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단단한 음식을 먹는 신앙(히5:1-6:3) | 이정식 | 2014-07-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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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엄마 젖을 먹을 때 사랑과 만족을 얻습니다. 젖을 먹이는 동안 엄마와 아가는 눈을 마주치며 서로 만지며 말소리를 느낍니다. 엄마 젖(모유)은 신이 내려준 가장 완벽한 자연식품이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라게 해주기 때문에 엄마가 아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엄마 젖에 들어 있는 성분은 아가의 성장과 발육에 따라 조금씩 성분이 조절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리고 엄마 젖은 아기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함유하고 있습니다. 젖에 들어있는 영양소는 '단백질과 지방, 분유보다 많은 유당, 비타민, 철분, 수분, 염분, 칼슘, 인 적당량 함유, 효소 리파제(지방소화제)' 등이 충분하고도 적당량으로 들어 있습니다. 엄마 젖은 또한 소화도 잘 되고 또 빠르게 소화됩니다. 젖은 아기가 아직 면역력이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균상태로 공급됩니다. 젖의 유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WHO)는 생후 7개월까지 모유를 먹일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3)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사랑을 맛보면 이제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기들이 스스로 말하며 행동할 수 있는 어린이로 자라듯이 이제 막 거듭난 사람의 믿음이 자라납니다. 특별히 주 예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으로 삽니다. 세상 다른 것에게 위로받지 못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온몸과 마음이 감격스럽습니다. 헛된 수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너무 바빠 불평하던 마르다 말고,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랑한 마리아처럼 주의 발치에 앉는 행복을 압니다. 예배에 나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있던 악독이나 기만이나 외식이나 시기나 비방하는 말이 하나 둘 버려지게 되고 내 속에서 떠나게 됩니다(벧전2:1참조). 이런 정화는 교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요즈음 학생부 친구들이 기특하고 정겹습니다. 여름수련회 답사를 다녀왔는데 학생들이 교회에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공부해도 돼요?" 하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5명이 모인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는 과목을 다른 친구들에게 가르쳐주며 공놀이도 하고 장난도 칩니다. 그러더니 공부가 다 끝나고 간식을 먹은 후에는 하라마라 하지도 않았는데 설거지를 합니다. 참 대견합니다. 전에는 먹고 어지럽혀 놓고는 그냥 갔는데 이제는 교회에 모이는 즐거움을 압니다. 습관적으로 욕하고 감정적으로 내뱉던 말이 서로를 생각하는 말들로 바뀌었습니다. 교회가 편하고 즐겁습니다. '내 교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걷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 첫 순종을 나타내는 침례에 순종할 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교회의 권위를 따라 같은 믿음을 전수받는 안수를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으며,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을 거절할 때에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아갑니다(히6:1-3참조). 함께 말씀을 보며 찬양을 드리며 봉사를 배워갑니다. 최소 7개월에서 많게는 3년까지 부모의 보호 아래 무럭무럭 자라가는 아이들처럼 자라갑니다. 이런 과정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뭔가 하나님 앞에 나가기에 너무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의 거룩함에 나는 맞지 않다. 나는 감히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설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깊은 실망과 낙담 속에 떨어져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 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 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 내게 먼저 오사 내 맘을 만지고 날 먼저 안으시네...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날 먼저 안으시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의 사랑은 내 모든 걸 덮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라 부르죠' 찬양 중에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그 자비하신 손길로 우리 영혼을 만지시는 것입니다. 그때 손을 들고 응답하십시오. 주의 한량없는 은혜가 우리를 받기에 족하고 넘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참을 노래한 후에 이제 젖 뗄 때를 준비합니다. 젖을 떼고 이유식을 먹습니다. 여전히 부모의 보호도 있고 부모의 보살핌도 있지만, 몸과 지혜가 성장한 만큼 그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엄마는 힘들지만 젖 뗄 날을 정합니다. 이유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도 '엄마 드세요' 하듯이 밀어냅니다. 그리고 계속 젖을 달라고 보챕니다. 졸릴 때는 더욱 심해서 울며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래도 달래고 어르고 해서 재우고는 다음 날 이유식을 준비해서 앞에 둡니다. 그렇게 하루나 이틀을 하면 아이도 젖을 떼게 됩니다. 사실은 이미 아이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입에 갖다 대보기도 하고, 조그만 공간이 있으면 들어가고 하면서 자기 몸을 깨닫게 되고 몸밖의 물건들에 대해서 그 크기나 성격을 알아갑니다. 젖을 먹고 자라면서 자기가 홀로 세상을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구멍이 뚫려 있는 것에 발을 넣어보면서 그것이 옷인 줄을 알아 갑니다. 엄마 품이 여전히 좋지만 침대와 책상에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면서 자기가 놀 공간을 찾아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믿음에도 같은 성장이 있다고 말합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니 단단한 음식을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히5:12-13a). 