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로마에 전해진 복음(사도행전 28장) | 이정식 | 2020-0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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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신약성경에 쓴 편지가 열네 편입니다. 그 중에서 이 로마서는 다른 어떤 편지에도 나타나지 않은 구약말씀에 정통하고 복음의 이치를 속속들이 밝히고 있는 유일한 편지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로마서를 편지가 아니라 논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에는 편지가 맞다고 봅니다. 제가 묵상해 볼 때, 우리가 독도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서경덕 교수가 모금을 해서 LA나 뉴욕의 광고판에 세련된 문구를 작성하고 알리는 데 애쓰는 것을 봅니다. 그처럼 당시의 로마는 오늘날 뉴욕이나 런던처럼 세계적인 도시입니다. 복음의 변증이 탁월한 이유는 문화적으로 뛰어나고 세련된 사람들, 세계적인 학자들이 오가는 도시에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이렇게 치밀하게 복음을 변증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어려운 항해 끝에 로마에 들어갔습니다. 로마에 가서 사도행전 28장 23절에 보면,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초대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했습니다. 마지막 30-31절 보면,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28:30-31)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전까지 구약 말씀 곧 모세오경과 선지서를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 내용이 바로 로마서에 정리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여러분과 제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고, 구원받고 여러 모양으로 신앙 성장을 원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망해서 낙심하기도 하는데, 그런 과정에 있는 여러분과 저에게 로마서는 아주 귀중한 편지가 됩니다. 사실 바울은 여러분과 제가 신앙생활 가운데 어떤 문제에 부딪칠 지를 자기의 산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시 어떤 장벽에 부딪쳐 왔는지를 사도 바울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불러서 말할 때 정말로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념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당신들에게 이 귀한 복음을 전해주고 싶다.”(롬9:3)고 할 정도로 사랑이 깊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롬9:4)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 열심을 내야겠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 때부터 가지고 있는 삶의 기본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헌신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몫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너무 좋은 것 같지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 말씀에 헌신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여 여기고,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니까요.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쌍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 31절에서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의에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롬9:31-3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칭찬으로 끝나야 할 것 같은데, 바울은 여기서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멸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2절에 말하기를, 열심을 내었지만 예수를 아는 올바른 지식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특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예수 믿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 다시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망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크신 은혜로 십자가의 저주와 형벌을 당하시고, 인생으로는 할 수 없는 사랑의 일을 다하셔서 그 사랑을 부어주셨는데, 그렇게 은혜 입은 자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시작되고 사랑의 일이 시작될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 은혜를 입지 않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하나님 말씀을 향한 열심에서 시작했으니, 거칠 것에 거쳐 넘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당시에 지식의 도시, 고상함의 도시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애를 쓰지만, 로마에 살던 이방인들도 어떻게 하면 신적인 지식에 도달할까 하는 것으로 고민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양심상 다른 사람들에게 거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을 기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하고, 선하게 살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는 사닥다리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차근차근 내 마음을 절제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내 삶에 최선을 다하고, 주님 말씀을 순종해서 주님께 가는 사다리를 놓을 수 있느냐.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은 몰랐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생각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회중찬양으로 부른 찬송가 259장(통193)은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입니다. 거기 가사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능력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죄를 ‘희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클린(clean)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 속에서 회개해야지 회개해야지 하다 보니까 찬송 부를 때 ‘회개하는 능력’이라고 부릅니다. 예배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내 더러운 죄를 회개하게 만드시는 능력이 있으니 또 회개해야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실수하는 것입니다. 절반은 그렇게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죄책이 많아 노이로제가 걸렸는지 그렇습니다. 더러운 죄를 회개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러운 죄를 희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실망하고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고, 제대로 살고 싶은데 자꾸만 넘어지는 나를 볼 때 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넘어지는 곳이고, 여러분과 저도 자주 착각에 빠져 힘들어지는 이유입니다. 우리 신앙생활 속에 풍성한 소망이 없고, 실망하고 비판하고 싶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강력에서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나에게 주목하게 되고, 자꾸만 ‘나의 의’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다시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내고, 의를 추구하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3b) 의지는 있지만 몸은 따로 놀아요. 결국 손종하려고 했지만 순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신앙의 낙담 속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은 성경일 뿐, 신앙은 신앙이다. 복음의 능력에서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수천 년 동안 반복해온 신앙의 방식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반유대 정서가 퍼져있습니다. 이스라엘 첩보부대 모사드가 팔레스타인과 다른 적들을 없애는 등등으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복음으로 하는 비판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이스라엘이 비난받고 핍박받는 유일한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비난받고 핍박받는 이유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내고 말씀을 추구하지만, 예수의 은혜에서 시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비방받는 것입니다. 이를 지적하면서 예수의 은혜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깨우쳐주는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 5장과 7장에 보면 우리가 말씀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낙담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위에는 죄가 군림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롬5:17a, 21a). 죄가 왕노릇하고 있으니 고민입니다. 잠깐 생각하기를 죄가 군림하니까 그 통치를 어떻게 피하면 될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또 죄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우리 육체를 입은 모든 사람 속에는 죄가 살고 있고, 우리 위에 군림하는 것도 죄니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법보다 주먹이 앞서고, 용서보다 복수가 앞서는 것이 육체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육체는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원합니다. 그런데 내 속에 그런 죄가 살고 있고 그 위에 죄가 군림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국 로마서 7장 21-22절에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율법을 섬깁니다. 생각이 없어서 실수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선하게 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똑같습니다. 