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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삶(요1:1-18) 이정식 201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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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진리로 충만하십니다. 진리라는 말은 평소에 잘 쓰지 않지만, 왠지 알고 있는 것같기도 하고 대단한 말 같기도 합니다. 철학 사전에 보니까 아주 거창하게 정의를 해놓았습니다. '진리'는 '사고와 존재의 합치' 내지는 '개념과 실재의 일치'라고 합니다. 진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alētheia'는 본래 '은폐되지 않은 것, 드러나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존재 그 자체의 모습이 드러난 것'인데, 그와 같이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로고스'(이성)라고 말이죠. 철학 사전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있지만 성경에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대로 이루어지다'라는 말입니다. 더 줄이면 '성경대로'(고전15:3-4)입니다. 또 거꾸로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멘할 때 아멘은 '말씀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아멘의 사람들은 진리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을 경험합니다. 생각만으로 끝나버리는 일이 있는가 하면, 생각해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진리를 궁리하고 깨닫기 위해서 아주 노력을 많이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손무자를 읽고'라는 시에서 "이 세상 조화가 미묘하고 빈틈없어/누가 능히 그 연원을 살필 수 있나//신룡이 머리를 한 번 흔들면/연못의 잔고기가 시름에 잠기고//온갖 귀신 거리에 날뛰다가도/푸른 바다 아침 해가 돋는 법인데//때로는 이 이치가 어긋나기도 해/모진 환난 당할까 두렵긴 하나//차분한 마음으로 명교를 따르노니/이 즐거움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라고 읊조렸습니다. 세상 만물은 정상적일 때는 요동치는 사건이 있어도 푸른 바다는 여전하고 아침해는 여전히 돋아오르는 질서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질서와 이치가 어긋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긋날 때에는 사람이 헤아려보는 이치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치, 하나님의 말씀은 어긋나는 법이 없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 삶의 확실한 방향을 얻기 원한다면 진리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견고하고 확실하며 안정감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1-2). 물론 그 선택이 우리를 더욱 깊은 곤란으로 끌고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도 우리 마음이 그 상황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두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담대함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 자신의 옳다 하는 것을 선택하면, 그 경우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결과를 얻는다 해도 여전히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진리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루어진 것같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어진 집은 반석 위에 세운 집이 아니라 모래 위에 세운 집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말씀으로 풍성한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은 은혜로 충만하십니다.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먼저 계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니라"(요1:15)고 했습니다. 실제로는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보다 먼저 계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먼저 계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지금부터 약 3000년전의 사람이지만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계시고 인류의 조상 아담보다도 더 먼저 계십니다. 그분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유일하신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궁리해서 찾을 수 있는 어떤 근원보다도 근원이신 하나님, 모든 만물이 그에게서 말미암고 그로 말미암아 지어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 우리 마음 속 진실이 아무리 진실하다고 하여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뒷전으로 밀쳐놓아야 하는 하나님, 각 사람의 인생철학이 아무리 위대하여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날릴 수밖에 없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계시는 것이 왜 은혜가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따를만한 어떤 사람보다도 따를만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연거푸 실망해서 낙담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가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은 예수께서 태초부터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싫다 하고 이치를 쫓고 철학을 쫓다가 그 해답없음에 놀라고 그 허망함에 낙심한 사람에게도 여전히 예수께서는 소망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원주인이기 때문입니다. 2대가 변질된다고 해도 1대는 좀처럼 변질되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1대가 아니라 근원이십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변함이 없고 그분의 전능하심에는 손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먼저 계시는 이 사실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두 번째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은혜'입니다. 모든 만물은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습니다. 종류대로 창조된 씨는 자라 열매가 되고 그 열매가 다시 씨를 품어 또 자랍니다. 모든 사람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납니다. 자식은 부모의 DNA를 고루고루 물려받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천부적인 성품과 자질을 물려받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부모를 더욱 닮아갑니다. 걸음걸이도 닮고 하품하는 모습도 닮고 심지어 자는 습관도 닮습니다. 40전에는 잘 몰랐지만 40이 지나고 나니까 코고는 모습이 아버지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좋은 것도 닮고 닮지 말아도 될 것도 닮습니다. 이것이 혈통이요 이것이 육정이요 이것이 사람의 뜻으로 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이것이 자랑이기도 하고 으쓱할 재주가 되기도 하지만, 소망이 되지는 않습니다. 살아갈 방편 가운데 하나가 되기는 하지만, 나와 타인을 향한 빛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것으로는 죽음도 이기지 못하고 그것으로는 어색한 타인과의 거리도 좁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빛이 되며 소금이 되며 소망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전능함입니다. 우리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구전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신선들은 인간계에 잠깐 왔다 갈 뿐입니다. 우리로서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갈 수 없으며, 설령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올라간다고 해도 천국의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길을 내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 예수 이름을 믿는"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동일한 권능으로 연약하고 죄악된 사람의 믿음, 오직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제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빛이 전수되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합니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소망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우리가 소망이 되기까지 합니다.

  예수께 있는 세 번째 은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 은혜'입니다. 모든 것 되신 말씀이 한낱 육신이 되셨습니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113: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수준이 맞아야 함께 합니다. 도올 김용옥은 포장마차에서 만난 사람이라도 수준이 맞아야 이야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수준이 맞지 않으면 어색해합니다. 탁구도 수준이 맞아야 서로 맞받아 넘겨주는 맛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수 높은 사람하고 쳐야 실력이 늡니다. 못한 사람과 치면 실력이 줄어들고 재미도 없습니다. 또 우리는 말합니다. 근묵자흑이라. 검은 무리와 함께 놀면 어느새 자신도 탁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사람의 수준 차이는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깨닫지도 못하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 오셨어도 아무도 영접하지 않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0-11). 만드신 그분이 오셨는데도, 왕이 오셨고 주인이 오셨는데도, 일어나 기쁘게 맞이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고얀 놈들입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도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들어와도 알은 체도 하지 않고 무시하기까지 하는 못된 놈들입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오셔서 신선처럼 선녀처럼 잠깐 있다 올라가지 않으시고, 아예 거처를 정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지 않다면 주님께서 세상의 영향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흠없고 점없이 온전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에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주 예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b)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의 은혜러라"(요1:16). 은혜 위의 은혜가 무슨 말일까 은혜 위에 또 더 높은 은혜가 있다는 말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혜 위의 은혜라는 말은 계속 잇따르는 은혜(one after another)라는 말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간구에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차고 넘치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1:7)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하나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각 사람에게 비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비추십니다. 만약 그분의 은혜가 생기다 만 은혜였다면 어떻게 이 사람들을 한결같이 대할 수 있겠습니까! 간당간당 될똥말똥한 은혜만 가지고 계시다면 어떻게 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용서에 대하여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마18:21). 보통 사람은 세 번 참기도 어려운데 랍비의 가르침의 최대한이 일곱 번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최선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은혜만 가졌다면 어찌 모든 사람의 죄와 불순종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심은 예수의 가지신 은혜의 충만을 말하며,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무리들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고 말씀했습니다. 2014년도 교회의 표어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해"입니다. 그에 따른 실천 사항으로는 첫째,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둘째, 교회 일에 참여하기 셋째, 선교에 동참하기입니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일락과 자기 인생만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에 통하고 만사에 통하는 말씀입니다. 바다보다도 하늘보다도 더 크고 광대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일에 쓰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쓰여야 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세상 속에 흘러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교에 동참해야겠습니다.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선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다 주 예수의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국내이든 국외이든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의 충만함이 예수 이름으로 전파되는 일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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