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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를 때(사무엘상3장) 이정식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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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입원치료 받고 있는 제 침상 옆에 손용국장로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 76세인데 제가 목사인 줄 알고 제게 오셔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사업을 하던 중 50대 초반에 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위 절제수술을 받았는데 2/3 정도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날 살려주셨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주님 저를 살려주셨는데, 제가 뭘 할까요?” 기도 중에 하나님이 마음에 감동을 주시기를 전도해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교회의 무슨 전도프로그램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들은 목소리를 따라 스스로 전도를 시작해서 26년 동안 전철을 타고 전철 첫 량부터 마지막 량까지, 한 량에서 3분간 복음을 전하며 다음 칸으로 다음 칸으로 이동하며 복음을 전했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셨는데, 몇 주 전에 명동역 근처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경찰 허가 하에 복음을 전하며, 찬양도 하고, 간증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참 감동이 되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전도를 하니까 사방팔방으로 복을 주신다는 간증도 하셨습니다. 자기 가족들이 잘 풀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분을 따라 함께 전도하던 다른 성도들도 전도 후에 사업이 풀렸다고, 자녀들이 잘 되었다고 간증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잠깐 감기몸살로 치료받는 중인데, 병원을 나가면 다시 할 거라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지금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간증하는 겁니다.”하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전도에 관한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10:42)하셨습니다. 1회적인 섬김이라도 상을 잃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섬김은 반드시 보상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기복신앙으로 신앙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행한다면 그는 약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자에게도 상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섬긴다면 그는 분명히 기억되고 복을 얻을 것입니다.

   예배를 붙들고 계신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러 오신 여러분은 복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물 한 그릇 섬기는 것도 기억하시는데, 매주 예배하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것은 마땅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도 복 주실까요?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힘겨운 싸움을 싸우는 그를 복 주십니다. 냉수 한 그릇도 기억하시는데.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말씀을 사모하고 배우는 사람도 복 주실까요? 네 복 주십니다. 기도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분들을 주님께서 복 주실까요? 네 복 주십니다. 찬양하는 사람들, 찬양대와 찬양밴드를 섬기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복 주실까요? 네 기억하시고 복 주십니다. 매주 주일학생들을 말씀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복 주실까요? 단발적으로 냉수 한 그릇 주는 사람에게도 상으로 갚아주시는데 왜 복이 없겠습니까. 우리 모두를 기억하시고 크신 하나님은 복 되게 하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사무엘상 230절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가 알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기 때문에 예배하고, 찬양하고, 순종하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섬기는 우리 모두를 낱낱이 기억하시고 복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복된 삶입니다. 계속해서 이런 복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목사나 사역자가 권유하기를 기다리기 전에 덥석덥석, 성큼성큼 섬기시기 바랍니다. 딱 보면 찬양대 남성파트가 부족합니다. 그게 보이면 그냥 와서 섬기시기 바랍니다. 아마, 찬양대장이 상시적으로 대원을 찾고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가좌동이 시골입니까. 이제는 아닙니다. 잘못한다고 빼고, 부끄러워하는 시절이 아닙니다. 대 고양시, 대 일산 시민 아닙니까. 정보나 문화면에서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곳에 살면서 누가 시켜줄 때까지 기다리는 건 옛날입니다. 내가 좀 도와야 되겠다 하는 곳이 눈에 보이면 그 자리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말씀대로 복이 됩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시면 사역자들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더 말씀에 집중하고 더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사무엘상 3장은 특별한 부르심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봅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엘리 제사장이 섬기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주 나타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많은 사람을 축복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를 듣고 축복하였더니 사무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한나가 기도하기를 아이를 주시면 주님께 드리겠다고 했으니, 젖 뗄 무렵에 엘리 제사장 곁에서 섬기도록 했습니다. 한나가 서원한대로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보고 엘리 제사장이 너무 기특하여 축복합니다. 그 축복으로 한나는 사무엘 이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게 되었습니다.(삼상2:21참고) 사무엘에게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엘리 제사장이 나름대로 영험했던 제사장입니다. 그가 축복한대로 한나가 축복을 받았으니까 믿음직한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아들을 잘못 양육했습니다. 두 아들이 제사 직분을 감당하면서 제사를 먼저 드린 후에 취해야 할 고기를 삶기도 전에 먼저 자기 것으로 취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삼상2:30참조). 이 정도에만 그치지 않고 나중에는 신전에서 음행을 벌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엘리 제사장이 근심했겠지만 충분히 깨닫도록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비록 엘리 제사장에게 축복권이 있고 예배의 권세가 있었지만, 그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할 제사장 가문이 타락을 하니까 나머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튼 이때에도 제사는 드렸고, 이스라엘은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은 크시고 능력 많으시고 자비가 풍성하시기 때문에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드리면서도 참되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지를 못한 것입니다.

