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3일>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자(히6:4-20) | 이정식 | 2014-07-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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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있으면 삽니다. 소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냅니다. 소망은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히6:18참조). 소망은 앞으로 들어갈 행복입니다(히6:20참조). 소망이 소망인 이유는 지금 내게 없는 것이지만 앞으로 내게 있을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소망은 이루어지고 어떤 소망은 단지 소망에 그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소망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한강의 기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010년 페루 탄광이 무너졌을 때 전 세계 사람들이 구조되기를 바랬는데, 지하 700m 깊이 어둠 속에서 69일 동안 33명의 광부들이 모두 구출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4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브라질월드컵 16강 소망은 소망으로 남았고, 지난 4월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하느님 알라님'을 부르면서 무사생환의 소망을 가졌지만 슬픔만이 남았습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어본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소망은 우리를 살리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희망 고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은 어떠한 소망입니까? 하나님의 소망은 이루어질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르는 소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은 이루어지면 좋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소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이요 확실한 보증이 있는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신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창12:2-3; 창15:5; 창17:6-8; 창22:16-18 히6:14).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면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말씀하신 후에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여주실 땅, 곧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이었고, 신약 시대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천국인 그 땅으로 갈 때 행하신 축복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인데 믿는 우리에게는 그대로 소망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이렇게 했습니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6:15) 아이를 낳기 전 진통하는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지만 오래 참을 만했습니다. 다시는 아기를 안 낳을꺼라는 생각도 들지만 오래 참을 만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품에 안긴 그 아기, 그 신기하고 대견한 아기를 지금 내가 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오래 참을만했습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75세에 나타나셔서 아들을 약속했지만 이미 그때 불가능한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약속해놓고는 25년을 더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약속하신 순간도 믿는둥 마는둥 방종할 만한 때였는데 25년을 더 기다리게 하시니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중간에 한 여종을 택하여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은 기쁨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햐! 내가 정말 오래참을 만했구나! 잘했군 잘했어!"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배울 점이 많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아브라함은 비록 그가 흔들릴 때가 없지는 않았지만 처음 말씀을 들을 때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히6:13).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17:1b)였습니다. 천국 소망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24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사람들도 큰 계약을 할 때는 더 큰 자, 재산이 충분한 보증인을 세워서 합니다. 보증이나 "맹세는 사람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히6:16)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전능한 하나님께도 맹세가 필요할까? 맹세는 본래 마냥 믿기에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보증 서고 맹세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맹세까지 할 필요가 있나?' 네 맞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맹세가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6:17) 하지만 연약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아주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맹세로 보증을 해주신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맹세로 보증하셨다. 일이 안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의 소망 때문입니다. 일주일 동안의 생업에 충실하다가 주일 아침이 되면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옷을 갖추어 입고 교회를 찾아옵니다. 다른 성도들이 오기 전에 미리 음식도 준비하고, 각 부서 예배를 섬기기 위해 나옵니다. 예배 중에도 음향이며 빔프로젝터를 준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들으며, 배운 말씀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신 수입 가운데 일부를 떼어 하나님께 드리고 때로는 특별한 헌금을 통해 교회에 유익을 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 아직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들 왜 저러고 사나?'라고 생각할 그 일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시작된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고 이전의 삶이 어두운 삶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입니다. 하늘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임을 알았을 때입니다. 성령의 거룩한 일에 참여한 바가 되어 이전의 삶은 욕하고 비난을 일삼던 삶임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소망없던 어두움의 삶을 회개하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들으며 감격했을 때입니다. 언제나 이 세상의 삶 뿐이라고 현실에만 눌려있던 삶에서 내세의 능력 부활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입니다(히6:4-5참조). 찬양을 드리며 눈물로 감격할 줄 알게된 그날부터입니다. 지난 금요일 성악을 전공한 목사님과 교제를 했습니다. 식사하러 가면서 자기는 사람들이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성북구 석관동 거리를 지나가는데 중1중2 또래의 여학생들이 욕하는 소리를 들을 때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할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소망이 없을 때는 우리도 그랬습니다. 서울로 대학에 들어왔을 때 경상도 말도 못하겠고 서울말은 더욱 못하겠을 즈음에 나오는 말이 안 그래도 반쯤 섞인 게 욕인데 욕이 더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6개월쯤 지나니까 '욕쟁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를 알고 하늘의 소망을 알면서 밥 먹듯이 말하고 먹던 욕과 더러운 말은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습관까지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타락한 자'가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6).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도 타락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에게 시련이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두움이라 빛을 싫어하고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실 경제도 점점 더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히 뒤로 물러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긴축재정을 할 때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되는' 덜 중요한 항목부터 줄여가게 마련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소망은 여전히 부지런할 수 있습니다. 씀씀이는 줄여갈지라도 집중할 곳은 더욱 집중해야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로 타락은 거룩한 삶을 살다가 세상의 즐거움을 그리워할 때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했던 데마가 그랬습니다. 그는 열심으로 사도 바울을 도와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다가 사도 바울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이 피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최후가 다가올 때쯤에 기록된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눈물로 이렇게 씁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a). 이 사람 데마가 바울만 떠났다면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천국을 떠났다면 그것은 타락일 뿐입니다. 핍박이 얼마나 심했던지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4:16)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선포되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예의를 지키며 서로 관계맺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침투하며 서로 간섭하면서 진리가 각 사람의 몸에 이루어지기를 힘씁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이 처음에는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바울이 한 발짝씩 더 앞으로 나갈 때마다 버거운 느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소위 가나안 성도라고 합니다. 교회는 싫고 예수님은 좋은 사람들이 교회를 배회하고 교회 주변을 서성거립니다. 순종을 배우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타락이며 배교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바 목사와 형제를 사랑하며 순종하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순종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땅에 비를 받아 쓰기에 좋은 채소를 내듯 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불사름을 당하는 길로 가서는 안됩니다(히6:7-8참조).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히6:11-12)어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 이 세상 현실보다 더욱 생생한 나라 더욱 사실적인 천국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써 그 피로써 증명하셨습니다. 그 나라, 부활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셨지만,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들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친히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몸의 부활을 통해 천국에 첫 번째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열리지 않았던 그 문을 예수께서 여셨습니다. 그분의 경건하신 순종으로 열어놓으셨습니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히6:18b) 하시려고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주 예수께서 붙드시고 들어가신 영원한 소망, 앞에 있는 소망을 "영혼의 닻"(히6:19)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 열어놓으신 소망의 풍성함이 영혼의 닻이기 때문에 현실의 어려움이 와도 견딜 수 있습니다. 배가 폭풍우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배가 정박한 자리를 이탈하여 떠내려가지는 않습니다. 실낱같은 소망이 아니라 풍성한 소망입니다. 주와 함께 있을 그 소망이 풍성합니다. 세상 모든 어두움을 멀리 하고도 남을 빛입니다. 하지만 현실세계가 영혼의 닻인 사람들은 믿음 안에 있는 것같지만 급할 때 장신구를 다 빼버리고 도망가듯이 떠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간은 앞으로만 갑니다. 시간이 앞으로만 가듯이, 소망도 앞으로만 가게 합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풍성한 소망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들어가신 곳으로 따라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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