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히11:8-16) | 이정식 | 2020-0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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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은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고향에 다녀오기도 합니다. 이곳이 고향인 분들도 많으셔서 특별히 움직임이 많지 않지만 그렇습니다. 고향에 가면 부모님이 계십니다. 부모님이 계신 고향은 우리 마음을 평온케 하고 감사하게 합니다. 물론 명절에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스트레스와 어려움도 있지만, 명절에 달려갈 수 있는 곳, 또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틀 동안 많이 쉬셨습니까? 일만 많이 하셨나요? 일도 하시고 쉬시기도 많이 하셨기를 바랍니다. 저는 명절 때마다 못 보던 TV도 보면서 많이 쉽니다. 아직 이틀 더 남은 명절 푹 쉬시고, 일상의 삶의 패턴을 다 내려놓고 2020년 한 해를 시작할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고향이라는 것, 우리가 이 땅에서의 쉴 수 있는 쉼은 잠깐입니다. 그리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고향은 좋기는 한데 고향에 계신 부모님도 이 땅에서 살고 계시는 분입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젊어서 돈을 벌어서 부모님 나이가 되면 부모님처럼 살지는 않고 여행도 다니면서 여유있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그런 삶은 없습니다. 어르신들 보니까 심지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식들도 많고 돈도 많지만 고독하다” 그러면서 “다 소용없다”고 고백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들 동안 항상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안을 만큼 싸움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충분히 사신 어르신들이나 젊은 사람들이나, 세상을 조금씩 배워가는 젊은 사람들이나, 혹은 좀더 원숙하고 세상살이에 익숙해졌다고 하는 어르신들이나 다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는 현실 속에 부딪쳐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실 뿐이지, 부모님 스스로의 삶이 모든 것을 통달해서 여유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우리의 상태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11장 14절에 보면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라고 했고, 또 15절에는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온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서 장년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고향을 찾아서 가려고 했다면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조카 룻도 함께 떠나왔지만 거기에는 친구들도 있고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이 다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난 후로는 그 마음속에 자기가 나온 고향을 찾아가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본향을 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만 놓아버리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어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가수 강산에의 노래 중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처럼”이라는 노래가 있죠. 연어과에 속하는 물고기는 전부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고기 새끼가 눈이 떠지기도 전에 수정란 상태에서 방류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뿌려진 곳을 기억하고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무슨 자기장을 찾아 돌아온다든지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연어과의 물고기도 자기 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본능이 있으니 사람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서는 돌아갈 사람들의 고향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저도 제 고향에 가면 그 동네 그 정겨운 골목들은 다 없어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섰습니다. 지금 교회 근처는 잘 지켜지고 있지만 삽다리쪽 파주 인접 지역만 해도 신도시 건설로 아주 낯선 곳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애매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어린 시절 몇 년 동안 피신해있던 곳은 이집트였고, 어린 시절 자란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성하여 사시던 곳은 가버나움입니다. 고향이라면 평균적으로 어린 시절 3년 이상 살았던 곳을 고향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참 애매한 것이 워낙 자주 이사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요즈음은 대부분 산부인과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니 태어난 곳 출생지만 따지면 대개 병원이어야 하지만, 자란 곳이 중요하기 때문에 3년 이상 산 곳이 고향이 됩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 라고 묻는다면 모릅니다. 베들레헴이기도 하고 나사렛이기도 합니다. 주님 오셨을 때에도 고향이라는 곳이 그리 중요한 곳이 못됩니다. 우리 마음에는 고향이라는 말이 사무쳐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와 언약을 맺으실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16절 보니까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시면서 더 나은 본향, 하나님께 돌아갈 그 본향을 사모하고 계시나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나아가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 확신을 가지고 사셔야 이 땅에 살 동안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계속 보겠습니다. 8절 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8-10) 이 참 신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이 더 나은 본향이라고 했고 또 하늘에 있는 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이 어디냐 하면 사후에 들어갈 천국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예루살렘 성을 바랐다는 말씀입니다. 이 예루살렘 성은 시온에서 말씀이 나오는 곳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이 땅에서의 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세대 목사님들이 강조하셨던 천국이 중요하지만, 이 땅에서 약속하신 더 나은 본향도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 오셨습니까? 이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셨습니까.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계십니까? 그러면 이 교회가 여러분과 저에게 약속하신 더 나은 본향의 그림자요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풍성히 계시기를 힘쓸 때 이곳이 바로 더 나은 본향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받은 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모든 삶을 다스리는 삶을 산다면 이곳이 더 나은 본향입니다. 이곳에서 말씀을 받으시며 주님을 찬송하는 동시에 평일 동안 천국에 사는 모델로 살 때에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이 분리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에 와서 예배는 드리고 있는데, 그 받은 바 말씀이 우리의 생활을 다스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우리의 생계와 생업만을 위해서 산다면 이는 명목만의 본향일 뿐 주님의 약속하신 본향이 못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하늘에 있는 성의 실제적인 모델이었습니다. 교회 역시 하늘에 있는 성의 실제적인 모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그렇습니다. 명절에 배우 최수종에 대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최수종의 어린 시절은 너무도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성실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최수종이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망 없는 상태로 노숙을 하려고 누워있는데, 허름한 옷을 입은 또 다른 노숙인이 다가와서 신문지 몇 장을 덮어주면서 “이거 덮고 자게, 따뜻하다네.” 하고 지나가더랍니다. 그때 최수종이 놀랐습니다. 자기보다 더 허름한 사람이 저분도 노숙하면서 여유가 없고 나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일텐데 어떻게 일면식도 없는 분이 다가와서 저렇게 여유롭게 위해 줄까.