다섯 살 언니만 되어도 두세 살 동생을 데리고 놀 줄 알고 '해! 하지마!' 하며 가르칠 줄 압니다. 젖은 갓난 아이 적에 가장 좋은 음식이며 몸이 성장한 이후에는 밥을 먹어야 힘이 납니다. 그러면 믿음의 단단한 음식은 무엇입니까?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히5:13b)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그리스도 도의 초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고 죄에서 떠나게 했고 부활을 소망하게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형제와 자매를 돌아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단한 음식이 무엇인지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하나님 말씀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도리어 양식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할 때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주의 일에 함께 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힘이 됩니다. 한 분 성도님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 일을 맡을 수 있게 된 사실이 신기하고 또 이 일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일은 안 할수록 편한 건데 어찌 일을 하는 것이 감사가 됩니까? 하나님 일의 특징입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는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4:35-37).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후에는 가르치는 자리에 섭니다. 나와 내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익혀 갑니다. 기도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나를 교회로 인도하고 전도해 준 사람을 따라 교회를 알았습니다.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인도하고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신 일을 전해듣고 마음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구령 상담을 통해 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일을 돕는 사람이 됩니다. 앉아서 찬양을 하던 친구가 이제 앞에 나와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비난의 돌직구를 날릴 때 함께 시험에 들던 사람이 이제는 당당히 그 비난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입니다. 교회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소리에 함께 동조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 부족점을 자기가 보충하겠노라고 헌신합니다. 나 자신과 내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신앙생활하던 사람이 지역사회와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직장의 상사나 회사 분위기에 맞춰서 살면서 술잔과 뇌물을 물리치지 못하던 사람이 당당히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며 거절합니다. 전도사나 선교사나 목사님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구나 깨닫고 '주여 종이 여기 있습니다'하고 소명에 응답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이제는 주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판단하며 "하나님 보다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는 강력"을 따라 행할 줄 압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사람 가운데 택한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죄를 속할 때 다른 사람들의 죄뿐만 아니라 속죄제사를 드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제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사람 가운데 택한 대제사장이라도 아무나 그 존귀를 취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지명을 받은 아론의 후예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하신 분이요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어떻게 순종하셨습니까?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몸은 고난을 싫어하고 실패를 미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회피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연약한 몸이 저항하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면서도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세 번씩이나 올려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 들으심을 얻었고 죽음에서 능히 다시 살리심을 얻으셨습니다. 구원의 근원이 되는 영예를 얻으셨습니다. 주 예수의 구원은 영혼을 지옥 형벌에서 건지시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 예수의 구원은 우리가 몸을 입고 살아가는 날 동안 고난과 핍박 중에 있을 때 그 고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난을 싫어하고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만일 그런 일이 닥친다면 먼저 순종을 이루신 주 예수께서 죽음에서도 능히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도리어 말씀을 순종하는 힘을 주는 양식이 되는 것처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주 예수를 힘입어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헤쳐 나갈 수 없는 일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나 혼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경건하신 순종으로 죽음에서 능히 건짐을 받으신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까? 이미 우리가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왜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까? '난 아냐 난 못해' 하던 인생이 거룩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영광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한 데까지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힘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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