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8월 4일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삼상21:10-23:5) 이정식 2019-08-10
  • 추천 0
  • 댓글 0
  • 조회 416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5617620

   오늘 말씀의 제목은 223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지를 내가 알기까지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천지에 모든 만물이 있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주목받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뭔가를 하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적은 도움이 필요할 때 비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급해서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 다윗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믿고 들어갑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실까 일해주지 않으실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일하시는 건 분명했고, 다만 어떻게 일하실까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믿음을 믿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내 삶에 관심 많으시고,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상 21-22장은 다윗이 참 곤경에 떨어집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을 알고 나서 다윗은 도망을 갔는데 얼마나 긴급했던지 혼자 도망을 갔습니다. 부하들 한 사람도 데리고 나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하들 데리고 오면 더 쉽게 발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망 다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가서 먹을 걸 좀 달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이 제사 드리고 나온 떡 밖에는 없어서 그것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골리앗의 칼을 빌려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하였습니다. 신변을 보장받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아기스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명성이 자자한 다윗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위협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엿들은 다윗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미친 척을 했습니다. 대문짝을 그적거리고 침을 흘렸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다윗이 이때에 두려움 때문에 믿음이 없는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정말 구사일생 살아야 하는 다급한 순간입니다. 전쟁의 순간에 기도 2시간 하고 전쟁할 사람 없습니다. 만약 다윗이 한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인생에 한 번도 이런 위기에 몰려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다윗이 미친 체하여 스스로를 건져냈습니다. 다시 떠나 아둘람 굴에 도망하였습니다. 다윗이 도망한 아둘람 굴로 다윗의 가족들과 환난 당한 자, 가난한 자, 원통한 자들이 400명이나 모여들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완전히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다윗의 상황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보통 세상에서는 10년 주기로 인생의 운이 바뀐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논리에 따르면, ‘내 운이 다했나 보다.’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인정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에게서 왕이 될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입니다. 그랬던 다윗이 왕이 되기는커녕 살 여망까지 궁지에 몰리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처지에 몰리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데, 정말 살아계신가 아닌가하고 의심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일하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주 주님은 들에 핀 꽃도 들풀도 기르시는 분이시고, 날아가는 참새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여러분과 저를 위해 하나님께 우리의 일생동안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어떤 문제든지 돌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다윗은 언제부터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믿음에 이르렀을까요? 사실 다윗이 성경에 등장할 때까지는 아무도 다윗을 몰랐습니다. 다윗이 성경에 등장할 때는 15세 전후였을 것입니다. 다윗의 가족조차도 다윗이 안중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성령이 충만했던 사무엘 선지자조차 다윗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으려 할 때 장자 엘리압부터 부으려고 했고, 하나님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셋째...계속 내려가면서도 다윗을 짐작도 못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여기 성경에 다윗이 등장하기까지 아무에게도 알려지거나 주목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성경에 갑자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만 다윗을 알고 계셨고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태에서 조직될 때부터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런 시절에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혼자 양을 먹였습니다. 다윗이 거친 유대광야에서 양을 칠 때 그의 적은 사자와 곰이었습니다. 양치기 소년처럼 마을 사람들아, 늑대가 나타났다!”고 고함을 쳐봐야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종종 사자도 곰도 양떼를 덮치러 오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까? 다윗은 그래서 하나님이 익숙했습니다. 저는 가끔씩 제가 제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있는건가 생각해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상황은 하나님만이 거기에 계셔야 할 상황에 우리 자녀들이 있을 그때를 좋아합니다. 부모가 감싸주고 모든 것을 도와주는 상황을 별로 안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익숙해야 할 시간을 자꾸만 뒤로 밀어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방목으로 자랐습니다. ‘니 알아서 해라.’ 그런데 혹시라도 제가 자녀를 기를 때 자녀를 감싼 적은 없나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상황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못하고, 그 이름을 몰랐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함께 할 수 있는 상황 속에 있었고, 그 거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힘든 상황에 처해 계십니까? 하나님이 도우실 은혜로운 상황입니다. 통장에 잔고도 많고, 친구도 인정해주고, 교회도 좋고 무사안일한 상황은 축복받은 상황이긴 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게 됩니다. 골리앗에게 나아갈 때 사울 왕이 자기 갑옷, 곧 왕의 갑옷을 입게 했습니다. 웬만한 무기가 뚫지 못하는 좋은 투구와 갑옷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 움직여보다가 익숙하지 않아서 다 벗어놓고, 양을 치면서 짐승과 싸울 때 쓰던 물맷돌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양궁선수들은 세계적인 선수들입니다. 세계 1위인 선수가 10점 타겟에 10발을 다 맞출 수 있는 확률은 그렇게 놓지 않습니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도 고려해야 하고 그날 컨디션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10, 9, 8, 엉뚱하게는 표적에 안 맞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물맷돌이 아무리 정확하기로, 단번에 골리앗의 급소를 맞힐 수 있겠습니까. 9점대에 맞았으면 골리앗이 쓰러질 일이 없습니다. 정확히 10점대에 꽂혀야 합니다. 다윗에게 그런 실력이 있기는 하지만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골리앗은 온몸에 무장을 했기 때문에 그 틈새인 이마에 물맷돌을 맞출 수 있는 확률도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담대히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에게 익숙한 물맷돌 못지않게 하나님이 익숙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익숙한 사실에 의지하고 골리앗에게 나아간 것입니다. 