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룻기 3-4장) | 이정식 | 2019-07-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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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읽어드리겠습니다. 김소월의 시 ‘엄숙’입니다. “나는 혼자 산 위에 올라서다 / 솟아 퍼지는 아침 햇볕에 / 풀잎도 번쩍이며 바람은 속삭여라 // 그러나 아, 내 몸에 상처 받은 마음이여 / 마음은 오히려 저리고 아픔에 고요히 떨려라 / 또 다시금 나는 이 한 때에 사람에게 있는 엄숙을 모두 느끼면서” 이 시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산 위에 올라가서 퍼지는 아침햇살을 보며 그 햇살에 번쩍이는 풀잎도 상쾌하고 바람도 속삭이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는 상처받은 마음 때문에 저리고 아팠는데, 바로 이렇게 상쾌한 일과 저린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습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있는 ‘엄숙’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웃으면서 앉아있고, 웃는 얼굴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지만, 아프고 저린 일들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아픔과 저림이 늘 있습니다. 물론 좋은 일도 있고 상쾌한 일도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닥치는 게 아니라, 노력을 하는 데도 이런 일을 만나는 것을 보면 사람의 존재 자체가 엄숙함을 알게 됩니다. ‘엄숙합시다!’ 하면서 분위기를 무겁게 몰아가는 그런 엄숙함이 아니라 존재 자체 속에 있는 엄숙함 말입니다. 또 이것은 우리는 서로 존중받고 귀하게 여김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내가 열심히 살아서 자랑할 만한 무용담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멋진 삶을 살아도 여전한 아픔이 있고, 그런 아픔 중에도 햇살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엄숙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벼워 보이는 사람도 그렇고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항상 웃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입니다. 룻기 3장 18절에 보면,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까지는 이 일을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뭔가 하면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수고가 어떤 결과가 될지 모릅니다. 오늘 다 이룬 것 같은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고 힘든 것입니다.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사람들은 점을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복채를 든든히 마련해서 점쟁이한테 찾아가서 물어보면 가르쳐 줄 것도 같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위안을 좀 얻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본질상 모릅니다. 내일 일을 모릅니다. 그냥 모르는 게 아니라 오늘 최선을 다한 수고가 내일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답답하고 이 때문에 힘들고 때로 아픈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를 뿐 아니라, 열심히 했지만 내일 일이 안 되는 것을 몇 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흥을 주셔서 우리에게 흥이 있습니다만 내일도 그렇게 하실까요? 맞습니다. 사람은 내일에 대해서는 ‘바라고 기대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바라고 기대만 하지 오늘 확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나오미가 무슨 일 때문에 ‘이 사건이 어떻게 될 것인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하고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룻기 3장 1절 보니까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지난 주에 나오미가 가지고 있는 복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룻이 워낙 나오미에게 잘하고 복되게 하니까 나오미가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룻을 복되게 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나오미가 가진 복이 아니라 나오미의 친척관계를 통해 복을 주려고 합니다. 모압 땅으로 이주하기 전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면서 맺었던 친척관계 말입니다. 그 친척관계를 통해서 나오미는 룻을 복되게 하기 원했습니다. 룻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가정을 꾸리도록 돕는 것입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오미가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세웁니다. 룻이 누구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웠는가 하면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지 말고 내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라고 했고, 그리고 목마르거든 내 우물을 마시도록 허락했고, 또 일하는 청년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 것을 명하고, 곡식단에서 이삭을 일부러 뽑아서 밭에 버리도록 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며느리 룻을 대하는 이야기를 듣고 작전을 세웠습니다. “오늘 밤에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후에 보아스가 밤에 곡식단 위에서 이불을 펴고 눕거든, 너는 가만히 가서 그 발치께로 가서 누워 있어라.” 이건 19금인데 우리 청년들, 성경은 참 점잖죠? 그랬더니 보아스가 깊은 잠에 있다가 깜짝 놀라서 묻고 보니까 룻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작전은 룻이 저 은혜롭고 기업을 무를 자의 하나인 보아스에게 가서 발치께 나아가 가만히 누우면, 그것이 곧 당시에 청혼을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보아스의 아내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나오미가 가진 유일한 복은 친척 보아스인데, 이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되어서 며느리 룻이 보아스의 사랑을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보아스도 룻을 사랑하고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룻3:10) 룻은 젊습니다. 결혼한 지 10여 년 밖에 안 되었으니 30대 초반입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을 만나서 시집을 가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나이가 든 보아스를 찾아온 것이 처음보다 더 나은 인애라고 했습니다. 룻이 베푼 첫 번째 인애가 뭐였는가 하면, 자기 시어머니 나오미를 버려두지 않고 따라 온 것과, 자기 남편 말룐의 기업을 포기하지 않고 그 기업을 무르기 위해서 함께 낯선 땅 베들레헴으로 온 것입니다. 룻은 아무 소망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인애를 쫓아서 나오미를 섬긴 것입니다. 