   무엇으로 이것을 비유할까요? 이제 여름이니까 목이 탈 때가 많습니다. 갈증이 심하면 물을 벌컥벌컥 마셔야 합니다. 언제까지 마셔야 하는가 하면 더 안 마셔도 될 만큼 먹어야 합니다. 다 먹었다, 충분하다 할 때에 물잔을 내려놓으면서 하는 말이 , 살았다!”입니다. 충분히 먹었을 때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물을 먹기는 먹는데 다 못 먹으면, 물을 한 방울도 못 먹었을 때보다 더 참지 못합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았는데 옆에서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하면 난리가 나겠죠.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주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가문이 아무리 패역하게 했어도 복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을 받으면서도 우리 마음에 풀리지 않고 답답한 뭔가가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아먹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으면 다시 목마를 것이지만, 영생하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영생을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할 때 믿는 사람은 괴롭습니다. 바로 그때가 이상이 희귀한 때요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다 하여도 순종할 사람이 없으니까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사무엘상 235절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2:35)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를 찾아 세우고 나면 그가 자기 집을 돌보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의 집을 견고하게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사무엘입니다. 3절 보시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젖 떼자마자 주의 전에서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러면 이미 하나님의 사람인 것 같은데, 4-5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라고 합니다. 가보니까 엘리가 부른 게 아니었습니다. 다시 돌아가 누워있으니 다시 하나님이 불렀는데, 사무엘이 다시 엘리에게로 찾아갔지만, 역시 엘리가 부른 게 아니었습니다. 엘리가 영성이 떨어진 게 확실한지 세 번째 사무엘이 자기에게 저를 부르셨습니까하니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다시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삼상3:9a)고 말해줍니다. 조금 위로 올라가서 37절을 보시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젖 뗄 무렵부터 제사장을 도와 제사를 섬겼으니, 어깨 너머로 배워도 한참을 배웠고 예배도 섬겼지만 사무엘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고, 11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못하고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알다라는 뜻의 야다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며 서로를 아는 것만큼이 긴밀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서두에서 소개해드린 장로님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단지 예배를 드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계속해서 말씀과 교제하면서 내 마음 속에서 그 말씀에 응답하는 사람, 그런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여호와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 말씀인 이 본문에서는 사무엘을 향한 말씀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성도는 이와 같이 주님을 알며 이와 같이 주님 말씀에 믿음을 결합하여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와 같이 말씀을 받지 않고 예배만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니가 믿는 하나님은 대단한 것 같은데 너는 왜 그러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 같은데 당신은 왜 그렇습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분은 아무나 사무엘입니까?’라고 읽을 수 있지만, 그렇게 읽으면 안 됩니다. ‘내가 바로 저 사무엘이어야 하지 않겠나하고 읽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사무엘은 10절에 가면,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고 합니다. 이제 사무엘을 불렀으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살 것인지를 말씀하실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러놓고는 엘리 집안 이야기만 하십니다. 11-14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사무엘을 불러놓고 엘리 집안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가? 그 비밀은 11절에 있습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이미 엘리 제사장과 엘리의 아들들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습니다. 그때에 엘리 집안은 하나님의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그 대표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을 깨우치지 않으니, 아들들이 하나님을 경멸히 여긴 것처럼 엘리 제사장도 그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가문을 치겠다는 심판의 말이 이루어질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귀도 울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사장 믿고 그냥 예배하며 살면 될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사장의 집이 이렇게 망할 수 있느냐며 회개의 심령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 사무엘을 불러놓고 엘리 집안의 멸망을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 가문을 징계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한국교회가 어려워진 이유가 조용기목사님처럼 기도로 신유로 유명하신 목사님이 한국교회를 세우셨지만,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삶의 이치를 생각하고, 요즈음 일어나는 일처럼 국가 간의 문제에 대해 연구할 줄도 알고, 사람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성실히 갈고 닦는 사람을 길러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충분히 기르지 못한 데 있다고 봅니다. 