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부부, 그 아름다운 동행(엡5:19-6:4) | 이정식 | 2014-06-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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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엡5:28)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하나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5:31-33)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일꾼 된 부부가 있습니다.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남편 아굴라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으로 로마황제 글라우디오 때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명령이 있어서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 고린도에 이주한 가정입니다.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tent-maker)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사도 바울이 이 부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18:3)고 했습니다. '함께 살며 일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행18:11) 고린도에 머물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때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했습니다. 그후에 사도 바울이 배타고 수리아로 떠날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했습니다(행18:18). 이 부부는 사도 바울을 도왔고 예배에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부는 스스로 진리를 구하며 믿음이 자라기를 사모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에베소에 머물렀다가 가이사랴에 가고 다시 안디옥에 가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 머물러 두었습니다. 어느 날 에베소에 아볼로라 하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 왔습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는데 뭔가 부족했습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말주변도 좋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니까 좋은 분이라고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굴라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집회가 끝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다 듣고 집으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아볼로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볼로가 성경을 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많은 사람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는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목사님이 설교하는 데 복음에 부족한 점이 있었고, 그것을 성도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깨우쳐주었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될 수 있기를 소망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우리 모두에게 부탁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아볼로에게 그런 권면을 하는 것은 분수에 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진리 안에서 행했고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좀더 앞장 서서 이 일을 감당했지만 누구라 할 것없이 부부가 함께 섬겼습니다. 둘이 하나가 된 부부라도 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아름다운 결혼을 하였지만 어떤 결정에 대해서는 서로 양보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삭과 리브가입니다. 리브가는 얼마나 정숙한 여인이었는지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리고 아리땁기까지 했습니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창24:16). 이것만해도 좋을텐데 리브가는 사려까지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말씀대로 아브람이 보낸 종과 그 낙타에게 자기가 애써 길어놓은 물을 먹였습니다. "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창24:20). 이삭은 신중하며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기도하며 신부감을 구하러 종을 보낸 것을 알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창24:63). 돌아가신 어머니 사라를 생각하며 그리워하던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서 "아내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24:67b). 하지만,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을 때 남편과 아내는 좀더 사랑하는 자녀가 달랐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남자다운 에서를 더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조용하고 여성스러웠던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사랑은 여전했습니다. 리브가의 사려깊음이 이번에는 '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복 중에 두 민족이 나누일 것과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기라고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형이 아니라 동생에게 장자권을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고, 이삭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권으로 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지만 그 뜻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까닭은 없습니다. 원래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합니다. 부부는 서로 생각이 똑같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둘이 하나가 되었고 생각까지 같았지만 망하게 된 부부가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였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행5:1-2) 밭을 팔 때도 같이 팔았고, 얼마를 감출 때도 같이 감추었고, 그 뺀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둘 때도 같이 결정을 했습니다. 정확히 이 부부는 '한 통속'입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교회를 멀리하는 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대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4). 남편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혼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3시간이 지난 후 그 아내 삽비라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들어왔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아니 이 사람이 내 땅 내가 팔았는데 자기가 왜 땅 판 값이 이게 다냐고 묻는걸까' "예, 이것뿐이라"(행5:8). 이렇게 담대하게 대답하는 이유는 벌써 남편과 함께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자기의 보증이 된 것입니다. 결국 아내 삽비라도 성령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 되었고 이 부부는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비극의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많은 부부들이 서로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며 체념하며 또 너무 뒤늦게 사랑하곤 합니다. 여기 실화에 바탕을 둔 한 부부의 애틋한 기사가 있습니다. 30년 동안 남편과 가정에 봉사한 한 아내가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한단 말이 듣고 싶었지만 쑥스럽다며 한 번도 들려주지 못한 남편, 제 부모님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장인장모를 생각하는 건 뒷전이었던 남편, 집안 일을 돌보다가 어김없이 '아줌마'가 된 아내를 남겨두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남편, 그러다 체한 것같아서 수도 없이 혼자 손을 딴 아내, 병원에 가다가도 아무 일 아니라며 집으로 돌아온 아내, 쓰러진 후 병원에서 시한부 암 판정을 받은 아내를 보며 미안해 가슴이 미어지는 남편, 남편 모르는 저금통장을 내밀며 친정 엄마에게 200만원만 떼어주라는 아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편의 손을 잡고 속삭이는 아내 지쳐 잠든 남편, 다음 날 사랑한단 한 번의 고백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내, 목 놓아 울부짓는 남편의 눈물. 이 영상을 벌써 몇 번을 보았지만 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사랑이 아주 없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심드렁한 관계가 되었고 서로의 진실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엇갈리는 두 사람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사랑이 없었던 게 아닌데도 사랑할 줄 몰랐던 철없던 남편이 못내 아쉬운 것입니다. 저 자신도 결혼한 지 10년 정도가 흘렀을 때에야 '사랑'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에 서투른지 모릅니다. 다음 주에는 새로운 부부가 탄생합니다. 그 두 사람이 서로 자기들의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지지해줍시다. 가정이 사랑으로 세워지는 것이 먼저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1-4). 부부가 먼저 아름답게 세워질 때 이 말씀은 지켜질 수 있습니다. 아랫세대는 윗세대의 방식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모두 자기 세대의 사랑과 순종의 방식이 다릅니다. 이미 우리 세대의 방식을 아래세대에게 요구할 때 얼마나 서로를 힘들게 하는지 우리가 다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9-2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부부와 가족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감사와 찬양 속에 사는 삶이 인간관계 속에 있는 여러 장애들을 헤쳐갈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현실보다 더욱 현실인 하나님의 말씀이 부부 사이에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정은 '너무 과하게 믿는' 가정이 아니라, 부부의 아름다운 동행을 하며 하나님과 다른 이를 섬길 수 있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서로 뜻이 다를 때가 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부부가 되시길 바라며, 그 사랑 안에서 위로 부모를 섬기며 아래로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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