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라(룻기 1-2장) | 이정식 | 2019-07-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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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무렵에 전 국민이 사랑했던 국민드라마가 있는데 <내 딸 서영이>입니다. 그 드라마가 종영되기 직전에 모든 갈등이 조정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할 시점에서 극중 아버지가 쓰러지는 장면이 소개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한 블로거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잠시도 허락되지 않은 행복, 기구한 팔자가 너무하다.” 잠시도 허락되지 않은 행복이라니 이 말이 참 어마무시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런 삶을 원하지도 않고, 또 없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마치 내가 그런 삶을 겪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는 있겠다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나오미가 나오는데, 나오미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룻기 1장 1-5절까지 보면, 유다에 닥친 기근 때문에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모압 땅으로 내려갑니다. 고향을 버리고 낯선 땅에 내려갔는데 3절에 보면 얼마 안 되어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어떤 분들은 엘리멜렉의 죽음에 대해 ‘왜 모압 땅으로 내려갔는가’하고 신앙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만, 룻기에서는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기근이 오면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아들 이삭도 그랬습니다. 기근이 와서 먹고 살 것이 없을 때 이방 땅으로 가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룻기 1장에서도 엘리멜렉이 죄를 범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엘리멜렉이 죽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성경이 죄를 묻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도 엘리멜렉의 죄를 묻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가장으로서 책임을 지려고 하다가 모압 땅에 갔는데 거기서 잘못된 것입니다. 나오미 가정에 불어닥친 불행이요 슬픔입니다. 그런 후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모압 여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10년 정도 살았는데, 그 후에 두 아들이 또 죽게 됩니다. 계속되는 불행 앞에서 우리는 또 율법을 들이대면서 왜 유대인이 이방 여인과 결혼을 했느냐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모압 땅에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도 있었을텐데 왜 율법에 허락하지 않은 일을 했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룻기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결과만이 나와 있고,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은 것과, 10년 후에 두 아들도 역시 죽게 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은 건 자기 자신과 과부가 된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입니다. 그러니 나오미의 인생은 ‘잠시도 허락되지 않은 행복’이라는 말 그대로였습니다. 믿던 남편도 죽고 난 후 두 아들이 꾸린 가정에서 복을 입기를 바랬지만, 그들도 죽고 만 것입니다. 불행입니다. 재앙입니다. 만약 일제 시대에 활동했던 변사가 있다면 “오,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하면서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끝난 인생입니다. 나오미가 받아 누릴 복은 끝난 것입니다. 자기가 더 이상 받을 복이 없다는 것을 나오미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룻기 1장 11-13절에 보면,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낳는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하고 자기 처지를 직시합니다. 십수 년 동안 모압 땅에서 고생하다가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두 며느리가 따라가고자 하니까 만류하면서 한 말입니다. 나오미는 자기 복이 끝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가 따라온다고 해도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율법에 보면 형이 잘못되면 동생이 형의 기업과 형수를 무르게 되어 있지만, 형도 동생도 다 죽었습니다. 또 나오미가 결혼해서 아들을 다시 낳는다고 할지라도 15년 20년을 기다려야 할테니 소망이 없습니다. 나오미는 끝났습니다. 나오미의 복도 끝났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르바와 룻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10절에 보면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고 둘 다 시어머니와 동행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가 자기 처지를 확실히 말하니까 오르바는 제 고향 모압 땅에 머물렀습니다. 여러분, 요즈음 시대에 흥부와 놀부 중에 누가 더 잘했다고 합니까? 학교에서 배울 때는 흥부가 잘했다고 배웠습니다. 흥부가 잘 되어야 하고 흥부가 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니까 흥부는 바보요, 놀부가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잘 대처하는 사람입니다. 오르바가 잘했습니다. 답이 없고 기구함이 분명했습니다. 전혀 소망이 없고 장래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입니다. 오르바가 똑똑한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도 오르바처럼 선택해서 모압 땅에 머무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입니다. 오르바가 잘 한 건지 룻이 잘 한 건지는 조금 더 지나보면 압니다만. 그런데 문제는 룻입니다. 도대체 룻은 무슨 생각으로 나오미를 따라간 것일까요? 16절-17절 보니까 룻의 말이 구구절절합니다. “룻이 이르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룻은 이렇게 고백하면서 굳게 결심을 하고 나오미를 따라서 유다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나오미는 끝났는데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뭡니까?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라”입니다. 나는 끝났다고 생각할 때 그때가 끝난 게 아닙니다. 내가 수고하고 애를 썼지만, ‘나는 왜 복이 없을까. 왜 내게는 행복이 그리도 멀리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바로 끝난 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끝난 것처럼 생각이 되고, 실제로 확실히 끝났지만, 주님께서는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라고 하십니다. 룻은 그렇게 해서 소망이 없는 나오미를 따라서 갔습니다. 