주님이 사자와 싸울 때에도, 곰의 이빨 사이에서 양을 꺼낼 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거친 광야에서 혼자 내버려졌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익숙함 때문에 다윗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에 익숙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익숙해진다면 내가 내던져진 상황,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서 버려지는 상황, 시기와 질투 때문에 혼자가 되는 상황, 도대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에게서 처음부터 기름부음을 받을 후보가 되지 못한 이유는 얼굴이 붉고 예쁘고 키도 좀 작은 편이어서 왕의 후보로 가늠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며 시편에서 무수히 많이 고백합니다.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또한 다윗은 사울에게 들린 악신을 물리칠 수 있는 수금 연주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보면 다윗은 곱고 예술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상의 거친 환경을 대처할 수 있으려면 우리 속에도 거친 심령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다윗을 보니까, 몇 가지 적응되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음에 한 일입니다. 다윗은 쓰러진 골리앗에게 다가가서, 골리앗의 칼을 뽑아서 골리앗의 목을 베었습니다. 다윗은 거기서 승리의 환호를 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베인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사울 왕 앞에까지 들고 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봐도 끔찍한 장면입니다. 용모 반듯한 다윗이, 수금을 탈 줄 아는 다윗이, 천지를 시로 노래할 줄 아는 다윗이 이런 거친 심령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게 하려고 블레셋 군사들의 포피 1백 개를 베어 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블레셋 군대에게 올라가서 죽인 다음에 몇 명을 죽였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신체의 일부를 잘라 오라는 것입니다. 고대 전쟁 때는 다 그랬습니다. 앗수르도, 바벨론도 포상을 주고 또 받기 위해서도 죽은 적군의 신체의 일부를 잘라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거친 심령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삶이 거친 광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거친 싸움을 싸우려면 우리 심령에 거친 마음이 준비되는 게 정상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일을 그대로 했습니다. 곰과 사자를 물리칠 때 피 한 방울 안 보고 물리친 게 아닙니다. 예쁘게 물리친 게 아닙니다. 피를 보면서 물리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더 강건해지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피난처이긴 하지만 피난처만이 아닙니다. 옛날에 절에 갈 때에는 거친 세상에서 좀 평화를 얻기 위해 조용한 암자로 찾아가고는 했습니다. 살아가는 게 힘드니까 좀 평화를 얻으려고 갑니다. 물론 교회도 피난처가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나 청년 학생부는 예쁜 말 아름다운 말을 배우고 듣는 곳이 아닙니다. 그게 능사가 아닙니다. 그런 아름다운 말로는 세상에서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유년 어린이집에서부터, 유치원에서부터 거친 세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잘 웃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하지만 제가 혼자 있을 때에는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생깁니다. 살아내려고 살다 보니까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깁니다. 사람 만나서 접히고 꺾이니까 얼굴에 주름이 생깁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왜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믿음을 익히기 원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 피난처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요새요 산성이 되시니, 그 거친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거친 환경을 만납니다. 아이든 어르신이든 어제까지 준비한 것으로 오늘을 마냥 이길 수 없는 상황을 만납니다. 항상 처음 만나는 상황이고, 새롭게 만나는 도전입니다. 일본이 지금 우리를 도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십니다. 살아있는 게 신앙입니다. 혼자 있을 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쁨으로 찬양하겠지만, 모든 것에서 배제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하여도 하나님을 익숙하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에 점 찍고 돌아가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연결되어서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리 청년 가운데 김시원 형제가 해병대에 지원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지원했을까요? 뭔가 새롭게 되고 도전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척박한 땅으로, 홀로 있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곤고한 처지가 되었을 때, 정말로 주님만이 나의 도움이 되실 그때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 알기까지 말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기다리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무엘상 2317절 보겠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둘도 없는 친구요, 사울 왕의 아들이요, 사울 왕을 이어 후계자가 될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알기를 기다리는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축복하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400명을 인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 풍족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일을 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다윗의 관심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하실 일을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요나단이 한 말은 요나단이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윗에게 되어도 그만, 안 되도 그만인 그런 좋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통해서 행하실 일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416절을 봅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삼상24:16,20) 사울이 군사만 3천 명을 데리고 다니고, 다윗은 무기도 변변치 않은 4백 명을 데리고 다니고 있습니다. 포위 공격하면 단번에 끝날 다윗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제거한 후에 아들 요나단을 왕위에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왕위에 오를 때 다윗이 살아있으면 요나단의 왕국, 아니 자기의 왕국이 든든히 서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하러 온 사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입을 통해서 다윗이 왕위에 오를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코너에 몰려서 언제 죽을지 몰라 미친 척도 하고, 먹을 게 없어서 제사드리고 남은 음식도 먹었던 다윗입니다. 내 인생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비관에 빠질 수 있었던 다윗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안 살아계신지 이제 나는 모르겠다고 할 만한 처지에 있던 다윗입니다. 그때에 변함없이 익숙했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어떻게 하실지 알기까지 나는 기다립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상처와 아픔 때문에 어려움도 있지만, 거기에 내몰릴수록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으로 익숙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거기서 훈련되고 담대해진 마음으로 주님의 선한 일에 힘있게 참여하는 것이 믿는 자의 축복입니다. 혼자 있을 때 입을 열어 믿음의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실제적인 힘으로 우리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8월 11일 유혹 앞에 장사 없습니다 (고전 9장~10장 13절) 이형주 2019.08.17 0 427
다음글 7월 28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사무엘상12-13장) 이정식 2019.08.10 0 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