하신 분이 있으신가요?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치유하시는지 보십시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하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이신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키신 대로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잡힙니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하는 순간,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직감합니다. 그들이 맨 처음 고향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똑같은 장면이 재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베드로는 베드로답게 또 “예수님!”하면서, 바다 속으로 뛰어듭니다. 볼 낯이 없어서 도망쳐왔지만, 예수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렇게 좋았던 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예수님께 다가가는데, 예수님이 뭔가를 준비하셨습니다. 육지에 숯불을 피우시고는 그 위에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그 장소에서 숯불 가까이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워 놓은 그 숯 때문에, 그날의 향기가 다시 진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베드로는 감당 할 수 없는 기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께서 이제 입을 떼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을까요?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외치던 소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예수님 안 버립니다!” 베드로는 비록,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쳤지만, 그 외침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소심하게 대답합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똑같은 질문을 두 번 더 반복하시면서, 총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베드로는 예수님과 용서에 관한 대화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하고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당시에는 랍비들의 논의에 의해 세 번까지 용서해 주는 것이 일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베드로는 나름 용서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칭찬이라도 받을까 하여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였습니다. 그게 몇 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인지는 아마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한정의 용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에 심한 부담감을 가졌을 겁니다. 그런 반응은 당연합니다. 용서란 자신의 몫이라고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받은 사람은 베드로 자신이었습니다. 베드로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이미 삼진아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무한정의 용서는 삼진아웃 당한 베드로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그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리고 그가 용서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가장 야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를 잘 용서하지 못합니다. 나 자신에게 지독한 실망감이 들 때, 또 반복되는 죄의 습관을 끊어내지 못했을 때, 스스로에게 가망 없는 존재라고 낙인을 찍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내가 자꾸 죄를 지으면 예수님은 몇 번이나 더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지요? 저는 이제 정말 끝이지요?” 그럼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더 용서할 수 있다!” 이런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하신 예수 바로 그 예수께서 무한정의 용서로 우리를 깨끗케 해주실 것입니다. 반복되는 실패에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보다 더 나은 자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신 후에, 그저 등을 두드리며, “그래, 지난 일은 잊자, 잊어” 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제 가서 내가 너를 사랑 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도망간 베드로에게 찾아 오셔서, 세 번 부인했던 것처럼,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세 번 고백할 때마다 “가서 내 양을 먹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베드로가 100% 회복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오셔서 숯불 피우시고, 고기 구워 주실 때 이미 용서는 끝났습니다. 누가 원수 같은 놈에게 와서 고기 구워줍니까? 베드로도 예수님이 이미 자신을 용서하신 거, 알고 있었어요. 다만 그 자리에서 뻔뻔하게 예수님이 구워주시는 고기를 집어 먹고 있는 자신이 너무너무 실망스럽고, 한심해서 스스로가 용서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풀 죽어 있지 말고, “가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가서 예수님처럼 길 잃은 많은 사람들의 목자가 되어서 그들을 사랑하라는 요청입니다. 어떻게요!? 방금, 베드로 네가 나에게 사랑을 받은 것처럼, 사랑해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사랑하나요?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나요? 예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먼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맨 입으로 등을 떠미시는 게 아니라, 양 손에 사랑과 용서와 섬김을 가득 쥐어 주시고는 나가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전에 가장 먼저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누군가를 용서하고, 섬기고, 자기희생의 단계까지 나아가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겸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 받은 사람, 사랑을 받은 사람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고, 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 그 사랑, 그 용서, 그 섬김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다면, 느끼고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요청에 응답하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 양을 먹이라”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 “서로 발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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