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사무엘상12-13장) | 이정식 | 2019-08-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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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저는 성경에서 약속하기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직분이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왕이 하나요, 제사장이 또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저는 ‘구원받았다, 천국 간다’는 말이 맞지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녀는 어떤 직분을 받은 사람이냐 하면, 왕이요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우리에게 맡겼다는 말이니, 이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고, 이 말씀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무리 작게 보고 연약하게 보더라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서, 그 말씀을 지키는 일에 모든 것을 헌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다른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칩니다. 스포츠 좋아하시나요? 정치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실 모든 경기나 세상의 원리를 볼 때 원칙만 지키는 사람은 갑갑한 사람이고 외골수라고 여김을 받거나 소통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 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을 뭐라 하는가 하면 유연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원칙도 없이 상황에만 유연한 사람은 원하지 않습니다만,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을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 뚫린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융통성이 있어야 회사 생활도 잘 합니다. 스포츠만 봐도 그렇습니다. 야구에서 투수를 교체해야 할 시간이 다가올 때, 적절한 타이밍을 따라 교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농구에서는 감독이 작전타임을 부르는데, 때로는 상대방으로 넘어간 경기 흐름을 끊어놓기 위해서도 합니다. 축구에서는 선수들이 반칙을 합니다. 반칙을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역시 경기의 흐름을 끊어서 자기 팀으로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도록 반칙하기도 합니다. 교체를 잘 해야 하는데 잘 하면 그게 신의 한 수가 되어 들어가자마자 골을 넣습니다. 반면에 잘 하지 못하면 교체해서 들어간 투수가 다 이긴 경기를 내어주고 말기도 합니다. 신의 한 수가 아니라 악수가 되기도 합니다. 매번 경기를 이길 수는 없지만, 경기 운영의 능력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상사의 의중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는 사원은 승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요구하는 원리나 신앙생활에서 요구하는 원리가 대개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과 제가 살펴볼 말씀은, 모든 사회 속에서 원칙과 상황에 따른 융통성 있는 대처를 요구하고 있지만, 반드시 지키기를 애써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지자여서,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는 사람이며, 또한 제사장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와 화목의 제사를 드렸으며, 또한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종교적 제사를 드리는 일과 현실정치를 모두 관장하는 제정일치 사회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부여했는지, 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삼중직을 가진 사무엘이 까딱 잘못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기 어렵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응답받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상 12장 3절 보니까 사무엘은 정말 이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사무엘은 사무엘이 한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말씀 밖에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약 말씀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말씀의 원칙대로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위기에 몰리거나 코너에 몰리면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사람입니다. 위인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쓴 자서전에 대해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짓말이 없는 자서전이란 세상에 없다고 말입니다.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쓰지 않겠습니다. 굳이 밝힐 일이 없습니다. 또 정말 신앙의 사람들이 하는 간증을 기록한다고 하더라도, 그 간증 속에 얽혀있는 많은 도움을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선별해야 합니다. 또 정치인들은 때로 자기 소신대로 살다가 그 소신을 굽힐 때가 있습니다. 표를 못 받을 것 같으면 소신을 굽힙니다. 같은 동료 정치인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어도 굽힐 수 있습니다. 분당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님이 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가 전국 교회와 신앙인들 사이에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는데, 담임목사님이 자기 부목사를 보호하고 변호하다가 결국은 공개적으로 사죄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경고하신 것으로 알겠다.”며 뒤로 물러났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보면서 만일 저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저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교회가 주일학교까지 다 포함하면 100명이 좀 넘습니다. 그런데 그 100명 전부가 다 반대를 하는 일을 제가 추진했다고 하면 그걸 쉽게 관철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국민의 2/3 이상이 끝까지 반대를 한다고 하면 그 정책을 밀고나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무엘 당시에도 수많은 이권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겠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정치인도 있었겠고, 기업인도 있었겠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게 되면 뭔가를 하게 됩니다.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무엘은 자기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받지 않았고, 다른 누군가를 압제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정치인이 다른 이를 향해 말하기를 “저 사람은 너무 원칙적이어서 말이 안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원칙적이기만 하면 말이 안 통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상황판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유연한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여러분과 제가 때로 고통스러울지라도,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을 끝까지 지키라는 말입니다. 좀 직접적으로 말하면, 만일 내 뜻과 비전을 받아들일 수 없는 회사라면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라는 말입니다. 평생을 회사를 위해 머리 숙이고 일하다가 은퇴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다른 일을 준비하든지 다른 직장을 준비하라 이 말입니다.