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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왕하 23:1-30) 이정식 201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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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세가 넘으신 어느 분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70세가 된 이후로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뭔가를 하려는 제 열정을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제가 쓸모없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만연한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사회적인 불공평 때문에 절망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가끔은 비참하고 아주 외롭습니다. 이런 감정이 들 때면 저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여전히 살아있는 친밀한 관계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마 이분은 평생을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은퇴하고도 열심히 봉사하다가 일흔이 넘고서부터는 달라진 것을 느낀 모양입니다. 교회의 주인이었다가 중심에서 조금 멀어지게 되고, 섬길 생각은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을 것입니다. 더 작아지는 생활 반경 속으로, 더 작아지는 신앙생활의 테두리 속으로 들어가면서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신앙생활의 한 모습입니다. 집사님 두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희들 70세에 은퇴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65세에 은퇴인데, 집사님들은 70세에 은퇴하시겠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일하시겠다니 총회도 거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시기 원합니다.

   어찌되었건 연세가 들어가시면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에서 자녀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변화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섬김의 힘과 함께 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들면서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분은 이렇게 했습니다. 젊었을 때 자신의 독특한 성격, 정직한 기도, 심지어 자기의 못된 감정까지도 사랑하신 주님을 만났던 그 경험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내가 주님께 뭘 잘 해서 주님이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 때, 오히려 세상 사람으로 살 그 때에 나를 찾아오시고 당신의 모든 사랑의 값을 다 지불하셔서 온 천하 만민을 사랑하기 전에 나, , 나를 사랑하신 그 예수님을 돌아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오면서 두 번의 교통사고를 겪고도 살아남았고, 몸이 성치 않았을 때에도 새로운 직업을 주신 것을 생각했습니다. 은퇴 후 수입도 별로 없을 때 하나님이 평안과 쉼을 주신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급했던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꼈던 마음이 다시 믿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간증으로 이런 경험을 듣지만, 우리 부친 모친들은 실제로 경험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기억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제 교회 주인 역할을 하던 데에서 멀어져 주변인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생활 중에, 묵상 중에, 예배 중에 만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도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주님께 가는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자주 다니지 않아서 풀숲이 우거져 더 이상 길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행실을 통해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잘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서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보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오늘 요시야 왕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던 왕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섬겼던 왕입니다. 열왕기하 222절에 보니까,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주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요시야 왕의 바로 위의 왕은 므낫세 왕이었고, 므낫세 왕의 선왕은 히스기야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 선한 왕이었지만, 그 아들 므낫세 왕은 정말 악한 왕이었습니다. 51년 동안 통치하면서 전 세계에 있는 우상은 다 끌어모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들도 잘 하지 않았던, 자녀를 불 가운데 걸어가게 하여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왕의 이런 행실을 바라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처음에는 안타까워했겠지만 왕이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마음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형편 속에서 요시야 왕은 하나님이 특별히 숨겨두었다가 8살 때에 왕위에 오르게 하셨고, 18세에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언제부터인가 하면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했을 때부터입니다. 열왕기하 228절에 나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언제부터 하나님의 율법책이 성전에 숨겨졌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도 하나님이 외면당할 뿐만 아니라 율법책도 외면당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디에 숨겼는지도 잊어버렸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오늘 예배 오신 분 중에는 차 앞에 성경책을 기념으로 놔두고 열어보지 않는 분이 없을 줄 압니다. 또 교회에 성경책을 놔두고 다니며 예배시간에 일주일 동안 처음 성경을 펼쳐보는 분이 안 계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책을 발견한 요시야 왕이 무엇을 했는가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232절을 보면,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라고 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몰랐던 성경책을, 그렇게 홀대받던 하나님과 성경말씀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낭독하기를 원했습니다. 왜 공개적으로 낭독했을까요? ‘여러분들아, 우리가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멀어져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주님 말씀을 저버렸기 때문이니, 이제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자.’

