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하나님 주시는 안식(히3:15-4:16) | 이정식 | 2014-07-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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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사람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신 권능입니다. 말씀은 교훈하시고 책망하시고 바르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말씀대로 이루시고 말씀대로 구원하시고 말씀대로 안식을 주셨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이 뭣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미래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망은 어디서 나옵니까? 말씀 안에서 나옵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습니까? 장래의 약속을 주신 말씀에서 위로받습니다. 사람의 근원적인 질문,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말씀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16:28).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안식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안식은 편안한 휴식, 평안함(rest, 카타파우신)이라는 뜻입니다. '커피 한 잔의 여유' 정도가 아닙니다. 안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두려움 가운데서 찾아온 평안함' '고난 가운데 찾아온 승리'와 같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평안함입니다. 이를테면 가슴 졸이며 응원하던 경기를 이기고 난 후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평안함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안식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미 믿은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히4:3). 곧 창세기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1-2)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히4:4)고 했습니다. 하나님 창조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고 심히 좋았던 직후에 안식을 가지셨습니다. 기쁨의 안식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안식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고 하셨으니 사람은 기쁨이 충만한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안식이 준비되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약속하셨고 모세를 통해서 애굽(이집트) 종살이에서 건져내시고 거칠고 메마른 광야 생활을 마친 후에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 비옥한 땅 풍성한 땅에 들어갔습니다. 기원전 1400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면 이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안식을 얻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이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1세대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똑같이 애굽에서 나왔고 똑같이 광야생활을 하며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히4:6).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3:19). 믿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원전 1000년대에 다윗의 찬양처럼 노래했어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으로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으로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시95:1-7a). 지난 토요일에 안수집사님 두 분이 식당 계단 공사를 했습니다. 약 2시간 30분 가량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반전문가처럼 잘 하셨습니다. 그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교회 일 하는 게 이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기쁨이 젊은 형제자매에게도 전수가 되어야 할텐데요" 조금 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한 분 집사님에게 운수조합에서 일감이 있다는 전화가 온 것입니다. 집사님은 두 말 하지 않고 "일하고 있어서 그 일 못해요" 하고는 끊어버립니다. 최소한 십여 만원 돈 될 일감일텐데 미련없이 접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욱 중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월, 화, 목 3일 동안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에 다녀왔습니다. 일과가 끝나고 6시부터 10시까지 4시간 동안 강의 듣고 율동 배우고 예배 드렸습니다. 피곤도 할텐데 돌아오는 길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시95:8)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있고 지금도 순종하며 믿을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시95:8b-10).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준비해두신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있고 하나님의 길로 갈 시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4:8-9). 안식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95:11) 하셨는데,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히4:6a)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4:11).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고생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인생 중에 고생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광야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치 않는 종살이처럼 남에게, 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끌려 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똑같이 고생하며 똑같이 원치 않는 삶을 살기도 하며 똑같이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걷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이며, 또한 이 충만한 안식을 이미 준비해두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천만인이 다 하는 고생이나 고난은 우리가 두려워해할 진정한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처럼, 하나님의 충만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을 가지면 고생은 고생이 아니지만, 안식이 없으면 고생은 그저 생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안식에 들어간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 '섞다, 결합하다'는 말이 '숭케케라스메누스'입니다. 어디에 무엇을 결합해야 하는가 하면 들은 바 복음의 말씀에 믿음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지 못해서 아담은 쫓겨났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충만한 기쁨의 안식 곧, 복된 소식을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을 결합합시다. 말씀을 향한 바 그 믿음이 우리를 안식에 들어가게 합니다.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이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가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도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하나님의 말씀에 권능이 있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을 섞지 않는다면, 믿음을 결합시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안식이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담쟁이덩쿨은 벽이나 나무를 타고 올라갈 때 단단히 달라붙습니다. 2010년 5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토마스 스페크가 담쟁이 덩굴의 접착력을 연구해보니까, 담쟁이 덩굴 줄기 끝에 있는 뿌리털이 벽면에 파인 미세한 홈 안으로 들어가서 홈 안쪽에 고리처럼 걸립니다. 뿌리털에 한 개의 세포가 있는데 그 세포에 끈적끈적한 액체가 그 홈을 완전히 메우고 눈깜짝할 사이에 굳어버립니다. 담쟁이 덩굴은 제 무게의 200만배 정도를 견딜 수 있도록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떼어내면 담벼락에 바른 회반죽이 떨어져 나올 정도가 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떼어내시려고 한다면 내 몸도 함께 떼어내시옵소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떼어가는 것은 우리 삶에 하나님의 안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어제 집사님들이 떨어진 식단계단 대리석을 붙였습니다. 원 블록만 남겨두고 곁가지 콘크리트를 다 떼어내고 떨어진 부스러기를 쓸어낸 후에 콘크리트를 개어서 붙였습니다. 단단하게 붙였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리석에 있는 조그만 틈새로 콘크리트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원 블록과 대리석이 콘크리트를 접착제 삼아 달라붙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4:14b).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우리에게 안식을 줍니다. 안식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이 주는 안식을 세상이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어지럽히려고 하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일하십니다. '이 안식은 태초부터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들어오게 하신 것이다. 이 안식은 다윗 이후에도 여전히 안식에 들어갈 사람이 있는 그런 안식이다. 이미 믿음 우리는 안식에 들아간다. 오늘 주의 음성을 들으면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 안식에 들어간다. 내 삶의 어떤 어려움과 곤란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훼방할 수 없다.'"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죽음의 고통을 감당하신 대제사장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니 두려운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세상의 영이 쪼개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세상 사상과 철학이 무너집니다. 세상 철학은 얼마간 유익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우리를 근원적 두려움과 죽음에서 살릴 수 없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런 구절을 남겼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이 그것이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우리 정신 속에 파고들어오는 세상 가치관과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두려움과 놀라움을 가려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관절과 골수까지 새로워져서 몸이 강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기쁨으로 받은 사람은 잘 늙지도 않습니다. 영어 교육에 평생을 바친 정철은 예수님을 알고난 후에 더 건강해진다고 간증했습니다. 친구들은 은퇴 후에 뭘할까 하는 고민으로 부쩍 늙어가지만 자기는 영어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유도 모르고 영어 선생이 되었고 영어로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이유를 발견한 것입니다. 삶의 이유, 영어를 가르치는 이유, 내가 살아 있는 이유, 하나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안식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기도입니다. 충만한 안식을 주셨기 때문에 그 후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어려움이나 고생스러운 일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 구하고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인생에 노란불이 들어오고 또 빨간불까지 들어왔는데도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어찌 되겠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은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예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담대히 기도하며 응답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아 고난 가운데서 도망하거나 피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던 악한 행실이다. 오히려 기쁨과 소망 중에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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