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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심한 고난 중에 도울 이도 없을 때(왕하14:23-15장) 이정식 201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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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지만, 그 어려움이 심해지면 마침내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 외에는, 그리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도울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일이 한 번쯤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여로보암 왕이 나오는데, 여로보암 2세입니다. 성경에는 여로보암 왕이 두 사람이 나오는데, 솔로몬 사후에 북이스라엘 10지파를 다스리던 왕이 여로보암 왕이었고, 오늘 본문에 북이스라엘을 41년 동안 다스린 여로보암 2세가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벌써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런데도 41년이나 더 다스렸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은 곧이어 징계가 이어 나오는데 여로보암 2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5장에 보면 아사랴 왕이 나옵니다. “아사랴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왕하15:3-4a)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이었고, 다만 산당을 제하지 않은 잘못만 범했습니다. 그런데 5절 보시면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왕하15:5a)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왕은 사가랴 왕입니다. 스가랴는 6개월만 다스렸는데, “그 열조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왕하15:9)고 했고, 이어 징계가 뒤따르기를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저를 모반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라고 했습니다. 살룸 왕은 1개월 밖에는 다스리지 못했는데,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살룸을 쳐죽였습니다. 여럿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서 왕이 된 므나헴은 10년을 다스렸는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15:16)고 했고, 앗수르 왕 불이 침략을 해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니까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 다음 왕은 그 아들 브가히야였습니다. 브가히야는 2년을 다스렸는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왕하15:24)고 했고,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브가히야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베가 왕은 또한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왕하15:29a) 침략을 했습니다. 열왕기하 15장에 반복되는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만 살펴봐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 죽거나, 병이 생기거나, 전쟁이 일어나거나, 반역이 생겨서 제명에 죽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상식으로 봐도 타인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면 귀신은 뭐하나 저 사람 안 잡아가고하고 말합니다.

   그래야 마땅한데 여로보암 2세는 열왕기하 1424절에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했으니, 병이 나거나, 죽거나, 반역이 일어나거나, 전쟁이 나야할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14:25)라고 했습니다. 징계나 심판이 따라온 것이 아니라 더 잘 된 것입니다. 영토가 최대로 회복되었습니다. 솔로몬 왕 대에 정복했던 땅,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을 거의 회복할 만큼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강국이 되었습니다. 세계 무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중해 바다의 패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계무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남쪽 아라바 바다까지 손에 넣었으니까 허브 국가가 된 것입니다. 나라는 번영하고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뭐가 좀 이상한 듯합니다. 범죄한 여로보암 2세 왕을 이마만큼 흥왕케 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하다못해 히스기야 왕만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 정말 선한 왕이었는데, 성전의 모든 기물을 바벨론 사신에게 보여준 것 때문에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이 걸렸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 내 평생에 선한 일을 행한 것을 기억하여 주셔서 내게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담대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일평생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을 만큼 선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지만 여로보암 2세 왕은 이런 기도를 할 만큼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을 뿐이었습니다. 41년 동안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하나님의 복을 받을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록하기를, 이 악한 여로보암 2세를 강건하게 만드셨고,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상 가장 넓은 국토를 회복하게 하시고, 41년 동안 이스라엘을 치리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숨겨놓은 이유가 하나 있다면 25절입니다. “그 종 아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물론 요나서에는 여로보암 2세가 잘 될 것이라는 말씀은 안 나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한 이 말은 요나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앗수르가 패망하기 전에 요나 선지자가 받은 말씀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받은 말씀 중에 여로보암 왕을 사용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의 죄를 보았다면 결코 여로보암 2세를 크게 하거나 강하게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보셨는가 하면, 먼저 선지자 요나에게 하신 약속을 보시고 일하신 것입니다. 언약을 보고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를 따라서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우리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만일 이렇게 하신다면, 우리가 왜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며, 하나님 말씀 배우기를 사모하겠습니까. 힘겨운 중에 왜 예배를 꼬박꼬박 드리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수고롭게 기도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26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한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왕하14:26)라고 하셨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왕이 되기 전에 여러 왕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어서, 이스라엘은 주변 여러 민족 곧 에돔, 암몬, 모암, 시리아 들을 통해서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땅을 많이 빼앗겼습니다. 땅을 빼앗기면 땅만 빼앗기는 게 아니라, 전쟁에 졌으니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을 빼앗기고 주변 민족에게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가 행한 악도 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고생을 눈여겨 보셨습니다. 믿음 없어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을 떠나면 잘 될 것 같이 생각한 사람들, 그렇게 하여 그 영혼이 상한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시대는 요나 선지자가 활동했을 뿐 아니라, 호세아 선지자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입니다. 호세아나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번영 속에서 상아 상에서 잔치를 베풀고, 기분이 좋아서 풍성하게 연보를 드렸지만,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던 지배층들을 향해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축복을 받는 게 마땅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풍성히 연보도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와 같이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라고 외치고,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선포할 때, 축제를 벌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입 다물어라!” 하며 도리어 선지자의 입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런 말을 하려거든 다시는 예언하지 마!”라며 선지자들을 윽박질렀습니다. 많은 번영으로 축제를 벌이며 예배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입막음하려고 했던 시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너희는 음녀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연애하던 남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연애하려고 떠난 음녀다 라고 했습니다.