지금 일본하고 한국이 경제보복으로 난리가 나고 있는데, 인터넷 댓글 중에 보니까 나는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일본 제품 좋습니다. 한탄이 되는 것이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에도 손톱깎이도 일제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삼십 년이 지난 요즈음에도 국산 손톱깎이가 못마땅할 때가 있습니다. 제조 기술과 정밀성이 일본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용서가 안 되죠. 언젠가는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이니, 작은 불매운동을 해서라도 우리의 자존심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국민들이 그럴 때, 기업인들과 정부 관료들은 계속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어떤 분야를 더 잘할 수 있을지 열심히 준비하고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회사 생활할 때에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생활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시는가. 인생의 한 문제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2:22)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사진첩을 펼쳐보시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었는지 파노라마처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50대를 넘기신 분들은 더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준비하고 삶을 살아냈던 시간들이 일순간에 다 지나가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야고보서 413-14절에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렇게 소중한 인생인데,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병상에 있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 때 어떤 계산을 해야 합니까? 나의 잠재력은 어떤가. 나의 가능성은 어디까지 나타날 것인가. 또 내가 지금까지 일구어온 성과와 업적은 얼마만큼이었는가. 그것을 견주어보면서 잠재력을 확인하고 가능성을 비추어보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을 위해서 잠재력을 따져보고, 가능성을 열어보며, 지금까지 이루어온 성과를 보면서 내일을 다시 설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너의 잠재력, 너의 가능성, 너의 성과와 업적을 살펴보며 그 다음 스텝을 걸어가는 것은 좋다. 하지만 왜 하나님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보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말씀을 전하다가 타락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살아보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엘리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정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잠재력이나 우리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기 원합니다.

   사무엘을 부르시면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하시고 기도하시고 전도하시고 예배하시고 섬기십시오. 무엇이든지 섬길 자리가 있다면 섬기십시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지만,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지만, 나에게 정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맡기기를 원하신다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종이 듣겠습니다.” 이렇게 응답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먼저 응답하겠습니다. ‘가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바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말입니까. 이렇게 연약한데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징징거렸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기 원합니다.

   사무엘이 응답하고 나니까 놀라운 축복이 왔습니다. 사무엘상 319절에서 21절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 알았더라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요한복음 14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경험 내 이해에 비추어 말씀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북쪽 끝 단에서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평가를 듣기 원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복을 받는 인생으로 마치게 되는데, 여기 송포성서침례교회에 와보니까 여기 이 작은 수 가운데 꽉 차 있더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무엘상 4-6장에 가면 언약궤가 나옵니다. 깨우치지 못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야 할 언약궤는 적인 블레셋의 사기를 더 높여줍니다. 블레셋 5도시로 언약궤가 옮겨질 때에는 각 도시마다 전염병과 독한 일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으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한 영원한 삶이 우리의 현재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오래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에게 도전합니다. 너무 오래 믿으면 작년에 묵상한 말씀을 그대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읽어도 변화가 없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경험과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이 생에 맛보며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그것을 알기까지 알았다고 하지 마시고, 그것을 알기까지 섬겼다고 하지 마시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일대일로 하나님과 만나서 개인적으로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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