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 바울의 근심 바울의 슬픔(롬 9장) | 이정식 | 2015-03-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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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바울 스스로도 항상 기뻐하며 살았기 때문에 이런 권면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에게 큰 근심과 슬픔, 고통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두 가지가 함께 바울의 마음 속에 있을까요. 그의 큰 근심과 슬픔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향한 근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또 바울 당시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이 바울에게 근심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이 비단 이스라엘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같은 슬픔과 고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특권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롬9:4-5참조).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의 3대 인물이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장군이라고 평가됩니다. 세종대왕은 세계 어떤 글자보다도 과학적인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민족적인 자긍심을 갖게 해줍니다. 그러면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섭리와 선택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자부심 있게 하셨겠습니까.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증거로 더 위대한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곧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이방인은 영원한 이방인이요 버림받은 사람들이며 자기들은 영원히 하나님께 택함받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이 가진 이런 생각이 바로 바울을 근심하게 했고, 큰 슬픔 속에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속에 한 다른 말씀이 계속해서 '구별된 이스라엘'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 한 구원의 말씀이 계속해서 특별한 약속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창21:12) 하셨으니"(롬9:7)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 하심이라"(롬9:9) 원천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오셔서 '명년 이 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말1:2-3) 하심과 같으니라"(롬9:12-13). 야곱과 에서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때때로 따져묻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아니, 하나님 살아보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을 그 복중에서 사랑할 사람 미워할 사람을 정하셨다니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야곱을 이해하려고 해도 그의 교활함을 볼 때 왜 야곱을 복 주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 임금의 택함을 받아도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하사 부르심이 태중에 있든, 살면서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출33:19)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5-16)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집트의 바로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출9:16)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만일 바로였다면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이 왜 이러실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8) '어떻게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을까. 이유도 없이 한 사람은 좋게 한 사람은 나쁘게 사용하시겠다고 하는가. 이런 하나님이 과연 공평하시다 할 수 있는가'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입니다! 토기를 만드는 토기장이도 구해 온 진흙 덩이를 그 소용에 따라 만들 권한이 있는 것을 압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1). 도림 교회 김용웅 원로목사의 사모님이 간증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데 사모님이 머리가 아프다며 그 옆에 와서 쓰러지셨습니다. 목사님이 문득 마음에 다급한 일인 것을 깨닫고 집사님과 여선교회에 전화했습니다 '119를 부르고 또 와서 도우세요'. 참 감사하게도 교회 맞은 편 도로에 119 응급 차량이 서 있었습니다. 5분도 안 되어 달려왔습니다. 또 교회에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수간호사가 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손 못대게 하고 면도칼과 소독액을 준비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목 뒷 부분을 칼로 찢어 피를 내었습니다. '뇌출혈'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사모님은 손발이나 사지에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모든 일이 다 하나같이 순식간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예도 있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도 연결되지 않아서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우리 마음을 놀라게 하고 답답하게 할 세월호 사건이 그렇습니다. 선장도, 항해사도, 해경도, 구조하는 언딘도, 최첨단 스마트폰도 어느 것 하나 맞춰지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학생들이 다 죽음의 두려움에 마주한 채, 아무런 소망도 구원의 여망도 없이 쓰러져갔습니다. 구조된 학생들도 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모 가운데는, 그때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며 절규하지 않았겠습니까. 아직도 통곡은 생생하며 평생 가슴에 박힌 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슨 말을 하며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둘까요. 바로를 완악하게 쓰신 하나님은 바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계에 알리셨습니다. 사울 왕을 왕으로 세우셨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습니다. 사울 왕이 겸손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자기 행위와 자기 업적과 자기 명예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울 왕을 폐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그릇, 긍휼의 그릇, 하나님의 일을 행할 대사(大使 ambassador)로 부르셨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하나님 전의 문지기가 되어도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행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행할 사람으로 택하여 주셨다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보일 반응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죄인이요 무능력자요 무자격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께서 제게 무슨 말씀을 맡기시든지 믿음으로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향해 말합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호2:23)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호1:10) 함과 같으니라"(롬9:25-26)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사10:22-23)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사1:9) 함과 같으니라"(롬9:27-29).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지만, 그가 택함받을 자격이 있어서 택함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교회를 알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내게 무슨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리 된 것이 아닙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스라엘더러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불과 유황으로 멸망했습니다.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단지 동성애와 음란이 심해서 멸망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도 오늘날처럼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봉사를 열심히 해서 더 나은 도시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철학자도 있었고, 대학교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그 주권적인 택하심을 은혜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롬9:30-32). 바울의 근심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슬픔이 무엇입니까?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대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바닷가 모래같이 번성하겠다는 약속대로 번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잘못 이해했고, 또한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처음부터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믿음 안에 있는 약속의 씨만이, 믿음으로 된 남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을 오해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받은 소돔과 고모라와 본질상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 고양시, 서울시 등 현대의 도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을 기억하지 않는 도시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않고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 바울의 근심과 바울의 슬픔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입고 택함을 받은 우리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 근심과 슬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경기가 불황입니다. 앞으로 더 불황의 그늘이 깊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자연히 줄어듭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도 뒤로 물러나는 것이 옳겠습니까. 말씀을 읽으며, 기도를 하며, 찬송을 하며, 전도를 하며, 서로 사랑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이 믿음의 일도 오그라드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버림 받은 자에게 베푸신 긍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은 전혀 다릅니다. 세상 일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을 살필 시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권적으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아닙니다. 내가 고통 중에 있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형통한 중에 있으면 더욱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상황과 상관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 나는 멸망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없이 조건없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세우고 그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근심이 되는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약속의 씨와 남은 자를 들어 온 땅과 하늘의 영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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