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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라(열왕기상 18장) 이정식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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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면, 우리가 믿는 그 일에 대해서 군사가 될 것입니다. 확실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 믿음에 우리 삶을 바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시는 말씀은 머뭇머뭇하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머뭇머뭇한다는 말은 확실한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머뭇머뭇한다는 말은 하나님도 믿었다가 바알도 믿었다가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머뭇거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남자가 맞는지, 내 여자가 맞는지 확신이 서기 전에는 더 많이 확인해봐야 합니다. 당연히 머뭇거리게 됩니다. 성품이 어떤지, 매너가 어떤지, 성질이 어떤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어떻게 푸는지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확신이 서면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듯이 머뭇거리는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신이 서기까지는 머뭇거리게 됩니다. 하지만 확신이 서고 나면 결단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 뭔가를 섬겨도 시원하게 섬길 수 있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동할 때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 사람은 머뭇거리게 됩니다. 오늘 엘리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생애가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합 왕은 이스라엘 여러 왕 중에 참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악행을 기준으로 악하다고 말하는데 그 여로보암보다 더 악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악하다고 말할 때에는 포학하고 잔인한 것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는 데 충성된 사람을 말합니다. 아합 왕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든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났기 때문에 악한 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대통령을 생각할 때에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잘 살고 잘 먹게 한 대통령이라고 해서 좋은 대통령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강하게 하는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이 아닙니다. 아합 왕은 바알을 섬기던 왕입니다.

   바알 신은 폭풍우를 관장하는 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푹풍우 속에는 번개가 있고, 비가 오고, 바람이 있습니다. 바알 신은 이렇게 번개와 불을 주관하고, 비와 바람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믿어졌습니다. 우리가 곡식을 지어먹고 이 땅에서 살아갈 때 꼭 있어야 할 신입니다. 그러나 폭풍우를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폭풍우를 주관하시면서도 말씀으로 우리를 교훈하시고 세상을 경영하십니다. 하지만 바알신은 폭풍우를 주관한다고 알려졌지만, 그는 말이 없습니다. 경전이 없습니다. 우리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신이 바알이 되었든지, 아세라가 되었든지, 하늘의 일월성신이 되었든지 농사짓고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상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바알 신을 안 믿으시죠? 안 믿으신다 하지만 우리는 날 때부터 바알신과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민족만 바알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체질적으로 하나님을 안 믿도록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게 되니,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이 소중하신 분, 아름다운 세상 문화가 더 위대해 보이는 분이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거듭난다는 말이 꼭 필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체질적으로 우상을 섬기며, 내 삶을 잘 되게 해준다면 내 마음을 드리고자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내 영혼이 내 죄악을 깨닫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든지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내 체질로 섬기는 이 세상 신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참되신 주님의 진리 말씀을 따라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 주님을 확실히 고백하는 그 사람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만이 머뭇머뭇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둘 다 섬겼습니다. 바알신도 섬겨보고 하나님도 섬겨보면서 살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보시기에는 머뭇머뭇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신을 섬기는 것을 보니 머뭇머뭇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쇼핑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가게에 들어가면 그 가게에서 사고 맙니다. 먼저 들어간 가게에서 다른 가게로 건너가는 게 민망하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촌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쇼핑을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이곳 저곳 쇼핑을 해서 좋고, 또 비교해보면서 좋은 상품을 고를 수 있으니 좋고, 또 그렇게 보내는 시간 자체가 즐거운 시간일 것입니다. 기웃기웃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원받은 여러분과 저라고 하여도 머뭇머뭇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가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확실히 믿었던 사도들은 자기의 모든 생애를 다 드려서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에 우리 삶을 비추어보면 부족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주님 믿고 거듭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주님, 제가 아직 믿음이 적습니다. 이 적은 믿음을 가진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더 확실한 믿음을 주시기 원합니다.’라는 고백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바알 신은 교훈의 말씀도 없고 진리도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체질적으로 바알에게 가깝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믿는 사람이라도 바알신에게 돌아가는 일이 쉽습니다. 엘리야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우리들에게 도전하기 원했습니다.

