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3월 8일> 사망의 몸에서 건지시는 주님(롬 7장) 이정식 2015-03-10
  • 추천 0
  • 댓글 0
  • 조회 297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118695

  믿는 사람의 마음 속에 여전히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한 마음은 이교도적인 심장이고, 또 다른 마음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심장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항상 겨루며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학이 함께 있는 것이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 선한 일을 하려는 우리는 종종 이런 상태에 떨어집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왜 그런가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b). 찬양과 저주가 한 입에 있고, 깨끗함과 더러움이 섞여 있고, 선함과 악함이 함께 있습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절반은 괜찮은 사람이니, 오늘은 천국, 내일은 지옥, 오늘은 천국, 내일은 지옥이라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죄의 법이 이겨 우리를 사로잡고 만다고 했습니다.  

  이런 삶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도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힘이 그렇게 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하고싶은 대로 우리 생각에 옳은대로 행동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지금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한 법만 어기지 않으면 내 양심과 내 마음과 내 삶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를 '내가 살았다' 내가 산 상태라고 했습니다(롬7:9a). 자신이 죄인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행동이 죄라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생각대로 살 때 십계명을 주셨고, 하나님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이 나타나자 내가 괴롭고 번민이 찾아옵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나온 뒤로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안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아주 불편합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를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7b,9-10). 하나님의 말씀에 정해두신 말씀이 우리 속에 있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러니 나는 죽고 도리어 죄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심은 우리를 살리려고 주신 것인데, 살리려고 주신 그 말씀이 우리를 도리어 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 영혼의 상태이고 또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영적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좋은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 그래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도 자기 속에 있는 탐욕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도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이러다 내가 큰일나지, 이러다 내가 큰일나지.' 그래도 날이 밝아 사람들 앞에 서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위하는 것처럼 열심히 섬겼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3:3a)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기 전에는 아담과 하와는 잘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를 살리려고 주신 말씀인데,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한 뱀이 찾아와 그 말씀을 바꾸고 속여서 어기게 만듭니다. 결국 금지한 선악과를 먹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부끄러움이 찾아왔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났고, 인생의 고생이 찾아왔고, 결국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겨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율법은 선하고 신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신에 속해 있어서 그 말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7:14) 좀더 말씀의 뜻이 분명하게 번역한다면,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은 영적이나 나는 육신적이어서 죄 아래 팔렸도다"(KJV '그리스도 안에')입니다. 또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생각으로는 선한 것을 알지만 그것을 행하지 못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선함이 있다면 그대로 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선함이 없으니 말씀대로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하신 말씀이 우리 마음에 떨어질 때 내 속에 선함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7:8)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 그러면 선한 율법이 나를 죽게 만든 것인가. 아닙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7:13).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동안 알지 못했던 바, 내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죄罪.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제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하기를, '마음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고 목숨을 다하여 우리 자녀를 돌보며 뜻을 다하여 내 미래를 설계하고 힘을 다하여 돈을 벌어오는 게 죄냐'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있고 남이 있지 남이 있고 내가 있나,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하며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5-6). 하나님의 말씀과 내 삶이 항상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면 진노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는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렇게 잘못된 건 아닙니다. 나도 선을 원합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대로 할 수 있는 한 선을 행하고 싶습니다. 제 마음 속에도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괴로움 중에서 하나님의 한 말씀이 들려옵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20). 나는 어쩔 수 없나 보다 하며 고개를 떨굴 때,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다.' 한 번 따라해 봅시다.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롬7:13참조). 너는 누구냐!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하는 너는 누구냐!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었습니다. 여드름이 익기 전에는 짜는 게 아픔이요 짜내어도 덧나지만, 이제 여드름이 완전히 익었습니다. 그 정체가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가만히 놔둘까요 짜내버릴까요. 그런데 여드름 정도가 아니라 내 속에 사는 것이 죄니 내가 죄를 짜낼 수 없습니다. 죄가 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8-9).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일, 주 예수를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일이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선함이 우리 안에 거하는 길, 이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렇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약속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a).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알지 못할 때와 주 예수를 영접했을 때의 차이를 재혼관계로 비유했습니다. 남편이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그것은 간음의 죄를 범하는 것이지만, 그 남편이 죽어 사별한 후에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은 자유입니다. 이미 전 남편을 따르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를 마음에 영접할 때 주 예수와 결혼하였고, 전 남편이었던 죄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7:4-6). 찬양이 떠오릅니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찬송가 36장).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John Bunyan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어서 어릴 때 꾸던 무서운 꿈 때문에 두려워하곤 했습니다. 자라서는 자신만큼이나 가난한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아내를 통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과 같은 책을 남편에게 읽게 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자기가 좋아하던 것을 하나 둘씩 포기해야 했습니다. 춤추는 것이나 들판에서 놀던 일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아니었죠.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느날 일하러 가는 길에 햇볕을 쬐며 이야기하는 여인들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여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또 자기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그리고 거듭난 이후에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이야기하였고, 한편으로는 사탄의 꾀임을 받는 고통과 믿음없이 하는 위선적인 선행을 비난하는 말도 했습니다. 듣고 보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같았습니다. 그날 그의 마음을 흔들렸고, 무엇보다 자신이 거듭나지 못한 것과 구원의 경험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삽시간에 두려움과 공포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면 어떡하지? 내가 만약 선택받지 못한 자라면 어찌 되느냐 말이야. 나처럼 비열하고 더러운 자가 어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총에 맞아 나무에서 떨어진 새처럼 쓰러졌다."고 표현했습니다. 계속되는 질문과 의문이 이 사람을 괴롭게 했고 그는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이후 5년 동안 이 문제로 씨름하였는데, 어느 아침에는 낙심된 나머지 자기가 사탄의 음성에 굴복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서서히 붙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움을 주기도 했지만, 큰 위로를 주기도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또한 골로새서 1장 20절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는 말씀은 그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또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2-24). 예수의 피로 인해 하나님과 자신이 화평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히 믿어졌습니다. 그후로부터 죄인으로서의 두려움과 의심은 사라지고, 오늘 죽어도 천국갈 확신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 소망을 얻었습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3월 15일>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장) 이정식 2015.03.15 0 255
다음글 <3월 1일>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려면(롬 6장) 이정식 2015.03.03 0 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