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오늘' 믿음(히3:1-14) | 이정식 | 2014-06-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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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히3:4).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만물 안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이 세상'이라는 성가곡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주 만드신 이 세상 지혜로운 창조주 그 솜씨 놀라와 피어나는 꽃들과 노래하는 작은 새 우리 주가 만든 솜씨 잘 드러내도다 아름답고 찬란한 주 만드신 이 세상 지혜로운 창조주 그 솜씨 놀라와 저 장엄한 산들과 저 흐르는 강물 아침햇살과 저녁놀 주 영광 노래해 겨울바람과 여름해 주 솜씨 찬양해 오곡백과 주신 주 이름 찬양해 아름답고 찬란한 주 만드신 이 세상 지혜로운 창조주 그 솜씨 놀라와 우리모두 주 찬양 그 놀라운 솜씨를 이 세상 모든 사람 다 알게 되리라 아름답고 찬란한 주 만드신 이 세상 지혜로운 창조주 그 솜씨 놀라와." 만물만이 아니라 나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면 감사가 됩니다. 우리가 주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영광스러운 순간에 함께 감격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은 큰 기쁨을 줍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골을 넣을 때마다 선수들이 감독과 코칭스탭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봅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골을 넣은 선수나 함께 하는 모든 팀원들이 다 달려가서 얼싸안고 기뻐합니다. 축구클럽에서 뛸 때는 팀을 위해서도 뛰지만 자기를 위해서 플레이합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자기 세리모니를 하는 게 아니라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나눌 사람이 대표팀을 이끄는 스텝들이며 온 국민이며 자기 나라라는 브랜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이 땅에서 이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뛸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대표선수가 되기만 해도 영광스럽고 국가가 연주되는 자리에 서기만 해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히3:1a).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충성되심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죄악 중에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자들을 부르셔서 당신과 화목되게 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에 온전히 충성되셨습니다. 30세 되던 해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듣고 따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면서 계속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오르시기로 작정하시고 예루살렘에 오르실 때는 더 거친 위협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배반하고 팔고 멀리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이루신 후에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를 예수님께 씌우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셨습니다. 구약 율법의 가장 큰 두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b)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믿음 생활의 도리, 믿음 생활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가 그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자백한 허물에 대해서는 용서해시고, 악한 자에게서 건져내십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3:14). 그런데 이때만 해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보다 모세가 더 익숙했습니다. 모세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종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습니다(히3:5).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홍해바다가 갈라진 기적과 광야에서 인도한 모세,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해준 모세의 위대함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3:6). 하나님의 일에 관한 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라 가야 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3:13). 언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면 '날마다 오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의 유혹이 와서 우리 마음이 다시 딱딱해지기 때문입니다. 배가 바다를 항해할 때 파도와 씨름합니다. 아주 거센 파도가 와도 넘어지지 않는 이유는 배의 무게 중심을 따라 복원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복원력이란 어떤 물체에 외부의 힘이 가해져서 모양이나 위치가 변했을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힘을 말합니다. 무게 중심이 낮을수록 복원력은 커집니다. 우리 믿음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이 파도를 헤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반대의 복원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세상이 마음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에 찔림도 있고 '다시 용기를 가져야지' 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세상으로 복원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히3:7a). 예배는 설교를 듣는 시간이 아니라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예배 전 일주일과 예배 후 일주일 사이에 1시간도 채 안되는 시간동안 듣는 말씀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의 종으로 말씀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모세의 말로 들었습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히3:7b)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께 도발을 하는 역사였습니다.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출16장).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는 물을 달라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했지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셨습니다(출17장).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그 첫째 계명이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출20:3)이었는데, 산에서 내려와보니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숭배했습니다(출32장). 다베라에서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와 음식들을 먹고싶다며 불평했을 때 주께서 진노하신 후에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민11장). 가데스바네아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 취하라는 말씀을 거역하였을 때, 광야 1세대 전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것을 말씀하시고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갈 것을 선언하셨습니다(민14장). 37년 후 가데스에서 다시 물이 없으므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는 잘못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모세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민20장). 호르 산에서 모압 땅으로 이동할 때 음식이 있었지만 맛이 없다며 불평하다가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민21장).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무를 때 발람의 예언과 꼬임에 넘어가 음행하며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도발을 했습니다(민25장). 뿐만 아니라 시편 95편 7절로 11절까지에서 이를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오늘날 그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그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95:7b-11 히3:7-11). 민수기 14장에서는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민14:22)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또한 모세는 신명기 9장에서 다시 회상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신9:24)고 했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10가지를 말씀하셨으면 그 중에 한 가지라도 지켰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믿지 아니하는 악심"(히3:12)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악한 마음을 품거나 도둑질하고 법을 어기는 일을 하기 전에 우리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는 마음이 바로 믿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믿지 않는 마음을 악심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악심을 품지 말고 오직 매일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시다. 민병갈(Carl Ferris Miller)은 미국인이었지만 평생을 한국 사랑과 나무 사랑하는 데 바쳤습니다. 그는 사립수목원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선정된 천리포수목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미군정 정보장교로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의 산천과 풍경을 보면서 마음이 이끌리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지프차를 몰고 38선 위로 계속 달렸습니다. 알고보니 1.4후퇴 때 유엔군은 다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혼자 거꾸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유는 한국 산천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서입니다. 궁궐들처럼 거창한 곳에 대해서가 아니라 초가집과 마을과 산천을 사랑했습니다. 임무가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대학원 공부를 할 예정이었는데, 그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에 발령받았습니다. 한국은행에 20여 년 이상을 근무했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일주일간 일하고 금요일이 되면 나무를 연구하고 산천을 찾아다니고 종자를 뿌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자기 전 재산을 나무를 위한 수목원을 세우는 일에 바쳤습니다. 한복을 즐겨입었고 독신으로 살면서 나무와 사랑을 했습니다. 목련과 호랑가시나무에 대해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정원 가위로 나무를 다듬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위한 나무를 가꾼 것이 아니라 나무를 위한 나무를 가꾸었습니다. 그의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민 원장이 우는 목소리로 수목원 직원을 깨웠습니다. "빨리 정자집에 가 봐 회화나무가 상처를 입었대" "회화나무가 밤중에 왜 다치죠?" "꿈에 나타나 아프다고 울었어." 사랑하기 때문에 꿈에도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분의 대통령이 그에게 수목원을 차린 동기를 물었을 때 민병갈은 한 마디 짧은 말로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돈 많은 서양인으로 해안에 거대한 정원을 꾸며 놓고 자연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살다 간 행복한 부르조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그가 살았던 한국은 해방 후 한국전쟁을 겪고 60대 70년대 빈곤 속에서 정치경제적인 파동을 겪고 80년 90년대 민주화의 격변의 시절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현실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고생하며 노력했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품은 한국 사랑과 나무 사랑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모두 피난을 내려올 때 혼자서 거꾸로 올라가는 치열함이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로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이든지간에 성도는 '하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일주일 동안 직장에서 열심히 살다가 금요일만 되면 모든 시간과 정성을 나무 사랑에 쏟았던 민병갈의 인생처럼,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우리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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