   그런데 주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니 거치는 일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당시 세계의 모든 우상을 다 들여놓았으니 이걸 하나 하나 해결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치를 해보지 않았지만, 어떤 정치인이 국민이 반대하는 데도 주장하고 선도해나가야 할 일이 있다면 자신의 정치 철학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여덟 살에 왕이 되어서 열여덟 살부터 개혁을 하려고 합니다. 율법책에 적힌 대로 모든 우상을 부수고 빻고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왕의 일을 반대하는 세력이 없었겠습니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반대하고, 우상을 만들고 유지 보수하는 기술자들, 기업들도 반대할 것입니다. 여론전을 벌이고 투서를 넣고 상소를 올릴 것입니다. 그런 반대를 무릅쓰고도 종교개혁을 계속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박혀 있어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시야 왕에게 나의 말씀을 맡긴다고 하는 소명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235절부터 20절까지 개혁을 위한 싸움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235-6절을 보면,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성문의 산당들을 헐어버렸습니다.

   유다 각 성읍이면, 서울만 아니라 부산 대구 광주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때려 부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봉기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요시야 왕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이 일을 다 이루어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 지워지고 없어져 버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다시 내려고 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제 속에서 요시야 왕처럼 하나님의 일과 말씀을 위해 일어나는 분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요시야 왕이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오시는 길,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가는 길을 찾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요시야 왕을 칭찬하셨습니다. 열왕기하 2325절 보시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 히스기야도 대단한 왕이었지만, 요시야 왕은 모든 우상을 싸그리 부수고 찢고, 하나님의 율법책만이 전 이스라엘 앞에 서 있기를 원했던 왕은 없다는 것입니다.

   참 익숙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의심했던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자주 듣고 알고 있지만 우리가 잘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그렇게 해야만 그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아닌 것 같고, 말씀은 좋아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잘 행해지지는 않는 것을 봅니다. 성경에서 처음 보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 한 분 외에 말이죠. 구약 성경에 요셉은 예수님과 비견되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형들에게 팔려가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여러 번 고난을 겪지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예수님처럼 자기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씀은 나오지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평가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항상 말로만으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깜짝 놀랍시다. 요시야 왕은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왕의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신하들이 반대하고, 수많은 기업인들이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고자 하는 중심이 없었다면 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에 선한 왕들이 많이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의 길로 행하여 정직히 행하였다는 평가를 얻으면서도 산당은 남겨두었더라처럼 어딘가에는 미진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은 달랐던 것입니다. 이건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있다는 겁니다. 또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변명하지 맙시다.

