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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달리다굼(막5:21-43) 이정식 201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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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인들의 인기는 바람과 같다고 말하지만 인기를 끄는 사람이 되는 일은 마음 속 깊은 욕망입니다. 누군가에게 부러운 시선을 받는다는 것 기분 좋은 일입니다. 수많은 관중들이 보내는 환호를 받으면 가슴이 터질듯한 감격이 생깁니다. 박지성이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트레포드에서 강호 첼시를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렸습니다. 그 순간 운동장이 떠나가라는 홈팬들의 환호는 방송으로 듣기만 해도 울컥할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은 바로 그런 맛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대 위의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뛰어나고 싶고 누구보다 잘 나가고 싶은 욕망이 우리를 자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욕망도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사람들이 가장 원하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의 결점, 우리의 치부, 우리의 감추고 싶은 일이 나타날 때 그렇습니다. 남들이 알아챌까봐 염려하고 숨기고 싶습니다. 멀쩡하고 훤칠하여 다 부러워하는데 그 몸에 낫지 못하는 병이 있습니다. 출세가도를 달리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 싶은 딸이 사경을 헤매는 것입니다. 악착같이 살아서 많은 돈을 모아 좋은 옷과 화려한 비주얼로 단장하지만 옷 속에 감추어진 병이 있습니다. 언뜻 남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자기는 언제나 의식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무엇이라 할까요. 성공한 실패자라고 부를까요, 매력적인 루저라고 부를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저마다의 자랑이 있는 한편, 저마다의 아픔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삶의 밝은 부분인 명(明)도 있고 내 삶에 어두운 부분인 암(暗)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략 반반이라면 대충 살 수 있겠는데, 어느 순간 어두움이 밝은 부분을 다 덮어버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심지어 죽음이 삶을 덮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어린 아이를 통해서 지혜를 배우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몇날 며칠을 바닷가 동네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바닷가 또 다른 동네로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 야이로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회당의 장이었는데 이는 회당 건물과 예배를 감독하는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배를 하러 오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그에게 절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보고 누구보다도 앞에 나아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기 체면도 상관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리고 많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간곡히 부탁하는 것입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막5:23). 성경이 너무 점잖게 말씀하고 있지만 이런 말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저는 다른 소망 없습니다. 내 인생 살만큼 살았습니다. 명예도 맛보았고 지위도 맛보았고 인기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 소용없습니다. 내 딸이 이대로 죽는다면 나는 머리 둘 곳도, 갈 곳도, 더 이상 살 이유도 없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예수님!" 

  예수님께서 그의 간청을 듣고 야이로의 딸이 있는 집으로 함께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사람에게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에 아무도 모르게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막5:25)인데, 이 여인이 가진 병은 속병이며, 여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싫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사실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돈이 많았거든요. 26절에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빼고는 다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웬만한 질병은 다 병원에 찾아가면 낫게 되고 돈을 주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웬만하지 않는 질병, '큰일났다'는 느낌이 오는 질병은 쉽지 않습니다. 옛날 사람이었다면 그 흔한 병원에 가보지 못해서 자녀를 잃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많은 의원에게 찾아가 보았다고 했습니다. 단지 많은 의원이었겠습니까? 좀더 용하다는 의원, '그 병원 좋다더라' '그 의사 용하다더라' 하는 말을 듣고, 더 나은 병원 더 좋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만한 재산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중하여졌던 차에"(막5:26) 하지만 있던 재산을 다 쓰고도 병은 고쳐지지 않았고, 더 심해져갈 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잠언 말씀에는 "부자는 재물로 자기 생명을 구할 수 있다"(잠13:8)고 했는데, 혈루병 여인이 다른 건 다 재물로 고칠 수 있었지만, 혈루병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이 여인이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예수님 근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자기를 감출 수 있었습니다. 야이로는 자기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딸을 위한 간구였기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와서 드러내놓고 예수님께 구할 수 있었지만, 이 여인은 드러낼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님도 모르고 서로 에워싸 밀치는 군중들도 모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고칠 수 없는 것을 많은 세월, 많은 의사, 많은 돈을 쓴 후에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분의 옷에 손만 댄다고 하더라도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이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야이로는 "제 딸에게 가서 손을 얹어 살게 해달라"는 믿음이 있었고, 이 여인은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같은 믿음입니다. 예수께 가면 나을 수 있다, 예수께 가면 살 수 있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5:29). 아무도 모르게 손 대고 아무도 모르게 병이 곧 나았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셨습니다. 여인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초지종을 다 말하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막5:34).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믿는 구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지극한 일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짧은 두 사건 속에는 이런 단어들로 꽉 차있습니다. '큰 무리'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죽게 되었사오니' '에워싸 밀더라' '앓는' '많은 괴로움' '다 허비' '더 중하여졌던' '두려워하며 떨며' '죽었나이다' '괴롭게 하나이까' '두려워 말고' '허락지 아니하시고' '심히 통곡함' '비웃더라'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많이 경계하시고'(막5:21-43참조). 쉼을 주고 평정을 주고 아름다움을 주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 졸이게 하고 갈등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주위에는 분명한 감정의 충돌이 나타나고 소란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기 오신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이 오셨는데 어찌 들썩이는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점잖고 편안하게 해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고 '믿음' 이라는 두 단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와 믿음'이라는 이 두 말만으로 '살고' '구원을 얻고' '낫고' '건강할찌'며 '일어나는' 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야이로나 혈루병 여인이나 사실은 얼마 안 되는 믿음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찾아오는 믿음, 예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이 놀라운 일을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실 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막5:35)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야이로가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할 때는 소망이 있었는데, 이제 죽었다고 하니 소망이 없습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두렵고 안타까웠습니다. 무슨 천벌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천하의 예수님이라도 이 일만은 어떻게 하겠느냐 생각이 스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하는 말을 듣고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만 데리고 야이로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집안 사람들이 다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잔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도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며 종말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죽음은 자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무덤에 있는 모든 죽은 자도 일어나게 됩니다. 창조하신 분께서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살 수 있는 죽음이라면 자는 것입니다. 다시 깨어날 수 있는 죽음이라면 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이로의 딸이 죽고 몸은 식은 것을 아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말을 듣고 있던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서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명하셨고, 그 명을 받고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말하기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 딸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거의 죽을뻔한 것 아니라 다만 죽었습니다. 생각도 없고 감각도 없고 심장도 멎었고 뇌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야이로의 딸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딸에게 임할 수 있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은혜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달리다굼!" "딸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때의 믿음은 누구의 믿음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언제인가 하면 우리가 죄로 죽었을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아무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을 때 친히 그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믿음이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시며, 그 믿음이 믿는 자의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의 능력은 누구의 능력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하나인 온전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이로의 딸이 받아누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놀라운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고 소망도 없이 그저 이 세상 속에 살면서 낙담하고 실망하고 체념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다른 일은 잘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죽은 자처럼 아무런 감각도 느낌도 없이 살아오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야이로의 딸보다 처지가 좀 낫습니다. 우리는 제정신이 있고 살아있고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예수님께 부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수도 있습니다. 어릴 적에 가지고 있던 소망과 기쁨과 환희와 평안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살아나라 일어나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잠15:15) 고난이 사방으로 있어 험악한 날들이 계속되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시고 은혜 베푸시면 잔치하듯 즐거운 마음이 우리 속에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전한데도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와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 마음에 결합되는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얼마 안 되는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어설프게나마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확실하신 믿음이여러분과 저의 마음 속에 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크고 놀라운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1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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