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행복한 사람의 발자취(롬 4장) | 이정식 | 2015-02-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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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희 형제의 구원간증 첫머리입니다. "1997년 1월, 나는 대전에서 심적으로나 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로, 내적으로는 간음한 여인의 모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실 그때처럼, 죄를 죄로,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행위나 마음 속에서 특별한 죄를 짓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는 정말 어둡고 무거운 죄가 항상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이상하리만큼 큰 두려움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있었으며, 주위에서 열성적으로 기독교에 봉사하는 기독교인들과의 만남도 피하곤 했다. 거의 매일매일, 언제나 하나님이 내려보시고 정죄하시는 것 같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 그 두려움은 바로 아담이 범죄했을 때의 그 본능적인 두려움과 같은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장) 이제, 항상 내가 나의 죄를 가리기 위해 언제나 사용했던 나의 무화과나무 잎은 하나님 앞에 불의로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정죄 가운데 있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것을 깨달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모른 채 죄를 씻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자꾸만 자기의 능력을 갈고 닦아 그 높은 곳에 이르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죄 때문에 당하는 죄책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았을 때 그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을 때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하였을 때 아브람은 물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15:2).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도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성경은 곧장 이어 쓰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과 우리들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롬4:3a).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롬4:3b)고 말하지 않았느냐. 김두희 형제는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고민했고 또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교회에서 자란 친구가 불과 6개월 전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신실한 신앙생활을 했던 그 친구가 구원받은 것이 6개월밖에 안 되었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에게 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친구는 새로운 말을 해준 것이 아니라 늘상 들어왔던 말을 다시 들려주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야.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가볍게 날려 버릴 수 있어. 그냥 그걸 믿으면 돼." 그날 밤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너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는데 죄가 어디 있어?" 그 친구는 손짓으로 훌훌 털어버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으면 자유해야지." 그때 김두희 형제의 머리속에 떠오른 말씀은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였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쉬운 거였구나. 내가 구원을 얻기 위해 해야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 것을 월급받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월급은 일한 사람이 그 일에 대해 받는 삯입니다. 일한 후에 주는 것이니 근로자의 일에 대해 회사가 안고 있는 빚입니다. 회사는 월급을 주어서 그 노동에 대한 빚을 갚습니다. 일을 잘하여 월급 외에 보너스를 받거나 초과 근로를 하여 초과 수당을 받으면 그것은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능력이요 자기 수고로 챙긴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은혜이지 월급이 아닙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롬4:5)십니다. 다윗도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7-8). 구원의 복은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 은혜는 율법을 지켜서 받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성립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4:16). 이것이 아브라함의 행복이요 다윗의 행복이며 모든 믿는 자의 행복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죄사함을 얻은 자의 행복입니다. 그의 행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b). 하나님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불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경건이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십니다. 있는 것은 불경건이나 경건함이 있는 것처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을 때 그렇게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므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롬4:18a)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우리 안에 근본 죄악이 있고 날 때부터 죄인이니, 우리는 죽은 자와 같고 저주받은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있는 것을 '알지만'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죄를 없다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행복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4:19-21).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는 데 아브라함이 한 일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를 위해 이루십니다. 우리의 경험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자녀를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후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웃으며 마음 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7-18)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의 믿음을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창17:19)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17:21)고 다시 확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사람의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붙드셨습니다. 구원받는 믿음도 그냥 믿은 믿음이면 족합니다. 이제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시련과 문제에 관해서도 그냥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 여기는 것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롬4:24b) 사람입니다. 예수는 누구십니까?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 죽을 몸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살리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한 때 흔들릴 수 있지만, 두 때 흔들릴 수 있지만, 우리의 첫 믿음을 보시고 우리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내 일이 죽은 것처럼 되었습니까? 내 계획이 허사가 되었습니까? 내 미래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습니까? 나의 수고가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이제 남은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까? 변화를 주기에는 너무 늦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우리는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열심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그분을 믿는 우리를 위하시는데 무엇이 우리를 거꾸러뜨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25년 후에 아들을 낳았어도, 모세처럼 40년 광야 훈련 후에 쓰임을 받았어도, 다윗처럼 10여 년을 광야에서 도망다녔어도,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믿음의 발자취가 행복한 사람의 발자취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a).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은 그냥 믿는 자들입니다. 누가 뭐라 그래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일이 아무리 어그러져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에 하나님은 능력으로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시고 마음껏 하나님께 쓰임받읍시다. '저 이거 해도 될까요?' 예, 다 됩니다. '하나님, 이런 것까지 구해도 되나요?' 예, 다 됩니다. 학생부 예배 때 최고은 자매가 설교 후에 구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최영광 형제가 구령상담을 했습니다. 그냥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부산에 가서 부산중앙성서침례교회 정진수 목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대접해주셨습니다. 소 갈비살을 대접하셨는데, 월요일에 영남친교회 목사님 사모님들을 모시고 드셨던 그곳입니다. 처음에 고기를 시키시더니 밥을 주문하셨습니다. '그래, 고기 조금 먹고 밥 먹으면 배부르지 뭐.' 그런데, 밥까지 시켜놓고 고기를 3인분씩 더 시키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다 먹다 다 먹었지요. 케이블카를 타고 동래산성에 올라갔습니다.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파전을 시켜 놓았습니다. 그것도 큰 걸로 두 장에 묵 한 접시까지. 그날 우리 생각에, '정 목사님, 통 크시네.' 하는데, 돌아와서 토요일 새벽에 기도하는데 정말 통크신 분을 제대로 몰라봐서 죄송했습니다. 정말 통 크신 분 하나님을 모르고 그냥 주어진 대로 경험대로 보이는대로 어느새 작아진 제 모습이 송구스러웠습니다. 세상에서 태어나고 말았다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하나님께로 난 사람인데, 어찌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말입니다. 하나님의 규모,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비전대로 살 사람이 우리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50주년을 누추하게 맞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읍시다. 하나님을 그냥 믿고 통 큰 헌신 통 큰 비전으로 달려갑시다. 그의 발자취가 행복한 사람의 발자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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