이제 더 나은 인애는 뭔가 하면, 룻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 젊은 사람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과 엘리멜렉과 말룐과 시어머니 나오미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미 나이가 많은 보아스에게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3:11) 제가 작년이 룻기를 전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룻기는 헬라어성경에서는 시간 순을 따라 사사기 바로 다음에 나오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잠언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잠언의 마지막 장인 31장은 ‘현숙한 여인’ 장입니다.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면 다소곳하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성실하게 사는 여인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현숙한 여인은 ‘능력 있고 용사 같은 여인’을 말합니다. 잠언 31장에 보면 이 여인은 경제활동에도 밤낮없이 참여하여 가계도 꾸려갑니다. 집안일만 하는 게 아니라 남편을 가르치기도 하고 이 여인 덕분에 남편의 이름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기도 하고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기도 합니다.(잠31:10-31참조). 여기 룻이 바로 현숙한 여인의 대표입니다. 룻이 이런 여인이라는 사실을 성읍 백성 전체가 다 안다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작전을 세웠죠? 율법에 맞게 보아스의 발치에 들어갔죠? 보아스가 딱 보니까 이 세상에 이만한 여인이 없죠? 그러니 일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한 번 다짐해 봅시다. 이 세상에 이만한 여인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여인이 됩시다. 이 세상에 이런 남자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형제가 됩시다. 이 세상에 이런 며느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며느리가 됩시다. 이 세상에 이런 시어머니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시어머지가 됩시다. 이 세상에 이런 목사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목사가 되기를 저도 힘쓰겠습니다. 그러니 인애가 뛰어난 룻과 은혜로운 보아스, 어떻게 해서든 며느리를 축복하기 원하는 나오미가 있으니 일은 될 대로 될 것 같습니다. 마땅히 되어야 할 대로 될 것이라고 기대도 할 수 있습니다.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고민은 어디서 오는가 하면, 이런 완벽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데서 옵니다. 최고의 준비, 최선의 준비를 다 했지만, 내일 결전을 치를 때 그 결전이 나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최고의 열매를 거머쥘 수 있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최선의 결과가 아니라 도리어 꼬이는 일도 경험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게 맞는 일인가.’ 이토록 인애를 발휘했건만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답답한 노릇입니다. 신앙도 삶도 어렵게 되는 이유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마가복음은 ‘곧’ 복음입니다. 예일대 교수가 마가복음을 읽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가복음은 글쓰기의 초자라도 이렇게 쓰지 않을 만큼 ‘곧, 즉시’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쓴다‘고 했습니다. 나온 김에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41-42절 보니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마가복음 2장 11-12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했습니다. 한참 교훈하신 후에 마가복음 5장 28-29절 보면,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그뿐만 아니라 5장 41-42절 보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이 이렇게 ‘곧’의 결과를 맺는다면 인생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도 이런 일을 갈구했습니다. 요즈음도 신유한다는 목사님들이 그 자리에서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만. 저도 제 몸에 있는 병을 치료하려고 갖은 방법으로 해봤지만 안 됐습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가진 질병에 관해서 사도 바울이라는 더 위대한 사도의 본을 따릅니다. 세 번을 간구했더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셨습니다. 네 육체의 질고는 평생 짊어지고 갈 것이니, 혹 교만을 염려하며 자랑치 못하게 함입니다. 우리가 가진 병이 있을 때 곧 나을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만, 성서침례교회에서 예배하는 여러분, 그리로 가지 마십시오. 한 번 그런 기적을 맛보면 말씀에 머무르기 힙듭니다. 기적은 그 다음 기적을 또 기대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곧, 즉시’ 낫게 하시는 은혜가 있으신 분이니까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 주님 앞에 기도하면 금방 해결될 것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의 삶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고, 우리의 신앙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곧, 즉시’가 아닌 것이 더 많습니다. 힘드십니까? 하지만 기뻐하십시오. 우리에게는 마태복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곧, 즉시’ 라는 말이 잘 안 나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이사야서 말씀이 응답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 나시기 600전 전에 기록된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60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밖에도 마태복음에는 구약 말씀이 예수님께 응답되는 여러 구절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뭡니까? 말씀대로 응답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룻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나오미가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한 이유는 보아스보다 우선순위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룻기 4장 1절을 보면,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룻4:1)라고 하고 있습니다. 4장을 정리해보면,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겠느냐고 했더니 무르겠다고 했습니다. 큰일났습니다. 보아스가 전혀 원치 않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보아스는 다시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뿐 아니라, 그의 아들 말룐의 기업도 무를 것이며, 말룐의 아내 룻을 아내로 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룻4:5참조). 조건이 총 3가지가 붙고 나니까 1순위에 있던 친척이 부담이 생겼습니다. 결국은 포기하면서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룻4:6참조)고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기대하는 대로, 보아스가 기대하는 대로, 나오미가 기대하는 대로, 룻도 사실은 내심 기대하는 대로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룻은 홀로 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버려두지 않고, 그리고 자기 고향 땅을 떠나 낯선 땅 유다 베들레헴으로 와서,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을 때에도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려나갔으며, 법대로 나오미의 권면을 따라 보아스에게 나아갔습니다. 