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 평생토록 젊어갈 신앙의 고백(사무엘하22장) | 이정식 | 2019-09-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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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왕이 된 이후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한 책에서 이렇게 한 줄 썼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40여 년간의 통치의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냈다.”라고 말입니다. 다윗 하면 시편의 놀라운 시를 쓴 사람이고, 요나단과의 우정어린 드라마도 있고, 목축을 했던 목동의 아름다운 삶도 있겠고, 하나님을 묵상하며 비파와 수금을 타는 젊은 다윗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도합 40년 동안 재위에 올라서 한 대부분의 일이 전쟁이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순간부터 전쟁이었습니다. 사울의 질투를 받아 광야에서 십여 년 이상 쫓겨 다니면서 무수한 전쟁과 마음의 시련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서 ‘나의 인생은 연속되는 싸움이며 전쟁이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여러분과 저의 삶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전투와 같고 전쟁과 같습니다. 분명한 대적과의 싸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을 지키면서 이 세상을 이겨가고자 하는 모든 싸움도 여기에 속합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22장 5-6절에 보면 반복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삼하22:5-6) 단어들이 하나같이 무겁습니다. ‘사망의 물결,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생애동안 영예를 누리는 왕좌에서도 오랫동안 전쟁을 했고, 그의 대적만도 여러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인생의 싸움을 싸우시고 계시다면 다윗과 같이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싸우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고자 하면 할수록, 선한 싸움을 싸우고자 하면 할수록 전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삶입니다. 1절 보면 벌써 대적이 등장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날에”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대적이 사울이 맞지만, 그에 앞서 ‘모든 원수’라고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여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의 싸움은 특별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사울에게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실 때까지 자기 마음을 지켜내려는 싸움을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뒤를 보려고 동굴 속으로 들어왔을 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동굴 속에 있었습니다. 사울 왕이 자기 주군을 해하려고 오래토록 쫓아다닌다는 사실을 부하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하들이 다윗에게 절호의 기회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랬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울의 옷깃만 베고 왔습니다. 그것조차 마음에 찔려 했습니다. 사울과의 싸움이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두 번째 기회가 또 왔습니다. 사울과 아비새가 다윗을 치려고 왔다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다윗과 부하가 올라가서 잠들어 있는 사울과 그 부하의 침상 옆에서 창과 방패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역시 주위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대적을 처치하는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다른 일로 그를 폐하시든지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하며 끝까지 자기 마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자기 손으로 해하지 않고 떠나왔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우리도 비슷한 싸움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내 마음 속 갈등과 싸우는 싸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다루신 후에 다윗은 또 다른 적과 싸워야 했습니다. 많은 부하들이 암몬과 싸우기 위해서 전쟁터에 가 있는 동안 다윗이 왕궁을 거니는 동안 한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와 동침한 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야 장군을 불러 동침케 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후에 전장에서 우리야 장군을 죽게 하라고 지시하고 결국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 갈 때 사울의 가문 중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전에 요압 장군도 우리야 장군을 죽게 하는 일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그러니 그 소문이 알게 모르게 궁궐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또 다른, 전혀 다른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선한 양심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였던 다윗이 왕좌에 오르고 난 후에 그의 본심이 드러나고 야욕이 드러났다고 하는 비난이 있지 않았을까요.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후에 얼마나 자기 영혼을 책망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 했겠습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더 이상 신앙의 싸움을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할 것입니다. 더 이상 교회를 위해서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의 싸움은 자기의 죄악과의 전쟁입니다. 다윗은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불의의 행동을 통해서 잉태한 아이가 죽을 것을 예언 받은 후,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주실까 하여 7일 동안 금식하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날로 목욕하고 다시 음식을 먹고 왕의 업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삼하22:2-3)라 고백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 앞에 나설 이유 없지만, 나의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피할 피난처시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도 아직 이런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 다윗만큼 범죄한 사람이 있습니까? 