   19절 보니까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 ,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불러세우고는 850 1로 참된 신이 누구신지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스라엘 백성의 눈 앞에서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b) 우리가 세상에 있는 가치가 정말 참된 것이라고 하면,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가서 세상 삶을 충실히 사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일 참되신 진리의 하나님이 맞으면, 주님 말씀을 따르는 일에 우리 영혼의 수고를 다 하는 게 맞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확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연애를 했는데, ‘처음에는 몰랐는데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교회에 다니더라. 결국 나랑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니, 정말 좋은 아이인 걸 알면서도 멈춰서게 된다. 참 그렇고 그렇다. 미안하다.’ 하나님을 안 믿는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사귀다가 나중에 많이 좋아져서 결혼까지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자 결국 자기랑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며 교제를 중단한다는 말입니다. 생각 있는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 믿음의 법을 세워갑시다. 믿음으로 구별되는 법을 배워갑시다. 자기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과 멀어지는 일, 바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년 여러분, 성서침례교회에 자매가 없다고 말하는 형제 여러분, 제가 뭐 자매를 만들어낼 수 없으니 미안합니다. 제가 하나님이 아니니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저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니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다 모아놓고 일대 대전을 벌입니다. 불태울 나무를 쌓아놓고 소를 잡아 각을 떠 그 위에 얹어놓고는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기도하게 합니다. 한참을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도 하늘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엘리야가 비아냥거렸습니다. “너희 신이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왕상18:27) 너희 신이 잠이 들었느냐 어디 출장 갔느냐 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랬더니 자해를 하면서까지 부르짖으며 날뛰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였습니다. 엘리야는 그냥 불을 내려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뭇단을 쌓아놓은 곳에 도랑을 파고는 통 넷에 물을 채워서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붓기를 세 번이나 부었습니다. 도랑에는 물이 넘치도록 흥건히 젖어 있었기 때문에 불이 웬만큼 내려와도 불이 붙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고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왕상18:36-37) 이 기도는 엘리야를 위한 기도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항상 선지자를 보내주시고, 아브라함 이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어도 여전히 머뭇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18:38)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백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18:39) 여러분, 이런 하나님 만나셨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셨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 여러분과 제 속에 사무친 죄악을 회개하셨습니까? 거기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셨나요? 이런 주님 꼭 만나시기 바랍니다. 아직 만나지 못하셨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부터 머뭇거리지 않는, 충성된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승리했습니다. ‘주님이 나의 주님이신 것과, 내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인 것을 나타내 보이시옵소서. 하나님 말씀 속에서 내가 여기 기웃 저기 기웃대지 않을 확실한 믿음을 만나게 해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렇게 고백했건만, 그리고 이전에도 고백했고 또 그 이후에도 고백했지만,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바알을 섬기는 곳으로 쉽게 쉽게 나아갔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열왕기상하와 역대기상하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것입니다. 왕조실록이면 주인공은 왕들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에는 엘리야 선지자가 여러 장에 걸쳐 등장하고 열왕기하에는 엘리사 선지자가 여러 장에 걸쳐 나옵니다. 그리고 이 왕들의 시대에 호세아, 아모스, 하박국, 스바냐, 스가랴, 미가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이들 선지자들이 열왕기상하 시절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물론 고려 시대에도 왕들의 역사만 있지 않고 신돈이라는 괴짜 승이 나타나서 정사를 어지럽힌 일이 나오고, 러시아에서도 괴승이 나타나서 황제들의 눈을 어지럽힌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왕들 외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여러 명 여러 시대에 걸쳐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체질적으로 바알을 섬기기 쉬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세상 가치를 더 귀중히 여기며 살려는 우리들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가는 것을 드러내보이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패역하고 악하여서 하나님을 떠나게 한 왕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아사 왕이라든지 히스기야 왕이라든지 요시야 왕을 통해서 종교개혁을 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킨 왕들이 있었습니다. 아달랴 여왕이 자기 손주를 다 죽일 때 한 사람을 통해서 요시야 왕을 살려두었고, 그를 세워 다시 종교개혁을 행하도록 했습니다. 뭣하라고요? 하나님 말씀대로 통치하는 왕을 보여주려고.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께 응답받는 삶이 구원받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아하스 왕이 패역을 범했을 때 그 아들 히스기야를 세워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게 하시면서 다시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왕이며 선지자며 제사장들입니다. 이사야를 세우시고 예레미야를 세우시고 수많은 선지자를 세우셔서, 온 천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려고 다시 세우시고 끝까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믿는 우리들 가운데서는 지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무너지고 머뭇거리고 다시 불신앙 가운데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무너지면 안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왕들도 실패하고 선지자가 말해도 듣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고 의로운 왕들을 세워가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 말씀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만이 응답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복을 누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승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실패를 보십니까? 