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부활의 주님, 부활의 성도(요20:19-31) | 이정식 | 2015-04-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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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6-17)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15:53-54). 이에 대해 이사야서에 미리 말씀하기를,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25:8)고 하셨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도 꽃도, 말도 소도, 바람도 비도, 우주도 모두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모두 '죽을 생명'입니다. 죽을 생명이기 때문에 나무도 씨앗이 떨어져 자라고 성장하다가 죽고, 꽃도 동백꽃 통꽃으로 피다가 툭툭 떨어지고, 바람도 기단으로 발생하다가 변질하고 마지막에는 사라집니다. 우주도 탄생이 있고 성장하다가 소멸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지만 '죽을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태어나서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애쓰며 살고 "나 아직 죽지 않았어"하며 용을 쓰다가 마침내 죽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생명이 있지만 죽을 생명이기 때문에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15:32b) 합니다. 힘껏 소비하고 양껏 발휘하다가 힘이 떨어지고 몸이 병들면 하릴없이 죽음을 준비합니다. 우리 피조물에게는 '살릴 생명'이나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소망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1:5). 하나님은 빛이신데, 어둠이 조금도 없는 빛이십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 어떻게 감출 것이 있는 우리, 여전히 말하기에 민망한 모습을 갖고 있는 우리들과 교제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 피의 능력으로, 다시 사신 능력으로 우리를 덮으시는 은혜가 교제케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주主가 필요합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주主가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본질상 썩을 몸, 욕된 몸, 약한 몸, 육의 몸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썩지 않을 몸,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신령한 몸을 입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며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을 생명'이 아니라 '살릴 생명' '영원한 생명'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죽음은 죄 때문에 들어온 것이나, 예수님께는 죄가 없으므로 죽음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죽음이 책 잡을 것이 예수님께는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못지키고 할 순간은 죄가 더욱 힘을 내는 때인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셨으니 죄가 힘을 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할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우리 대신 피흘리셔서 죄값을 다 갚으셔서 그 일이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도록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죽은 시신이 되어 무덤에 묻혀 계셨지만, 죽음이 예수님을 묶어 둘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심을 나타내 보이셨고, 우리가 믿을 때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면서 영생의 삶을 살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분명히 보여 알게 하시려고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요20:1)게 하셨습니다. 더욱 분명히 보여 알게 하시려고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셨고, 그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말씀하셨습니다. 더욱 분명히 보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요20:20a) 그제야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사신 것을 보이려고 빈 무덤을 보게 하시고, 문들이 닫힌 곳을 들어오셨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24:37)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세계 낱낱의 사물들이 다 다시 살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시 산 예수께서 오신 것을 귀신으로밖에는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꾸짖으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누가는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 잘 아는 의사입니다. 스스로 놀라며 쓰고 있습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부활의 몸으로) 나는 있느니라! 손과 발을 보이시니 제자들이 너무 기뻤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고 꿈이냐 생시냐 할 때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24:41-43참조). 부활하신 주님은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음식까지 먹으니 그분은 영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맞습니다. 그 깨달음이 올 때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며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이구나. 이 모든 말씀이 생명이구나 성경대로 이 세상이 지어졌고 성경대로 이 세상이 이루어지는구나' 믿어지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말씀하셨으니,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구나.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흘리셔서 죄값을 치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믿으니 억수같은 죄가 단번에 씻어졌구나. 모든 피조물이 죽을 생명으로 살다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길과 생명과 진리되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구나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생명의 소식, 소망의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선물이 되도록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1b-23). 항상 늦깍이가 있습니다. 도마는 늦깍이 지각생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할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고,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b). 그런 도마를 위해서 예수님은 다시 오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도마는 그 순간 믿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인류의 모든 역사가 부활이 없다고 노래를 하여도 지금 눈 앞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니 확실해졌습니다. 이렇게 하실 분은 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예수님은 도마를 칭찬하지도 꾸짖지도 않으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우리는 믿음 안에서 우리 자신이 성장한 모습을 바라보면 격려가 됩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나약한 모습, 죄악된 모습을 보면서 낙망케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믿고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사람들을 의롭다, 깨끗하다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믿기에 주님과 깨끗하게 된 자로 함께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이렇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속하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고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보지 못하고 아들 주실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로 멸망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보고 믿을 때는 복이 없고 또 너무 늦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사야 선지자는 미리 보고 말했습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25:8).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되었습니다. 성경대로 되어갑니다. 그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부활의 첫 열매니 이 열매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 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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