마음은 안 그런데 몸은 따로 놉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난 후 부딪치는 것이 나도 신앙에 답이 없고 다른 사람도 답이 없어 보이니까 그때부터는 말씀과 신앙이 따로 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은 복음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남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내었지만 그의 결론 역시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으로 몰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어려움에 다시 빠집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창세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증거하기 위해 할례를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체에 받는 할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증거할 수 없고, 할례를 받되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2:29). 그런데 이것도 잘못 읽습니다. 아까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능력을 잘못 읽었듯이 말입니다. 내가 할례를 받되 깊이 받아야 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할례는 찢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선하게 살려는 의지는 있지만, 그 마음조차 죽은 마음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에 팔린 마음이요, 소망이 없는 마음이구나라는 사실을 시인하며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또 회개해야지 하면서 읽어왔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저만 그렇게 읽은 게 아니라 대개 모두가 똑같이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없어서 망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 것이 하나님을 말씀을 추구하지 않아서 망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기 의에서 시작하고, 주님께로부터 온 의에서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결코 소망이 없습니다. 나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서나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은 마음에서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이 자꾸 거기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은 부패한 것입니다. 선을 생각하되 육체를 이길 힘이 없는 마음일 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마음의 할례는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나는 죽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죽었다는 사실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철학자들 헤겔, 칸트도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마음의 부패를 기억하지 않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사도 바울이 너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 불가능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무엇을 선언하는가 하면, 로마서 8장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졌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트렘블링이라는 게 있습니다. ‘방방’이라고 하죠. 떨어지면 다시 튕겨 솟아오르게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민감함을 주시는가 하면 죄에 대한 민감함을 주십니다. 우리 양심을 주님 알지 못했을 때보다 더 예리하게 관찰하게 되고, 타인의 양심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죄에 대한 민감함에 마침표를 찍게 되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강력함에 마침표를 찍어야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시작한 모든 신앙은 멸망의 길이며 거치는 것에 넘어지는 신앙입니다. 내 속에 죄가 살고, 내 위에 죄가 군림하여 내가 자주 낙담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강력한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예민한 죄에 대한 민감함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우리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주님은 우리 영혼만 간신히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예수의 영이 얼마나 강건하신지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b)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뿐인 우리였지만, 예수 은혜 안에 있으면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고 이후로부터 무수한 말씀으로 우리 생활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생활의 권면을 지금 우리는 못 지킬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안에 풍성할 때,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해 죽는 것도 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말고, 회개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종의 영을 받지 말고, 양자의 영을 받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롬8:15)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못할 때 쫓아가면서 지적합니까. 처음에는 “내 눈 똑바로 봐!”하고 훈계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해도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의 기쁨은 자녀를 위해서 아무리 수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녀가 부모를 기뻐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애가 애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엄마 아빠가 나를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알겠어요. 이제 제가 도울께요.” 하면 철든 것 때문에 기쁠 수는 있습니다. 기특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기쁨은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한 수고를 자녀가 헤아려 줄 때보다, 부모가 주는 사랑을 기뻐하는 걸 보는 게 더욱 기쁜 것입니다. 그런 기쁨을 보면 부모는 그동안에 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사랑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청년시절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지셨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하고, 주님 얼마나 아프셨을까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은 영혼의 수고를 다하여 우리를 건져내신 주님께 대하여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이것입니다. 죽으심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 은혜, 우리 역시 죽었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은혜,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심을 받는 은혜, 이 은혜를 우리에게 공급하신 분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것이 전능하신 주 예수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시작할 때 우리는 감격스럽습니다. 이를 두고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b)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받으면 잘못해놓고도 베갯머리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가도 입을 이죽거리며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이 이런 나를 사랑하셨는지...어떻게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셨지...완벽하게 다시는 저주받을 일이 없이 영원히 단번에 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지... 우리는 말씀을 배반하기도 하는 이 무지렁이 같은 우리에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고백합시다. “내 마음은 죽었다.” 선이 없어서 죽은 게 아니라 선을 이룰 생명의 힘이 없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가 양잿물로 씻으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면 결단코 주님의 길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착각입니다 착각.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방의 기쁨이 옵니다. 주님께서 정말 이런 일을 해주셨다고? 20년 30년 신앙생활을 해도 답이 없었는데, 이 답을 이미 2천 년 전에 내놓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택함받았다고 하고 멸망하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불쌍했던지, 답을 얻지 못해 답답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불쌍한지 설령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이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 32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우리 마음에서 시작하면 불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가두어 두신 것은, 또 이방인처럼 사다리를 놓아 하나님께 올라가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크신 은혜를 받는 비결이 그리스도를 모셔 내려서 얻는 게 아니며, 그리스도를 하늘로 모셔 올려서 얻는 게 아니라(롬10:6-7),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롬10:9)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예수 이름을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이름만 부른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강력을 시인하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에 전한 복음이요, 여러분과 저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복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시작하지 말고, 반복하는 회개에서 시작하지도 말고, 예수께로부터 부어진 사랑과 예수의 영 안에서 우리 죽을 몸조차 살리시는 은혜 속에서 신앙을 시작할 수 있기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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