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6일> 하나님을 믿으라(막11:1-25) | 이정식 | 2014-04-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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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규칙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규칙은 세부적으로 다듬어집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변칙에 대해 공정성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경기를 더 박진감 넘치게 하기 위해 규칙을 바꾸기도 합니다. 농구는 전후반 40분 경기를 10분씩 4쿼터로 바꾸었습니다. 3초, 5초, 10초, 30초 룰 등이 적용되기도 합니다. 올림픽의 경우에는 특정 국가에 메달이 편중되는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규칙을 바꾸기도 합니다. 양궁은 한국의 메달 효자 종목입니다. 한국이 메달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니까 메달 숫자를 줄이고, 토너먼트제를 만들고, 단체전 참가 인원을 4명에서 3명으로 줄이고, 금은동을 싹쓸이 하면 동메달은 강제박탈하고, 바람이 부는 곳에 양궁장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올해부터는 2014년부터는 세트별로 승점을 매기도록 규칙이 바뀌었습니다. 규칙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세련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순하고 간결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고"(눅9:5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기를 결심했습니다. 갈릴리 땅에서 복음을 전하며 많은 일을 행하시던 예수님이 당신의 최종 임무를 수행하실 때가 된 것입니다.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심장입니다. 구약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 올라가시면서 제자 둘을 보내시면서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막11:2) 잘 훈련된 말, 두려워하지 않고 전장을 뛰어나가는 말이 아니라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고 가시려는 것입니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나귀, 한 번도 안장을 얹어보지 않은 나귀, 사람을 태워보지 않은 나귀,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를 타고 가신다고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 보이지 않는 많은 예법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 암묵적인 금기도 있고 지켜야할 질서도 있습니다. 교회마다 독특한 전통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잘 살피면서 성도들과의 관계를 맺고 서로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데는 잘 가르쳐진 이런 것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는 도리어 원시적이고 정직한 마음만이 소용됩니다. 교회 일을 하는 데는 이모저모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개성도 알아야 하고 사람들의 형편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따르고자 하는 단순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막11:3) 주님께서는 우리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쓰시려고 하는가. 아무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주목하고 듣는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타고 가실 나귀가 준비되었습니다. 그 나귀에게 가죽 안장을 얹지 않았습니다. 그 등에 가난한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얹어 놓았습니다. 나귀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행진하실 때 세련되게 염색된 주단이 깔려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겉옷과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그 위를 나귀 타고 가실 때 잘 훈련된 군사들의 함성과 군기가 휘날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던 낮고 천한 자들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11:9-10).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예식의 장엄함과 위엄조차도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아직도 천막을 치며 교회전체 여름수양회를 갖습니다. 잘 준비된 편리한 시설에서 수양회를 하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세련된 전도의 방법으로 전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교회들은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쓰시기 원하시는가 오직 하나님 말씀만 순종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의 형편을 다 둘러보신 후에 다시 나가셨고, 다음 날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출발하셨습니다. 주의 일을 하시기에 앞서 배가 고프셨습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혹시 그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고 가까이 가보셨는데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화과가 나는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열매가 나는 계절이 언제인지 알고 계십니다. 무화과 나무가 아직 열매를 맺지 않은 것이 그 무화과 나무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막11:14).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3일째 아침에 그 무화과 나무는 뿌리째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즉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화과나무에게 하신 일과 말씀을 기억하고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막11:21).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형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장로들의 전통을 잘 배우고 어떻게 해야 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등 여러 가지 세부적인 규칙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규칙의 잎이 무성했어도 하나님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의의 열매, 평강의 열매, 거룩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런 나무는 주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들으십시오. 3일째 아침에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바로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튿째 날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미 하루 전에 예루살렘 성의 형편을 다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거침없이 행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제물을 사는 사람들을 도와주던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제물이 되었던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상도 둘어 엎으셨습니다.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필요했던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멀리서 가져오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 안에서 제물을 사고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비둘기를 준비하는 것도 여의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역시 성전 안에서 돈을 주고 제물을 사는 것이 얼마나 합리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 행해지던 모든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필요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모든 행위가 잎만 무성한 것이라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기를 원하셨던 것은 단순합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막11:17a) 성전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대로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행해지던 모든 일을 깨끗케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단순하게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기도를 빼앗아가고 예배만을 지키는 습관을 깨뜨리시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빼앗기고 교회 일만 벌이는 행실은 하나님께 저주받을 일이라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잎만 무성한 나무는 뿌리째 말라버리게 될 것입니다. 잎이라도 없으면 상관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잎만 무성한 나무는 그 뿌리조차 말라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면 알게 하실 일이지만,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구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하신 이 말씀은 평범한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심은 전혀 평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단 한 사람도 단 한 명의 종교지도자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문제삼은 적이 없습니다. 그 일들은 당연한 순서였고 마땅한 규칙이었습니다. 성전을 깨끗케 하시고 상을 둘러엎는 일은 아무에게도 지지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 산같이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그 산이 옮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까짓 상 몇 개 엎고 장사꾼 몇 내쫓아버린다고 새 세상이 오겠습니까. 말세에 교회조차 타락하는 시대에 우리의 작은 행동이 온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서서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신다. 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야疏野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촌스럽고 투박한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야인취野人趣라고도 합니다. 솔직하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품격입니다. 물론 정제되고 세련된 것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오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고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세련되고 잘 갖추어진 예배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부딪쳐 나가는 충돌 속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나가는 저돌적인 움직임에서 나옵니다. 세상에는 길들여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그리스도인, 바로 그 사람을 주님께서 쓰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를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세계 양궁이 한국 양궁을 견제하기 위해서 수많은 규정을 바꾸고 고쳐나갔어도 여전히 양궁의 금메달은 우리나라 선수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친절하고 상냥하게 풀어나갈지라도 우리는 그 거친 말씀대로 순종하는 법을 힘써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의 방법만이 소용되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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