다윗만큼 높은 직위에 올라 범인들도 하지 않을 범죄에 떨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주요 일간지 톱 기사에 ‘그가 이런 범죄를 했다’는 내용이 드러나고, 모든 국민이 의심과 비난의 눈초리를 들고 볼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이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다윗은 떳떳하게 자기를 다시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주님이 모든 죄악을 도말하신다는 그 믿음이 헛된 믿음이 하니라 실제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가문에 속한 시므이가 도망가는 다윗을 향해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16:7b)하며 저주했습니다. 그럴 때 다윗이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변명할 수 없는 죄를 범했지.’ 또 시므이가 저주할 때 다윗 주변에 있던 장수들이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뭐라고 했나요?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16:10)하며 그대로 그 저주를 들었습니다.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던 자기 범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사함을 바라보면서, 나의 방패요 피할 바위 되신 주님 앞에서 깨끗함을 받은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를 들어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가장 강력한 대적은 총사령관 요압이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 아사헬, 아비새였고, 그는 손윗 조카였습니다. 다윗이 용맹했지만, 요압도 용맹했습니다. 다윗이 지혜로웠지만, 요압도 지혜로웠습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했다가 그술로 가서 3년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때 요압이 드고아의 한 여인을 찾아서 다윗 왕에게 나아가서 어떻게 말할 것을 다 입에 넣어줍니다. 드고아 여인의 말을 들은 다윗이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삼하14:19a)하고 요압이 배후조종을 한 것을 눈치챕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충성했지만 다윗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혜도 있었습니다. 요압은 우리야 장군을 죽게 하라는 다윗의 명령을 받고 이유도 묻지 않고 그대로 행하는 충성됨을 보여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갑자기 인구조사를 하려고 할 때 요압은 하나님을 내세우면서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삼하24:3b)하고 견책했습니다. 요압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목 정치인이 서로 평생 등지고 사는 이유입니다. 때로 목사님들도 어떤 이유로 등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압 장군은 마지막에 자기 야망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나님을 섬겨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일왕국을 이룬 이후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아도니야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한 때 다윗은 자기 명령을 모른채 하고 정적 아브넬을 제거한 요압 장군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기름부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삼하3:39) 지혜로운 다윗, 용맹한 다윗, 감성적인 다윗, 전략가인 다윗이 손윗 조카인 요압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는 고백입니다. 사울은 오히려 쉬웠을 정도입니다. 요압은 왕이 된 후 30여 년 동안 제어하기가 어려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 못 들게 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이런 싸움을 싸웠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의 인생을 요약해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들에게는 없나요? 있습니다. 다윗의 이런 싸움을 주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다윗은 ‘그의 귀’(삼하22;7), ‘그의 코’ 와 ‘그의 입’ (삼하22:9), ‘그의 발’(삼하22:10)처럼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얼마나 쉽지 않은 싸움이었는지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로다.”(삼하22:18)라고 고백합니다. 사울 왕이 많은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쫓을 때, 다윗은 4백명 또는 600명 하고 도망다녔으니 사울은 갑이었고 다윗은 을이었습니다. 요압 장군이 직분상으로는 다윗의 부하였지만, 실제로는 다윗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 보다 강한 대적들이 다윗 주변에 항상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보다 강한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까? 여러분을 압제하고 괴롭게 하고 있습니까? 그럴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던 잠재적인 대적이 점점 눈에 보이기 시작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싸움 속에서 다윗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의 그 싸움을 격려하기 원합니다. 오늘 사무엘하 22장의 고백은 다윗이 말년에 한 고백입니다. 왕이 될 때 나이가 30세였고, 왕으로 40년을 통치했으니 지금 이 고백은 다윗이 70대에 하는 고백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유년주일학교 잘 마치고, 학생부 청년부 마칠 때쯤 사회에 나가면 세상 물정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세상 물정을 알면 알수록 더욱 하나님을 향한 신앙 앞에 젊어져 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요?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삼하22:21-23)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사울이 비록 무법하게 악으로 대했지만, 나는 그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볼 때, 만일 다윗이 자기 손으로 사울을 폐하거나 복수했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다윗의 나라를 강하게 세울 수 있게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다윗은 나를 건지실 분도 하나님이시고, 내 왕위를 붙드실 분도 하나님이시고, 내 나라를 끝까지 인도하실 분도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이 비뚤어지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삼하22:25-26)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세상 물정도 알고, 교회도 알고, 나의 어려움도 알고 당신의 괴로움도 알고 나서는 ‘믿음이란 여기까지구나!’ 