패역한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면서 실망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항상 동일한 말씀으로 동일한 목소리로 동일한 교훈으로 서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고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승리를 한 이유는 아합 왕 때문입니다. 아합 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 바알 신상을 세웠더니 그때부터 3년 반 동안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아합 왕 앞에서 비가 없을 것을 선언하고 그릿 시냇가로 도망가서 까마귀의 공궤를 받았지만 그릿 시대도 곧 말라버렸습니다. 온 나라에 기근이 찾아왔고,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갔더니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먹고는 나는 죽을꺼다생각하고 있는데, 엘리야는 나를 먼저 먹이면 네 기름병과 떡반죽 그릇에 양식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에도 여전히 가뭄이 온 땅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갈멜산 제단에 불어 떨어져서 제물을 불태웠습니다. 그 승리 이후에 거짓 선지자 850명을 기손 시내로 데려가 죽였습니다. 피를 흘려서 죄를 씻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의 보혈을 흘려서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850명의 불신앙의 댓가를 지불하고 났더니, 3년 반 동안 닫혔던 하늘이 열려서 큰 비가 내렸습니다. 죄 씻음을 받고 나니까 축복이 찾아왔습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이 생겼더니 큰 비가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사람들이 대장부가 되게 합니다. 자매님들 오해마시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사람들을 대장부가 되게 합니다. 성정이 무른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 들어가면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수고를 다할 만한 것이 없다면 나는 지금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한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믿고 따라 살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당신의 영혼의 수고를 다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장인들, 자개장을 만드는 장인들이 하루 이틀 만든다고 장이 뚝딱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요즈음 이케아 가구처럼 값싸고 편리한 가구들이 많이 나오는데, 일 년에 몇 개 팔리지도 않을 자개장을 만들려면 그 배고픔이나 인기없음을 끌어안고도 계속 장인처럼 만들어갑니다. 그런 수고를 통해서라야 장인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장인의 솜씨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불렀으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부르셨습니다. 군사는 자기 생활에 연연하는 삶이 아니라 부름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해온 우리 자신을 자화자찬하기 보다는 내 믿음이 부족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확신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머뭇머뭇거리고 있고, 여기저기 기웃기욱거리고 있습니다. 내게 믿음을 주셔서 참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워주십시오.’하고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번 추석명절에 고향에 다녀온 이야기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명절 문화가 급속도로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년부터 변화되더니 1-2년 만에 확 바뀌었습니다. 저희 고향만해도 동족촌이어서 학성이가(鶴城 李家)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설날에는 어른들 인사만 해도 오전 내내 동네를 돌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전주이씨 같지는 않더라도 명절 차례나 제사 예법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갔더니 원래 장손 집에 모여야 하는데 추석 아침에 모이지 않는 것입니다. 곧장 산소로 가서 거기서 만났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산소를 거쳐 형님 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내년부터는 이렇게도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전을 부친다든지, 산소에 제상을 차릴 때에도 포 하나 과일 하나 술 한 병만 놓자고 했습니다. 점심은 큰형님 집에서 먹었는데, 점심도 차리지 말고 근처 식당에서 해결하자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저희 집만이 아니라 그 완악했던 울산 땅에 저희 문중에 일순간 퍼졌습니다.

   여러분, 제사가 뭡니까? 150년 전만해도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순교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미풍양속을 해치는 사교라고 하면서, 조상도 몰라보는 사악한 종교라 하면서 목 잘라 효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문제입니다.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많던 제사를 한 날 한 상에 합쳐서 지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사람들을 위하는 간소화된 풍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세상 가치는 어떤 것입니까? 과연 정말로 그것이 힘을 발휘할 때에는 엄중하고 살벌하기도 합니다. 신부들의 목숨이 달아날 정도로 엄중하고 실제적인 힘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동안 아내들이 음식 준비하느라 명절 스트레스 받느라 많이 시달렸습니다. 이런 변화가 무슨 믿음이 있어서 온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스스로 스르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신은 다 이렇습니다. 세상 가치는 다 이렇습니다. 힘을 발휘할 때에는 그것이 전부처럼 보이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약간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 모든 결정에 큰형이 짐을 다 지고 있었습니다. 명절 다녀온 후에 큰형님과 전화통화하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형님, 그런 결정하시느라 수고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전화기 너머로 괜찮았나?” 하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부담을 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수고가 위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세상신과 세상 가치는 시절에 따라 변합니다. 물론 수많은 교회 예법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위엄은 언제라도 변화하지 않습니다. 변화도 좋지만, 하나님의 위엄을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갑시다. 공감도 좋고 변화도 좋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살아있고, 하나님을 위한 헌신과 질서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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