이 모든 룻의 생애가 온 마을에 소문이 나기를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룻4:15) 보아스와 룻에게서 난 아들 베레스는 예수님의 선조요, 다윗의 할아버지요 이새의 아버지입니다. 룻은 자기 삶을 통해 예수님의 계보에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곱 아들 보다 귀한 며느리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일 일을 내가 모릅니다. 내가 오늘 교회를 위해서, 내가 오늘 하나님을 위해서, 내 손해에도 불구하고 장래가 보이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 실패했고, 일이 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나’ 생각이 납니다. 나이 40이 되면 사추기(思秋期)가 옵니다. 사추기가 오면 세계관이 확 넓어지고 달라집니다. 동창들도 만나고 싶고,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나 이런 생각도 듭니다. 청년 여러분 여러분만 답답한 게 아니라, 나이 40이 되어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50대 이후가 되면 삶의 여유가 생기니 좋을 것 같죠? 퇴직 이후에는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을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을 오늘 룻이, 보아스가, 나오미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답답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사람을 향한 인애를 선택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구했더니, 내일 일을 내가 모르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합당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니까 하나님도 나를 가까이 하셨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내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때, 하나님이 나를 존중히 여긴다는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룻이 첫 번째 기업 무를 자의 아내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즈음 베트남 아내를 나쁘게 대한 한국 남편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룻이 1순위 친척과 결혼했다면 곤란했을 것입니다. 손해가 날 것 같으니까 뒤로 뺐습니다. 구약 시대에 기업 무를 것을 무르지 않으면 치욕으로 여기던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손해를 생각하고 기업 무르기를 포기하는 친척과 결혼했다면, 그동안 시어머니를 따랐고 생계를 위해 열심히 수고하고 보아스의 호의를 입었던 룻의 인생이 복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되도록 놔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혹 한두 번은 그런 시험 속에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를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부대에 대면 오히려 옷이 찢어질 뿐이라고 했습니다. 생베 조각이 가진 탄탄한 탄력에 낡은 부대가 더 빨리 찢어지게 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찢어지고 맙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 삶을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중하기 때문에 삶을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게 맞습니다. 다만, 여러분께 권해드립니다. 내 삶의 복됨을 위해서 예수 믿으려는 사람은 언젠가는 마음에 시험이 들 것이고, 언젠가는 하나님께 등 돌리게 될 것입니다. 낡은 베옷에 생베 조각을 대려는 것과 같습니다.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생베 조각은 생베에 대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신앙생활할 때에 말씀이 성취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삶, 곧 내 삶에 바탕을 두고 말씀을 공급하려고 하면 내 마음만 찢어지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여인들에 대해서 ‘진리를 얻으려고 하지만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나의 현실과 나의 안위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입니다. 룻처럼 삽시다. 룻은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룻은 우리 주님이 인애와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믿고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믿고 시작합시다. ‘이게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해서 믿으려고 하면 결코 믿지 못합니다. 구원받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영접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면서 내가 기대하지 않던 답을 만나고, 엉뚱하게 꼬이는 일을 만날 때, 600년 만에 말씀을 이루신 마태복음의 하나님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내게 좋은 응답 주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셨느니라.”(고전10:13) 힘든 터널을 지나 은혜를 주셨을 때 “이번에 이 말씀이 제게 응답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우리 서로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셨으면,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여러분과 저의 것이 된 것입니다. 이 축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룻이 볼 게 뭐 있었습니까? 나오미가 볼 게 뭐 있었습니까? 낯선 땅 유다 베들레헴에 뭐 볼 게 있었습니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만 볼 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인애로 행하는 사람에게 인애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하나 믿고 올라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사역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사람을 보내주셨다고 내일도 보내주실지 모레도 보내주실지 알아요 몰라요?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집중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보내주신 분을 떠나보내기도 할텐데 말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해야 합니까? ‘하나님, 반드시 주님이 내 삶을 돌보시고 인자를 베풀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내가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사역을 할 때도 최선을 다해서 섬기겠습니다.’ 하고 나아가면 언제가 되었건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모르지만, 어떻게 되어도 하나님께 아멘입니다. 우리 일은 산만해질 수도 있고,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내 신앙생활이 혹 허사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생각이 드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 룻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 주님, 내가 주님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일에 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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