하며 선한 소망을 내려놓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면 그분에게는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라고 했으니, 계속해서 못된 것만 보일 것입니다. 못된 이야기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했던 이야기 또 하지 마십시오. 물론 평생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사무친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나님 앞에 토설하시고 울면서 원통하다고 하면서 쏟아내시기 바랍니다. 한나처럼 그렇게 쏟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 쏟아내신 후에 주님의 깨끗하심 속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부패와 부정을 보고 자기 소망을 꺾어버립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어러운 싸움을 싸우면서도, 자기가 범한 변명할 수 없는 범죄를 행하고도 주님의 깨끗케 하심을 맛본 후에는 거기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자비하심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도리어 주님의 완전함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깨끗하심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부패와 못된 것만 보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자비하심과 완전하심과 깨끗하심을 보지 못하니 신앙 없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완전함을 소망할 때 주님의 완전하심을 보여줍니다. 내가 더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깨끗하심을 보여주십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싸움을 싸우면서도, 사람의 욕망의 강함을 알면서도 주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몰라도 내가 하나님의 깨끗하심을 소망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따라 깨끗함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집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 때문에 넘어집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옛 일을 반복하면서 그냥 주저앉아 있습니까? 더 이상 신앙의 소망을 꿈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고 나면 왜 그렇게 산단 말입니까! 그렇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무엇을 위해 살까요? 세상 물정도 아시고, 세상 부패도 아시고, 신앙인들의 부패도 아시고, 사람의 욕망도 아시고, 요압처럼 웬만해서는 드러나지 않을 숨겨진 욕망도 아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사람의 부패에 우리의 신앙을 끝낼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살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따라 살고, 그래도 하나님의 깨끗하심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주님의 거스리심을 본다면, 다시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께 다시 돌아가기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70대가 되어서도 동일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삼하22:2-3) 다윗은 항상 젊은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삼하22:30)하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삼하22:34)라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세상 일에 눌리고, 신앙인들의 부패에 눌리고, 지나간 일을 계속 곱씹으며 우리 전체적인 신앙의 도전도 끌어내릴 때, 다윗은 거기에 주저앉아 있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암사슴의 발같이 높은 곳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지나간 이야기 그만합시다. 그리고 똑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맙시다. 우리 지체를 괴롭히지 맙시다. 우리 지체를 끌어내리지 맙시다. 그런 사악한 자리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끝으로 다윗을 이렇게 젊은 신앙으로 이끌어간 소망이 무엇인지 사무엘하 23장 3-4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삼하23:3-4) 최근 한 달여 동안 맑은 하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흰 구름도 아름답습니다. 다윗은 바로 맑고 찬란한 아침 빛과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의 깨끗한 느낌, 그 느낌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그런 자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려서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영상입니다. ‘나는 내 하나님 앞에서 세상이 어떤 길로 가고, 교회가 어떤 부패로 흘러떠내려 갈지라도 나는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되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 되기를 힘써서 아침 빛 같은 사람이 되고, 비 갠 후에 움돋는 새 풀 같은 자가 되기 원한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소망을 가지기 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특별한 축복입니다. 오늘 예배 후에 식당에서 맘 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배 한 시간 잘 드리고 1층에서 은혜 다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 신앙이 아닙니다. 지체를 힘들게 하지 맙시다. 우리가 의도치 않게,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반복해서 죄책을 말함으로 신앙의 소망을 끌어내린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이런 습관이 교회 안에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할 아픔과 상처가 있다면 주님 앞에 다 쏟아내시고 토설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후에 아버지 내 마음이 주님의 깨끗함 앞에 학생처럼, 청년처럼 서기 원합니다 하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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