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도 저런 마음의 여유를 주세요.” 사실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아닙니다. 별로 유쾌한 영상도 아닙니다. 주위에는 노숙자들이 누워 있고 추운 날입니다. 그분이 준 것도 전기 코드 꽂으면 따뜻해지는 전기요를 준 것도 아니고 열이 펄펄 나는 난로를 준 것도 아닙니다. 단지 신문지 몇 장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여유를 깨달은 것입니다. 지금 내 형편에서는 저런 여유가 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 내 환경 속에서는 이런 여유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최수종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했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게 더 나은 삶인지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얻고 나서 그런 여유가 생길까요? 아닌 거 아시죠? 절대 아닙니다. 내게서 나오는 것으로 여유를 생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여유만이 그런 것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얻으려 했지만 여전히 여유를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내게서부터는 이와 같은 섬김을 창조할 수 없구나. 하나님께서 주셔야 할 뿐만 아니라 나도 그런 삶을 소망할 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2절을 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2-24) 중요한 게 뭐냐 하면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차 나아갈 곳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미 이른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도착한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도착한 곳은 하늘의 교회입니다. 내가 좀 더 가지고 닦으면 좀 더 잘 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앞으로 올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만난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여러분과 저도 이미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최수종의 간단한 고백과 같이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도성에 이르렀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침표를 찍기를 원하십니다. 골로새서 2장 22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하나님은 지금 긍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때마다 일마다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진학할 때는 진학이, 취직할 때는 취직이, 결혼할 때에는 결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수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잠깐 있을 것’이라는 것만 주목하지 ‘사라질 것’이라는 말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는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썩어질 것이고 없어질 것입니다. 돈도 많고 자식도 많지만 고독과 씨름하는 어른들처럼, 뭔가 다음 단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맙시다. 다음 단계에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을 것처럼 유혹되지 맙시다. 여러분과 저의 소망이 이루어지든지 이루어지지 않든지 간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루어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배우 최수종이 노숙할 때 하나님이 계심을 몰랐다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실낱같은 기회였을지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실낱같은 계기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 실낱이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증거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연약한 처지, 어떤 없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심을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11장 13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우리 하나님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떤 처지인가. 나그네입니다. 외국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정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내 자녀들아, 너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은 외국인과 같은 세월이고, 나그네 같은 세월을 살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기근도 만나고 그래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너무도 똑똑히 알고 계십니다. 가진 것 때문에, 우리가 시달리는 일 때문에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도 나그네입니다. 좀 더 많이 가진 삶을 살아도 외국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그네요 외국인처럼 사는 이 땅에서 더 나은 본향에 사는 것 같이 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정의와 공의를 이루도록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에게 복을 끼치기 위해서 살았고 롯도 구출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난도 당했습니다. 무엇을 알기 때문이었을까요? 나그네와 같은 삶에서 진실로 의미 있는 삶,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삶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은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기 바랍니다, 저와 함께. 무슨 보화를, 썩지 않고 녹이 쓸지 않는 어떤 보화를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처럼 살지 맙시다. 썩지 않고 녹이 쓸지 않는 그곳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이 몸 된 교회에서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언약을 따라 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더 나은 본향에 사는 삶입니다. 이런 결론이 여러분과 저의 신앙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땅에서의 삶이야말로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분 계시죠? 학생시절까지 청년시절까지 세상 모르고 신앙이 전부인 줄 알았다가 이제 세상을 준비하고 사회에 나가보니 세상이야말로 리얼 현실이더라 하고 놀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으로 마치 주님의 말씀을 동화처럼, 어릴 때만 따를 수 있는 이야기처럼, 또는 현실 속에서 너무 부대끼니까 단지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주신 말씀처럼 생각하고 이미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발휘할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도리어 거기서부터 주님을 향한 신앙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부터인가 하면 아브라함 때부터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 오신 이후에 갑자기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태초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실 때부터, 교회를 세우실 때부터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의 삶이 주님의 이런 부르심을 거절한다면 이미 배반하는 신앙입니다. 배교하는 삶이요 배신하는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그런 신앙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의 누림도 누리시고, 고향의 부모님 품도 누리시되, 내가 정말 돌아볼 곳, 내가 정말 쉴 곳, 내가 정말 충만히 여길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없습니까? 소망 없는 곳에 계십니까? 소망이 없을 때 주시는 소망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소망입니다. 아무 가진 것이 없을 때 주님이 주신 언약이 주님께로부터 온 언약입니다. 2020년 얼마나 숫자가 좋습니까? 처음 부르신 믿음으로부터 어긋나 있는 자신의 삶이 발견된다면 주님이 더 나은 본향을 위해 어떻게 부르셨는지를 기억하시면서 회개하고 돌이켜서 이 2020년 정월부터는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내 영혼도 기뻐할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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