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지혜로운 사람(열왕기상 3-4장) | 이정식 | 2019-09-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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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원하시죠? 지혜로운 사람이란 어떤 일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 그 일을 할 때 분별력있게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우리말 중에 ‘깜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깜은 ‘감’에서 왔는데, ‘옷감, 신랑감’ 등으로 쓰이며 ‘재료’를 뜻하는 말입니다. 좋은 옷감은 좋은 옷을 짓는 데 쓰고, 그렇지 못한 옷감은 베개 옆에 조각조각 덧붙여 무늬를 내는 재료로 쓰기도 합니다. 감에 따라서 재료가 다르고, 재료의 적합도에 따라서 만들어내는 옷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냥’은 한 냥 두 냥 할 때처럼 돈을 말합니다. 그러니 깜냥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하기에 알맞고 적합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깜냥이라는 단어는 ‘깜냥도 안 되는 사람이’처럼 부정적인 뜻으로 쓰입니다. 우리는 좀 긍정적으로 사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몸 된 교회를 세울 만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과 진리로 세울 만한 그런 깜냥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 지혜가 여러분과 저에게 있을 때, 많은 어리석음 가운데 있을지라도, 또는 본질상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구할 때 주님 앞에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그 지혜를 솔로몬 왕이 구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묻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b)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의인과 악인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공평하게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솔로몬에게 특별히 꿈에 나타나서 물으실 때에는 특별한 것을 주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하셨을 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는데, 솔로몬에게 지혜가 없었는가 하면 아닙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2장 9절에 보면, 아버지 다윗 왕이 아들 솔로몬이 지혜로운 사람임을 인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왕상2:9) 어려울 때 선대한 사람을 축복하고, 다윗 평생에 그를 괴롭혔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죽음에 내려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지혜로운 사람이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 것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이미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아들들 가운데 솔로몬이 왕위계승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지혜가 있고 용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될 만한 지혜도 있었다는 말이죠. 우리는 타고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재능이 다르고 달란트가 다른 것입니다. 이미 지혜를 가진 솔로몬이 하나님께 특별한 지혜를 구했습니다. “왕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8-9) 솔로몬은 왕이 된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선으로 다스릴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왕 노릇만 잘하는 것을 넘어서서 참된 선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여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10절에 축복하며 말하기를,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얼마나 기쁜 기도였든지,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장수도 주시고, 부함도 주시고,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해주시고, 영광도 보너스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응답은 우리가 평생에 받고 싶은 복들입니다. 장수와 부자 되는 것과 원수를 대적하는 것과 영광. 그러면 우리 기억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평생을 마음에 품고 있는 이 일들은 하나님이 덤으로도 주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런 기도제목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응답해주시겠지만, 주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는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내 마음에는 들겠지만,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불러서 구원하시고, 몸 된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이 소망 없는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쓰시기에는 합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악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버텨낼 수 있는 지혜를 구할 수 있기 원합니다. 그래서 9월 달이 되면 하반기 사역이 시작되는데, 하반기가 되었든지 내년 사역이 되었든지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여러분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20대 때 젊은 청년들은 학교에서 학급 대표를 맡거나, 무슨 부장을 맡아도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마음에 드는 생각은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입니다. 이런 의문은 젊을 때만이 아니라 우리 평생에 따라다니는 생각입니다. 무엇인가 도전하고 헌신한다면 항상 따라다니는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일을 계속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일을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도전과 헌신을 하면 대번에 ‘과연 내가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졌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덤으로 주실 수 있는 장수를 구하고 부함을 구하고 원수를 물리쳐달라고 구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도전하고 ‘과연 내가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고 마음에 걱정이 생기면, 주님 앞에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이미 왕이 될 만한 지혜가 충분히 있었던 솔로몬이 세상을 선으로 분별하여 다스릴 수 있게 하는 지혜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그 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은 그 지혜로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올 것 같은 어마어마한 문제를 해결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두 명의 창기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둘 다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일에 대해 판결해달라고 합니다. 두 여인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여인의 아기가 죽었는데, 그 죽은 아기를 보고 가만히 다른 여인의 아기를 데려다가 자기 아기라고 했습니다. 누가 본 사람도 없고 증거도 없는 한 아기가 누구의 아기인지 판가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솔로몬은 칼을 가져와서 그 아기를 정확히 둘로 나누고, 그 절반은 이 여인에게 나머지 절반은 저 여인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아기가 아니었던 한 창기는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기는 없으니, 칼로 나누면 아무도 살아있는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고, 아기가 없을 바에는 다른 여인도 아기가 없는 게 좋겠다는 심보입니다. 그러나 원래 엄마는 아기를 나누지 말고 상대방 여인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누가 진짜 엄마인지 다 드러났고, 공의가 나타난 판결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때 판단할 수 있는 지혜의 응답을 받은 후 첫 번째 판결이었습니다. 아주 지엽적으로 보입니다만 지엽적인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양방과 한방의 대결구도가 있습니다. 한 쪽이 먼저 혜택을 받으면 다른 한 쪽은 손해를 보는 관계입니다. 이 두 그룹은 한쪽이 살면 다른 한쪽이 죽는 문제처럼 생각을 합니다.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며, 한 쪽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전 세계의 대부분의 문제는 바로 이런 문제들입니다.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사람의 갈등이 심각한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각자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 속에 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기를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회적인 갈등이든, 개인 간의 갈등이든 간에 우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갈등은 그대로 놔두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로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길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해야 할 줄 압니다. 