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대부분은 어렵고 힘들지만 상사의 뜻에 맞춰 생활하라고 조언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런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세상 일 가운데도 그 일을 그만두고 나와 다른 일, 다른 직장을 준비할 일이 있고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이 뭔가 하면 이스라엘에 처음 왕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무엘은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선지자로서 하나님 말씀을 어긋나거나 잘못 행실한 일을 한 번도 행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너희가 안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며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 증언하느니라.”(삼상12:5중) 자기 자랑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세워질 초대 이스라엘 왕 사울을 위해 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 말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일에 뛰어난 사람이기보다, 이 세상 처세에 발 빠른 사람이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가르쳐준 것을 지키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하고, 퇴출을 감수하고라도, 세상으로부터 버림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지키자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8절부터 11절까지 보시면 우리가 처한 처지를 사무엘이 성경 속에 두 장면을 택하여 말씀합니다. 첫째는 이집트에서 430년 종살이 하며 정착해서 살 때고, 둘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해서 살 때입니다. 야곱이 이집트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주권자 되시고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이 사람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세워서 그 압제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두 번째는 건너뛰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몰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을 때,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럴 때에 주권자요 구원자 되신 하나님이 사람 지도자인 사사들을 세워서 그 압제로부터 건져내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면서 주권자 되신 하나님임을 먼저 못 박아 두고는 14절을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이것은 사무엘의 마음입니다.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인 사무엘이 삼중직을 다 가지고 있을 때 진실된 마음으로 순종했다. 사람과 타협하지 않고 순종했다. 이제 내가 너희들의 요청에 따라 왕을 세울텐데, 왕을 세우는 이 시점에서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다음에 세운 왕의 목소리를 너희가 듣고, 그리고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세운 왕의 말을 잘 듣고, 그리고 그 왕이 하나님을 순종하면,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던 거처럼, 이제 세워질 사울 왕의 말도 그렇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왕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이 말씀이 진실됨을 직인 찍듯 하시기를, 17절-18절에 보면 밀 베는 때 곧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 하나님이 우레와 비를 내리셔서 사무엘의 권면대로 이루실 것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완악한 세상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기 원합니다. 오늘 새벽에 비가 왔는데 비가 새벽에 온 것이 감사하죠. 교회 올 때 번개치고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으면 마음에 갈등할 것 같지 않습니까? 갈등하지 말고 교회 옵시다. 한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져서 교회 올 일이 막막할 때 교회 와야 할까요 오지 말아야 할까요? 고민하지 말고 교회 옵시다. 침례교 목사님 중에 가장 유명한 목사님이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구원받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겨울 시골에 눈이 엄청 나게 왔습니다. 담임목사님이 교회에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청년 스펄전이 그 교회로 갔습니다. 목사님이 못 오셨지만 예배는 드려야 했습니다. 한 분 집사님이 준비도 안 된 말씀이었지만, 짧막한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스펄전은 그 말씀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국에서 가장 탁월한 침례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험한 날 교회에 와야 될까요 안 와야 될까요? 교회 오는 겁니다. 경제가 여의치 않습니다. 경제가 여의치 않은데 십일조 헌금을 해야 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하십시오, 아파하면서도 하십시오, 때로 괴로워하면서도 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에는 기쁨과 감사로 할 때도 있지만 아파하면서도 순종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부부지간에 좀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한톨도 없습니다만 가르쳐야 할까요 말까요? 가르쳐야 합니다. 저 멀리 한 분 목사님이 전도하러 가는데 사모님이 좀 힘들게 했나 봅니다. 이 목사님이 전도하러 갔을까요 안 갔을까요? 목사님이 전도할 만음이 전혀 없어서 주머니에 잔돈을 챙겨서 오락실로 갔습니다. 마음이 다 풀릴 때까지 있다가 왔다는 말씀을 저에게 해주셨습니다. 종암교회 한 자매님의 간증입니다. 주일 아침에 남편과 다투어서 속이 상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니까 말씀을 가르치고 구령상담을 해야 하는데 전혀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상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영혼이 구원받았습니다. 그 자매님이 간증하기를, 하나님은 내 감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면 그 말씀이 역사해서 은혜로 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지킨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무엘에 평생 사역하면서 많은 유혹과 시련이 있었겠고 “당신 정말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하지만 사무엘의 마음은 이랬을 것입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 앞에서 어그러진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복이 없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 백성을 축복할 수 없다’ 우리도 이렇게 합시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12:23) 하나님의 길은 처세의 길이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좀 빨리 승진하기 위한 그런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길을 걷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24절 하반절에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12:24b) 선하고 의로운 길을 걷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사무엘은 자기 간증을 통해 권면하기를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확증하고 권고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들은 사울 왕에 대한 이야기가 13장에 나옵니다. 이 13장의 내용은 참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짧게 정리해드립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올라가 블레셋 군대 수십 명을 무찔렀습니다. 이 일을 듣고 블레셋 군사들이 많은 숫자로 중무장을 하고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도 소집되었지만, 창이 있는 사람이 사울과 요나단 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곡괭이 삽자루 같은 농기구가 전부였습니다. 