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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유혹 앞에 장사 없습니다 (고전 9장~10장 13절) 이형주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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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전 9-1013

 


"유혹 앞에 장사 없습니다"

 


  잔잔하기만 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아무런 위기나 도전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신앙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는 언제나 부딪히며 불꽃을 튀길 수밖에 없고,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속이려고 애를 씁니다. 마귀는 우리의 가정을 헤집어 놓기 원합니다. 마귀는 우리 교회를 갈라놓기 위해 지금도 성실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싸워야 합니다.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이야기하며, 홍해의 기적과 구름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하늘에서 온 만나와 반석에서 낸 물이 각각 침례와 성령의 임재와 그리스도로부터 온 은혜였다고 설명해줍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우리와 똑같이 구원 받았고, 물과 성령의 침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경험했으며 하늘로부터 오는 떡과 물을 마시며 예수님의 은혜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 같이 경험했고, 오늘 우리 교회의 성도들도 다 같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10장 5을 보십시오. 다 같은 은혜를 경험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지금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이런 말을 왜 하는 겁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런 역사가 본보기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한 것처럼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한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악한 일의 이면에는 우상숭배라고 하는 거대한 죄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이 별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무언가를 올려놓으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몰아내고는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이 앉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이고 왕입니다. 전부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살아갑니다. 옳고 그름이 자기에게 달려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자기 자녀를, 돈을, 권력을, 쾌락을, 세속적인 성공을, 친구를, 가족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우상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생활습관을 따라서 그 생활습관이 데려가는 불경건한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행입니다.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 1세대가 멸망의 길로 간 이유가 바로 우상숭배로 인한 악행들이었고,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하고자 하는 말도 이것입니다. 너희가 이와 같은 잘못으로 멸망의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본보기가 되어 말세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교회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우치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 같이 구원과 침례와 주의 만찬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우리도 그들처럼 멸망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다는 경고입니다.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동일한 유혹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자랑할 여지가 없는 시험의 시기가 누구에게든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영웅, 기도하며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들, 복음 사역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친 사람들도 언제든 갑자기 끔찍하게 약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랜 신앙생활의 경력으로 여러분의 믿음이 단단히 서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았고, 이제는 더욱 더 그런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신앙의 경력이 있다고 자부하십니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누구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일순간에 자기 안에서 도덕적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코가 납작해 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는 영원토록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완전한 모습이 될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두려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염려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 바울이 왜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확실한데,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때때로 죄에 넘어지고, 악행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한들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두려움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운동경기 말하자면, 올림픽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올림픽은 운동선수들에게는 꿈의 무대입니다. 그 무대에 올라가기 위해 평생 땀을 흘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올림픽은 명예와 영광의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 중 누구도 허투루 경기에 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금메달의 영광을 위해 음식조절도 하고, 죽을힘으로 몸을 단련하고, 친구를 만나는 일, 술 담배, 놀고 싶은 것 다 참고 견딘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영원하지 않은 메달을 얻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훈련하고 달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것을 위해 달려갑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죽음을 이기는 생명, 슬픔과 고통이 사라진 세상을 위해 달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값진 수고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에 참여하는 것인가요?! 하나님은 온 우주를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려는 위대한 계획에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믿음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위대한 경기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혹은 잘못된 유혹에 패배하여 넘어지게 되면, 어쩌면 이 경기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흥겹게 축제에 참여하고 있는데 나는 제외가 되어서 경기장 밖에서 바라만 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고전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부끄러운 구원, 하나님의 상급을 받지 못하는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징계를 두려워할까요? 누가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변두리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할까요? 그것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구원 받은 사람을 그렇게 묘사합니다. 다윗이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이런 감정을 공감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바울과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픔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바울은 그것이 두려웠고, 교회를 향해서 너희도 그것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 살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서 전혀 마음에 가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픈데, 자기들은 자기들끼리 즐거웠습니다. 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아십니까? 자기의 구원에 확신을 갖는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침례, 주의 만찬은 성서침례교회에서 인정하는 단 두 개의 성례전, 즉 거룩한 신앙의 의식입니다. 이 두 의식은 그 의미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의식입니다. 하지만 침례도, 주의 만찬도 그 행위에 있어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침례 받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만찬에 참여해서 먹는다고 신비한 효력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침례와 주의 만찬은 엄중한 책임이 따르는 선언입니다. 마치 결혼식 자체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고, 결혼식 이후에 책임 있는 결혼생활로 보답해야 하는 것처럼. 침례와 주의 만찬은 그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따르는 책임이 중요한 의식입니다.

  내가 드린 예배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는 것, 내가 고백한 신앙의 고백에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고백한 그대로 이 몸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고백한 가치를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신경질적이고, 오만하고, 게으르고, 폭력적이고, 음란하고, 정도라는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을 자기 내키는대로 선택하며, 손해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기 유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 의를 행하는 사람, 공평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 정숙한 사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자기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더 사랑하는 사람, 친구를 위해, 아니 원수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넘치는 사람. 곧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 신앙의 고백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기로 작정할 때 이 세상의 거치는 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이 설명한 운동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보십시오. 운동선수는 자기가 받을 영광을 위해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얼마간 포기하면서까지 훈련합니다. 사람들은 복음과 예수님을 닮는 일에 대하여 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복음을 위해 예수 닮기 위해 감내해야 할 부담스러운 수고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너희가 죄와는 싸우지만 피 흘리기 까지는 아니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혹시 나는 그런 믿음의 싸움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두려워하십시오. 경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시험도 싸움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믿음의 싸움이 없음을 이상히 여기십시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합니다. 반대로 믿음의 싸움이 너무 치열하여 괴롭고, 힘든 분이 있습니까? 믿음직한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13절에 하나님은 미쁘사!라고 합니다.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 하다. 믿음직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확실한 분이예요.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시험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누구라도 여러분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넘어질 즈음, 피할 길을 내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버티고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어디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믿음은 영적인 것인데,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육신적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무가치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다 나은 것,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이 세상에서 내가 바로 이 육신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영적인 것이라고요!? 우리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있다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몸으로 하는 거예요. 입이 아니라, 미래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 몸으로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싸우지만, 싸움은 이 몸으로 여기서 하는 겁니다. 그 싸움의 흔적을 여러분의 몸에 새기십시오. 그 싸움의 간증을 쌓아서 나누십시오. 그것이 우리 가정을 지키는 길이고, 우리 교회를 지키는 길이며, 우리 개인의 삶을 지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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