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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믿음이 바라보는 것(막6:1-13) 이정식 201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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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은 무언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무엇이든지 '되리라' 하는 사람은 되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안 되리라' 하는 사람은 안 될 것만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되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안 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바라는 것을 실상이 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실한 증거가 되게 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증거가 있어야 믿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이 곧 증거라는 것을 압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라고 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믿음의 시작은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 사역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하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전하셨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고향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놀라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어찌됨이냐"(막6:2b) 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그동안 바닷가를 다니면서 나타난 권능들에 대해서 말씀했을 것입니다. 열병이 떠나간 이야기, 중풍병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야기, 문둥병 환자가 나은 이야기,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간증으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어찌됨이냐"라고 놀라며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섬길 수 없는 이유 세 가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할 수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이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 첫째는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거기서 지혜와 키가 자라셨다고 했으니까 예수님의 지혜가 연약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였으니까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요셉과 마리아를 잘 알고, 또 그 집 아이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동네를 떠났던 기간은 길어봐야 3년입니다. 30년을 보아온 사람이 3년 동안 외지를 다니다 돌아왔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예수님의 고향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할 것입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을 행하든, 당신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다'.

  이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감사하게도 예수님을 우리 동네에서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 동네 사람들처럼 사람 예수에 대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다. 마리아가 육신으로 낳았지만, 하나님께서 낳으셨다. 청년이 된 후에 목수의 직업을 가지셨지만, 그분의 원래 직업과 직무는 구원자요, 메시야요, 그리스도시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며 따를 수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본 두 번째 사실은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 네 사람이나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난 형제였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이 가정의 장남으로서 30년을 그들과 같이 살며 같은 일을 하며 사셨습니다. 훤히 알고 있습니다. 이 가족의 습관, 이 가족의 병력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네가 비록 지혜가 있다 하고 권능을 베푼다고 하지만 우리는 네가 네 형제들의 큰 형일 뿐인 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네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맏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독생 하신 아들은 '외아들'이라는 통상적인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도 있을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주실 유일하신 하나님의 맏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본 세 번째 사실은 "그 누이들이 여기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여동생도 있었습니다.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아서 그런지 "우리와 함께 여기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누이동생들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이들의 습관이나 행동거지나 태도가 다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계시는 사실을 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사실을 예수님께로부터 보기 때문에 그를 섬기며 그를 기쁨으로 영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안다고 했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뭔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속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가족들이 특히 많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인정받기는 쉽지만 나를 잘 아는 가족에게 인정받기를 쉽지 않습니다.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하면 '어'가 뒤따라 나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습관이 있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가 하나님의 딸이라는 사실을 바라볼 수 있기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존경하며 존중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바로 나 자신에 대해서 함부로 대하고 낮추어 생각하고 때로는 멸시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어떤 누구보다 나의 실패, 나의 떨리는 마음, 나의 변하지 않는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고 할지라도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고향 사람들이 행한 일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배척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존경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막6:4) 그들을 꾸짖으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은 사람의 정으로는 돌아가고 싶은 곳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 빛된 삶을 사는 데는 도리어 훼방이 되기도 합니다. 연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통탄할 일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막6:5) 예수님은 아무 권능도 더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을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하나이십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할 수조차 없는 딸을 명하여 '일어나라' 명하셨고 그 말씀을 따라 그 딸이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귀한 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권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실제로 역사하도록 하는 힘이 권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신 후에는 사람과 함께 은혜의 일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구하면, 하늘에서 응답해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요 영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고,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권능을 행하실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을 오랫동안 사모하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을 새롭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이 가운데 예수님을 세상 선생 중에 하나라고 믿는 사람이 있거나,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처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위대한 교훈을 하고 죽은 위대한 현자 중에 하나로 믿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시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권능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사람들의 반응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놀라시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그 첫째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셨을 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직접 가지 않으셔도 말씀만 하시면 낫겠나이다"라고 이방인이었던 그가 믿음을 보였을 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놀란 듯이 칭찬하셨습니다. 그 둘째가 바로 오늘인데 이번에 놀라신 것은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막6:6). '저들이 구원을 위해 온 나를 배척하고 거절하다니, 그들이 어찌 자기 영혼을 배척하고 있는가. 마지막 날에 저들의 영혼이 어찌 될 것인가'하고 주님께서 오히려 놀라시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고향을 떠나가시면서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에 파송하시면서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약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막6:8)고 하셨습니다. 허락하신 것은 지팡이와 신발 한 켤레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는 사람도 의지하지 말고, 공연히 아는 사람들에게 간다고 고향에 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막6:10)고 하셨습니다. 이제 고향은 우리가 태어난 곳이나 자란 곳이 아니라, 너희가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그 집이 바로 너희의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막6:11)고 하셨습니다. 영접하지도 않고 제자들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고향 사람들에게 더 이상 권능을 베풀지 않고 떠나온 것처럼 행하라. 그러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네가 모년 모월 모처에서 내 전도자를 영접지 않고 그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자, 그 전도자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낸 이것이 네게 증거가 되느니라' 하시면서 영접한 사람은 영원한 나라에 들이시고, 영접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저는 누구입니까?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저에게 여러분은 또한 누구입니까? 아무개 집의 아무개 아들, 아무개 딸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보다 더욱 뛰어난 사실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를 존경하며 하나님께 은혜와 권능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한 주간 동안 변하지 않았고, 1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3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1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계속 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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