훈련된 수많은 블레셋 군대와 잘 준비되지 않은 이스라엘 오합지졸이 마주하고 보니까 기가 막힌 것입니다. 전쟁을 해야 할 백성들이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웅덩이에 숨기 바빴습니다. 전쟁의 소식을 들은 사무엘은 사울에게 내가 갈 때까지 7일 동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눈 앞에 블레셋 수만 군대가 곧 치러 올라 올 태세요, 온다고 한 사무엘 선지자는 7일 될 때까지 오지 않고, 백성들은 눈앞에서 흩어지고 있었습니다.(삼상13:6-8참조) 사울 왕이 상황 판단이 섰습니다. 마음이 녹아서 빨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여기 100이면 100 다 사울을 선택하여 제사를 드릴 것 같습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7일째 되는 날 늦게 도착해서 하는 말이,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삼상13:13) 하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울이 한 행동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급한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지 않고 왕이 제사를 드린 것이 월권이 되었나 하지만 왕이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딱 한 가지는 사무엘에 기다리라고 한 7일을 온전히 기다리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사무엘은 하나님이 약속한 7일에 도착했습니다. 사울이 제사를 드리고 나니까 도착했습니다. 그 시간차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사울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후에 15장에 가면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광야에 들어올 때 아말렉 족속이 방해하고 대적한 것을 들어 아말렉 족속을 가축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사울 왕은 모든 사람을 멸한 후에 가축 중에 좋은 것은 남기고 시원치 않은 것들만 진멸했습니다. 사무엘이 꾸짖었을 때 사울은 전쟁에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좋은 제물로 드리려고 남겨두었다고 변명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하나님은 순종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좀더 강하게 말합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3a) 순종하지 않는 죄는 점치는 죄와 같다고 했습니다. 복채를 들고 점쟁이에게 가서 점치는 것만 점치는 죄가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 죄 자체가 점치는 죄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왕에서 폐위가 되고 맙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3b) 갖은 이유로, 우리의 삶에 관한 이유로, 주님께로부터 온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완고한 것인데,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점치는 자도 죽일 것이고, 우상을 섬기는 자는 죽일 것이라 했습니다. 죽인다는 말은 공포를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행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받을 응답이 없고, 하나님 앞에 옳다 여김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기뻐하실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 말씀을 순종하려는 자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정조대왕이 한 말이 있습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는 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의 심령이 강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에 원칙주의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부모인 박정희대통령과 영부인이 모두 피살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니 그도 심령이 강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원래 학자적이고 선비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강한 분입니다. 그가 섬기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험한 행로를 걸어본 사람, 혹독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심령은 그 일로 인해 강해집니다. 두 몫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정조대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생사를 돌보지 않고 소신대로 곧장 나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대체로 그들은 두려워 벌벌 떨면서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겉모습만 꾸며서 구차스럽게 요행으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이런 자들은 비록 백 명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왕은 자기를 잘한다고 떠받드는 신하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조는 지금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올바른 소신을 따라 충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다르게 가르칩니다. ‘너무 뻣뻣하면 부러진다. 굽을 줄도 알아야 해.’ 이런 가치관이 우리 사회가 학생들에게, 직장인들에게, 군인들에게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원리입니다. 물론 그렇게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다르게 말합니다. “굽어지기보다 부러지기를 구하라!” 정말 하나님 말씀으로 깨어져서, 설령 직장에서 쫓겨나고 교회에서 떠나갈 일이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단단하게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왕 같은 여러분과 저에게도 말씀 앞에 이렇게 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순종했을까요?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품으면 당시에는 잘 모르지만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암탉이 달걀을 제자리에서 21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품으면, 들여다 볼 때에는 그 속에 아무 변화 없는 것 같지만, 21일이 지나면 병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미닭이 달걀을 품어야만 병아리가 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품을 때, 씨앗처럼 아무 변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품을 때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하실 때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고 했습니다. 작은 씨앗 된 말씀이 돌짝 밭에 떨어지느냐, 길가 밭에 떨어지느냐, 가시떨기 밭에 떨어지느냐, 좋은 밭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처음엔 아무 변화 없어 싹이 보이지 않지만, 씨앗을 품은 밭은 정해진 시간에 싹을 틔우는 것입니다. 사무엘처럼 살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품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실 때 예수님의 씨가 우리 작은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품에 박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품어서 새롭게 하시고, 영적으로 자라게 하시고, 왕같은 제사장으로 쓰임 받는 믿음의 거장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약하는 것은 아무런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재리의 유혹 때문에 말씀이 훅 나가버리고 그 말씀을 내 마음에 심지 못하면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아무런 결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무엘이 말씀을 품으니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처럼 현실을 이유로 말씀을 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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