사실 1년 전에도 룻기를 설교하면서 어떻게 룻이 이런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알기 어려웠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룻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갖게 된 데에는 나오미의 영향이 일부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잠시도 행복이 없어보이는 불행을 겪으면서도 욥기의 욥처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괴롭게 했고 여호와의 손이 자기를 쳤다는 고백을 하며 그 모든 재앙을 받아들였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하나님께 범죄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나오미의 신앙이 룻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고 하여도 룻의 신앙적인 선택은 특별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만약 오르바와 룻이 선택해야 했던 동일한 상황에 놓인다고 했을 때 어느 길을 선택할 것 같습니까? 그런 상황이 100번이 있다고 하면 아흔아홉 번은 오르바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나오미가 자기 앞날의 소망이 없음을 분명히 짚어주었습니다. 나오미를 따라가면 길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 다 들으시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오르바의 길을 선택했지만, 이제부터는 룻의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룻이 자기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는 수요일에 볼 말씀입니다. 잠언 3장 3-4절을 보시면,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히 여김을 받으리라.”(잠3:3-4) 인자와 진리를 떠나지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인자와 진리가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나오미는 기구한 삶이었습니다. 복이 없는 나오미에게 룻의 분깃된 복을 가지고 시어머니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소망이 없는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룻에게 있는 복으로 시어머니에게 인자함을 베풀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얼마간의 복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 인자함입니다. 그 인자함을 룻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내 분깃된 얼마간의 복으로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룻이 선택한 것이 뭔가 하면 보아스의 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선대하니까 룻이 묻습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룻2:10). 보아스가 대답합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일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 보호함을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2:11-12절). 룻이 선택한 것은 인자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진리되신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받기를 선택했습니다. 결국 룻은 현실을 따라서 오르바처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인자와 진리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선택한 룻은 사람인 보아스에게 귀중히 여김을 받고, 보아스도 줄 수 없는 하나님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어찌보면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 룻도 자기 처지를 알고 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간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방 여인입니다. 그도 스스로 반복하며 고백하기를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룻2:10)이라고 고백하고, 또 ‘여종의 하나 같지 못한 나’(룻2:13)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수 없는 여인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면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러니 구약 시대에는 이방인을 향한 능멸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인자와 진리의 하나님을 택한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룻이 어떤 은혜를 입었나요? 올라간 때가 보리 추수 때였고, 우연히 들어간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이삭을 주웠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니까, 2장 16절에 보면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줍게 하라고 합니다. 이 은혜를 입은 룻은 종일 한 에바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한 에바는 22리터 정도 됩니다. 아이스박스 한 가득 이삭을 주워서 나오미도 먹고 자기도 먹고 남을 만큼을 줍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과 제가 인자와 진리의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자기 분깃의 복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입고, 또 하나님께도 크고 비밀한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르바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자기 고향에 남아있기로 선택한 오르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르바는 자기 분깃의 복을 따라 갔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몫의 복이 있습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구원받은 사람이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든 간에 자기 분깃의 복이 있습니다. 오르바는 그 복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재혼을 했을 것이고, 또 자녀를 낳아 가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오르바는 자기가 받은 분깃의 복 말고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고한 만큼 월급받는 것은 정직한 삶입니다. 하지만 수고한 만큼의 댓가만 있으면 복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내가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는 것은 정직한 삶입니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이외에는 얻지 못하는 삶은 정말 팍팍한 인생입니다. 유명한 모델 출신인 홍진영이 고백했습니다. 자기는 자기가 노력하고 수고한 만큼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인생을 좀 사신 분들을 공감하실 것입니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 그만큼의 결과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삶은 팍팍한 삶이고 고생스러운 인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런 복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다가 부정이 나오고 비리가 생기고 사기를 치거나 당하는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의 하나님을 마음에 기억해서 정상적인 루트로 넘치는 복을 입어야 할텐데, 그러지 않고 억지로 그 복을 끌어당기려니까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투기를 하는 것입니다. 