여러분과 제가 먼저 은혜를 받으면 원수도 친구가 된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덤으로 해결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갈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 내가 충분히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내가 충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나에게 알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야 할 줄 압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이 흡족할 뿐 아니라, 장수의 축복, 부함의 축복, 원수를 물리치는 축복, 영광을 얻는 축복을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선악간에 분별하여 다스릴 지혜를 구해서 응답받고도 더 많은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왕상4:29-34) 우리 평생에 교훈적인 말을 몇 개나 할 수 있겠습니까만 솔로몬은 잠언을 3천 가지나 말했습니다. 또 식물백과 동물백과를 펴냈습니다.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어서 십 수 년을 보내면서 500권의 책을 지었습니다. 여유당 전서 500권입니다. 항상 관찰하고 살았습니다. 솔로몬은 더 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면서 관찰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또 특별히 시집을 좀 읽으시면 좋습니다. 보통 시집은 대학입학 시험 볼 때나 연애할 때나 한 번 보고 말지만, 자연을 관찰하고 사람을 살피면 그 속에서 새로운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새로운 과학기술은 대개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한 속에서 얻어집니다. 헬리콥터의 눈이 잠자리 눈을 본떠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숨겨두신 지혜가 많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그것을 다 연구했습니다. 우리가 여행도 하고 어디 다니기도 좋아하시고, 식물을 좋아하시고 식물 이름을 잘 아시는 분도 계십니다. 거기서 새로운 지혜와 삶의 통찰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식물과 동물을 관찰하면서 얻은 지혜는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나요? 왕이 될 만한 지혜가 날 때부터 있었고, 살아가면서 얻은 삶의 지혜도 많이 있었고, 거기에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분별의 지혜까지 받았습니다. 인생 전반을 잘 살았던 그런 솔로몬이 인생 후반에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솔로몬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잃어버리고 나면, 세상이 추앙하는 무슨 기업을 잘 세웠네, 인재를 키웠네 하는 평가들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이유가 뭐냐 하면 정말로 진실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장수도 취하고 부도 취하고 영광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떠나면 모든 존경과 존중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9)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지혜를 구해야겠지만, 솔로몬을 보건대 우리가 구할 특별한 기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구할 것인지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지금부터 볼 기도는 바울이 각 교회 성도들을 향해 한 기도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대상자는 우리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부터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하나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부르심의 소망과 영광이 얼마나 큰지 알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즈음 시대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별 수 없더라는 생각이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영접합니다. 이런 생각을 영접하고 나면 소망이 없고 하나님의 힘의 위력과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 결코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 교수나 의사나 판사나 종교지도자들이 다 무너져서 우리가 예상하는 기대치 범위 안에 있을지라도,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장 9절을 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웬만하게 선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며,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누가? 바로 우리가 말입니다. 그러면 또 사도 바울 혼자 이것을 원하고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능력 많으신 주님이 이와 같은 것을 성도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볼 때 숨이 막힙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나에게 주신다고 하실까 말입니다. 감당하기 어렵고 벅찬 이런 놀랍고 영광스러운 지혜를 주신다니 숨 막히지 않습니까? 졸리십니까? 마지막 골로새서 1장 9절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겠어’ 하고 말합니다. 이제 그렇게 말하지 맙시다. 본질적으로 다 알지는 못하지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으로 아는 것으로 채워주십시오. 저도 어리석어서 앞뒤가 없는 일도 많이 합니다만, 그러나 어리석다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 응답이 없겠습니까? 안 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곧 성도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또 모든 견딤과 오래참음에 이르게 해달라고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환란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 잘못을 이유로, 또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또는 오해를 받아서 애매한 고난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모든 견딤과 오래참음에 이르게 하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사도 바울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보면 뭔가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는 하나님의 마음과 맞춰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가서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골로새 교회에 가서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에베소 교회에 가서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간구의 내용이 거의 동일합니다. 모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우리 마음 눈을 밝혀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의 풍성함을 알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솔로몬이 한 기도도 놀라운 기도입니다. 주님 마음에 들었던 기도입니다. 물론 끝까지 온전하지는 못한 기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오신 이후에 사도가 우리를 축복하는 기도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과 저의 기도인 것입니다. 이 기도가 우리 교회를 세워가면서, 영혼을 도와가면서, 진리의 말씀을 붙들어가면서 응답받을 기도입니다. 솔로몬이 그랬듯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초보적인 지혜를 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더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을 때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주실 것을 구하시고 응답받읍시다. 우리 평생 갈등의 문제, 우리 괴로움의 문제, 우리의 사는 문제들에 얽매인다면 평생의 신앙생활을 통해서도 주님 마음에 합한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경각심을 좀 가집시다. 웬만한 그리스도인, 그렇고 그런 신앙인들에게 우리를 견주면 결단코 우리 신앙의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얼마나 불행합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영광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신앙은 도대체 무슨 신앙입니까. 사람의 어리석음은 평생 우리 곁에 있습니다. 나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셨지만, 특별히 주지 않으신 재능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영광일 수 있습니다. 죄인되었던 우리를 주님께서 부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맡기시고 진리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일을 맡을 수 있도록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건 좋은 소식입니다. 이 기도를 하고 이 응답을 받는다면 돈 좀 더 벌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그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 보이면 원수도 친구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짐, 관계의 어려움에 얽매여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의 말씀과 교회를 세우는 일에 부르셨으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응답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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