   이런 시대, 이런 여로보암 2세를 하나님이 왜 축복하신단 말입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가 26절 하반절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정말로 고난을 당해보면 진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저밖에는 없습니다. 직장 선후배도 도울 수 없습니다. 친한 친척도 도울 수 없습니다. 가까운 형제도 도울 수 없습니다. 목사님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착각하여 축제를 벌이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의 불쌍함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파리함을 보셨습니다. 도울 자가 없는 이스라엘의 홀로 된 처지를 본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없는 그들을 주목해 보셨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패역한 여로보암 2세를 사용하여 축복하고, 빼앗긴 땅을 되찾게 하고, 다시 주님 앞에 돌아오도록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 신앙 상식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상식으로 덤벼들 수 없는 분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주님 내게 복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지만, 정말로 우리의 번영은 어디서 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데서 옵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사실을 놓치면 우리는 번영을 누릴 때 금방 교만에 빠집니다. ‘나의 이 번영이 어디서 왔는가. 다 나의 섬김에서 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를 통해 깨달읍시다. 이 여로보암이 하나님 앞에 은혜받을 일이 하나도 없고, 주님 앞에 번영을 누릴 일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축복받을 일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불쌍히 여겨서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27절 마지막에 번영을 주신 또 하나의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예수님 오셔서 12제자를 삼년 반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깨우치실 때에 제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었습니까. 예수님 당대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을 불러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후 곧, 이집트 종살이 430년 동안, 광야 40년 동안, 사사기 230년 동안, 그리고 나라를 이루어서 500년 동안 선지자를 보내고 선한 왕을 세워서 늘 깨우쳤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듣지 않았을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럴 때 징계를 주시면서도 주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남겨둘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여로보암 2세 때에 이스라엘을 천하에서 없이하여도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만큼 번영했지만 그만큼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천하에서 도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셨기 때문에 축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런 노래가 있죠. “건넌 마을에 최신사댁에 딸이 셋있는데, 그 중에서도 셋째 따님이 제일 예쁘다던데 아따 그 양반 호랑이라고 소문이 나서 먹쇠도 얼굴 한 번 밤쇠도 얼굴 한 번 못 봤다나요...아랫 마을 사는 칠복이 놈이라고 말씀드리고 나서그리고 하는 말이 염치 없지만 셋째 따님을 사랑하오니...”이라고 합니다. 염치없지만!이라고 했습니다. 염치(廉恥)란 뭔가 잘못을 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아는 마음입니다. 염치가 없다는 말은 칠복이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자격이 없지만, 당신의 셋째 따님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알지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염치에도 불구하고, 그런 염치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고백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염치없지만 하나님, 내가 내 신앙을 볼 때 나의 믿음을 볼 때 하나님께 복을 구할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나를 불쌍히 보시고 나의 고난과 고통의 심함을 보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물론 여러분과 제가 히스기야 왕처럼 기도할 제목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가 홀로 고민하면서, 없는 중에도,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내가 주님과 다른 사람을 섬긴 것을 보시고 복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족들 중에 믿음의 고민이 있는 성도님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제목을 가지고 나와 내 가족들의 신앙과 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염치없지만 크신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하나님을 떠난 일밖에 없었어도 염치없지만 나와 내 가족을 돌보아 달라고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양금순 모친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다녀왔는데, 모친이 좀 힘드셨습니다.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는지 몸도 좀 떠시고 소망이 조금 약해지셨습니다. 평소에 모친은 하나님 앞에 신앙이 얼마나 담대하고 든든했는지, 심방할 때마다 도리어 제가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모친의 생애를 다 알지 못하지만, 이전에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때에도 담대하셨습니다. 이제는 몸이 쇠약해지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도울 자가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의술로도, 약으로도 처방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모친의 믿음으로 볼 때에는 히스기야 왕처럼 내가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행한 것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그의 믿음을 보고 도전받고 격려받을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다릅니다. 나 자신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그런 자신이 쉽게 생기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발각되지 않으려고, 안 죽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선잠을 잤는지 그러다가 깼는데, 꿈 속에서 그러는 제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는 목슴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있는데 말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말입니다. 내 믿음은 어디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스캔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홀로 고백합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주님, 끝까지 내가 주님 말씀을 순종하며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쌍함을 보시고 여로보암 2세를 축복하셨습니다. 목사인 제가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듣는 성도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불러모은 것입니다. ‘내가 오늘 주님 앞에 왔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서 염치없지만 저에게 주실 말씀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배 중에 은혜를 받으셔야 합니다. 은혜를 받게 하시려고 주님이 베푸신 것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톨도 은혜 받을 일이 없는 여로보암 2세를 축복하시고 41년 동안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고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조금도 흠집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크심 안에서 자유롭게 신앙하며 섬기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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