부정하고 부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분깃의 복만 가지고 살기에는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하나님께로 받은 복이 없으면 인생은 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분복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나쁘신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겠죠. 하지만 그 복만 있는 사람은 괴로운 것입니다. 오르바는 똑똑한 선택을 했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저라도 아흔 아홉 번을 오르바의 길을 따라 선택하겠습니다. 아흔 아홉 번 오르바를 선택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면 이제는 룻의 길을 선택하기로 합시다. 룻은 자기 분깃의 복을 취할 뿐 아니라, 인자와 진리를 마음에 둠으로 보아스의 복을 입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끝났다 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오르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라는 마음으로 인자와 진리를 따라 선택한 룻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앞에서는 오르바가 똑똑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면 룻이 얼마나 잘 선택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시편 121편 1-2절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나의 도움이 나의 노력에서 옵니까 나의 수고에서 옵니까 나의 분깃에서 옵니까? 아닙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옵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얻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부터 39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룻은 장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 인자와 진리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놀라운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비록 나오미는 인생의 불행과 재앙을 당하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저주와 재앙과 불행과 기구함과 죄짐을 다 지고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기억합시다. 나오미가 남편이 잘못되고 두 아들이 또 잘못되어 기구함에 빠질 그때에도 하나님은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연거푸 일이 잘못되고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도 우리 주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를 물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인내를 준비시키시고 마음을 준비시키시고 은혜를 준비시키시고 연단하시려고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엘리멜렉이 이집트로 내려간 죄책을 물은 것이 아니며,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그 죄책을 물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룻기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행의 원인이나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결과만 나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만나게 하셨을까요? 룻을 룻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는 것입니다. 룻의 믿음이 영광을 얻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려움을 겪게 하실 때의 하나님이 또한 보아스를 통해서 은혜를 입게 할 때도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좀 일이 잘못되면 ‘내가 잘못해서 그랬지, 내 탓이지’하고 자책하시기만 한다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분명히 서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 번을 연거푸 불행한 일을 만난 사람에게도 동일하신 은혜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지는 자시니라.”(롬8:33-34)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씻으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 대신 저주받으시고 대신 불행을 겪으시고 고난당하시면서 여러분과 저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나오미가 남편이 죽었을 때 불행했지만 그 불행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10년 뒤에 두 아들이 잘못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 은혜 입은 사람에게 환난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곤고가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핍박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기근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의 위협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8:36) 나오미는 인생으로 생각해볼 때 한 순간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박복함이, 그 기구함이 심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의 죽음도, 두 아들의 죽음도 나오미의 몫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기구함 탓에 자기 남편이 잘못되었으니 나오미의 기구함이 전염되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올라가봐야 입에 풀칠 하는 일 외에 무슨 영화가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할렐루야. 이제 로마서 8장 38-39절을 믿음으로 고백해보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에게 허락하신 복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복 받은 사람으로서 할 일이 뭔가 하면 룻처럼 사는 일입니다. 내 눈 앞에 답이 없고 기구함만 점철되는 과정에서도 내게 주신 내 분깃의 복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혹 우리 교회가 복이 있지만 희미하게 보인다면 ‘하나님 내가 가진 복으로 교회를 축복하게 하옵소서.’ 환난과 어려움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자와 진리의 하나님을 마음에 둠으로 사람과 하나님께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기 원합니다. <내 딸 서영이>의 안타까운 모습을 본 블로거는 글 말미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렇게 끝내면 안 됩니다. 너무 슬프고 불행합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내기 바랍니다.’ 그냥 바램만 적어 놓았습니다. 우리도 종종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로 위로 받습니다. 그렇지만, 언제 올지 모를 희망에 우리를 내버려두지 말고 인자와 진리의 하나님을 택합시다. 어려울수록 예배합시다. 어려울수록 하나님 말씀을 배웁시다. 어려울수록 주님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따라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맥없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자와 진리를 남길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난 게 끝난 게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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