   요시야 왕이 이렇게 풀숲으로 사라졌던 길,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다 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따라오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열왕기하 2326절을 봅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23:26) 그리고 27절 보면 이 성전을 버리리라하고 계십니다. 요시야 왕이 이렇게 성심성의껏 소망 중에 하나님 말씀으로 부딪쳐 가면서 수많은 반대세력과 쟁투하면서 주님의 길을 만들었건만, 55년 동안 악한 통치를 한 므낫세를 기억하고 계셨고,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이 유다를 버리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다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이때가 언제인가 하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를 정제하다가 내어버린 은’(6:30)이라고 했습니다. 일곱 번이나 굽고 단련하였어도 안 되어서 내어버린 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좀 해보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던가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좀 안 되던가요? 소망이 넘치는 신앙을 살고 있습니까? 잘 안 된다면 그게 바로 내어버린 은과 같은 처지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5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5:1a) 소돔과 고모라를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의인 몇 사람만 찾으면 심판을 취소할 것이라고 했나요? 40, 30, 20명 점점 줄어들다 10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루살렘에서는 단 한 사람만 찾아도 용서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요 없다는 말인가요?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정말 눈을 크게 뜨고 보셔야 합니다. 이렇게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시고, 선한 왕들도 많이 세우셨는데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시대가 있구나. 므낫세 왕 55년 통치 기간에 여로보암 1세부터 내려온 이 불신앙의 역사, 주님을 거절하는 역사, 주님을 믿기는 해도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섬기지 않는 역사강 계속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실히 섬기지 않는 게 정상적인 걸로 알고 있는 시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어떻게 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이 사실을 놓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926절에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9:26) 기가 막힙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고 보고 듣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어떻게 믿었습니까? 혹은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내 마음이 찢겨지면서 주인 되었던 나는 포기되고, 선하신 주님이 내 마음에 주인되어 주십시오 고백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왜 마음을 찢게 됩니까? 할례를 살을 찢는 것이니, 마음의 할례란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예수 믿을 때 나는 그냥 믿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듣기는 하지만 이런 믿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혹 내가 주님을 부리려고 믿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주인이 여전히 나의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영이 내 안에 계실 때만이 말씀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실망하고 넘어져도, 내 속에 있는 소망이 주님 말씀을 찾아가도록 계속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의 할례는 언제 받는 것입니까?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깨달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왜 내가 죄인입니까? 내가 도둑질했습니까? 운전하다가 범칙금을 내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이요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영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연애할 때로 돌아가볼까요? “내가 당신 잘 알아. 당신 MBTI 성격 테스트도 했을 때 이런 성격유형이었고, 당신이 어떤 공부를 했는지, 회사에서 월급은 얼마를 받는지 다 알아.”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부부생활을 해보면 압니다. 그렇게 많이 살았는데도 우리가 서로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혼생활을 계속하는 이유는 뭡니까? 내가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에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압니다. 내가 미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습니다.’ 이게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준 적이 없습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의 주인 되셔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할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이 말은 예배를 꼬박꼬박 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몰라봤습니까이 말은 우리가 성전세 꼬박꼬박 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생일선물 사주고, 시부모님이나 장모님 챙겨드리고 할 거 다했습니다. 그런 모든 걸 다해도 마음이 없는 사람과 결혼생활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계속 살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마음이 없이 그런 행위로 사랑을 얻으려 한다면 그건 모욕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가져야 하는데, 이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려고 한다고 생기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인 것 같긴 한데,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를 찾아와 주시고, 내 영혼에게 말씀해주시고, 내 마음에 할례를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정말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나에게 찾아와주십시오하고 간절히 소망할 때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래야 요시야 왕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여도 나만은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5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15:16) 예레미야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7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15:17) 주의 손에 붙들려 혼자 앉았답니다. 수많은 신하들이, 수많은 기업인들이, 수많은 반대자들이 있었을지라도,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혼자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저것들을 전부 부수어야 되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예레미야를 향한 살해음모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달고 즐거웠지만, 이제는 분노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주의 손에 붙들려 혼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 앉아 있을 용기가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입을 닫고,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고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그런 곳이라고 말할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를 회복시키고,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참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시작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하면, “내가 주의 말씀을 발견하고”(15:16a 흠정역)였습니다. 요시야 왕도 성전에 숨겨졌던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모든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주의 말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쓰시기 전에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일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본 것처럼 70대가 된 한 분의 고백처럼 우리는 길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조급해지고 화가 나고 그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망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인생의 짐과 신앙의 짐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주님이 우리의 어떤 고백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말씀하시기 원하시는 뜻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성경을 이렇게 열어서 50년 동안, 60년 동안 살았는데 내 마음에 낙망되고 실망된 것, 혹은 내 속에 남아 있는 죄 때문에 내가 힘들다면, 말씀을 통해 나를 해방시켜주십시오. 나를 건져주셔야 내가 청년의 때에 그렇게 소망스럽게 주님을 만나서 신앙생활했던 그때를 회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셨나요? 지금도 그 사랑을 받고 계십니까? 그 사랑이 다른 어떤 사랑보다도 탁월한 사랑이었습니까? 그 사랑을 간직해야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엇길로 갈 때 요시야 왕처럼 싸울 수 있고,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이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만이 우리의 몸된 교회 위에, 내 영혼 속에 이루어지기 위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70세가 되고 80세가 되고 90세가 되어도 주님 앞에 젊은이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피곤한 사람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낙망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낙망된 사람을 주의 말씀으로 일으키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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