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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 예수님의 조용한 명령(막5:1-20) 이정식 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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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하셨습니다. 몇 시간 전에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신 주님께서 배에서 내리셨습니다. 어촌 구경을 할 틈도 없이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상인이 아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막5:2a)이었고 무덤 사이에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는 곳이 제 집이 아니고 다리 밑도 아닌 무덤 사이었습니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막5:5)고 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무덤 사이에 있거나 산에 올라가서는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돌로 자해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동네에 수시로 나타난다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없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아주 무섭기도 할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니까 사람들이 동네에 못 내려오도록 그를 쇠고랑에 채우고 쇠사슬에 묶어버렸습니다. 무도를 연마하고 힘깨나 쓰는 역사(力士)라도 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잡아서 채우고 묶는 일이 얼마나 가관이었을까요? 난동을 부렸을 것입니다. 애써 묶어 놓고 '이제 됐다!'하고 내려와서는 '속 시끄럽던 일이 끝났으니 동네가 조용하겠다'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리고 또 내려와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다음 번에는 더 강한 쇠사슬과 쇠고랑을 가지고 올라가서 묶었습니다. 그래도 또 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결국 성경은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막5:4b)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 십중팔구는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조차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내년에도 좀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못된 습관도 내 의지로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일이 이런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 전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으며,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우주 속에 먼지처럼 작고 약한데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새사람이 될 수 있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역마살이 끼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고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허망함 때문에 술에 쩔어 사는 사람도 고칠 수 있습니다. 담배를 끊는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는 애연가들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소망이 끊어져서 낙담과 우울에 오래토록 고생하는 사람도 고칠 수 있습니다. 눈 앞에 담뱃값을 두고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꾸짖으면 바람도 바다도 잠잠케 됩니다. 예수님이 꾸짖으면 우리 정신과 영혼을 꽉 잡고 있는 더러운 영과 죄의 영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사람이 짓는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조차도 완전히 의로우셨던 예수님을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주님, 다시 사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다시 살게 됩니다. 사람은 제어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제어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듣고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야 합니다. 전에는 거듭나는 일이 자주 있었고 구원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요즈음은 드물게 일어납니다. 구원을 위해 애쓰며 마음 졸이며 기도하며 애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구원을 사모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고는 신앙생활의 아무런 기쁨과 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구원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온 천지가 다 없어지더라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영원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말씀해주고 있는데, 잘 보고 구원을 사모하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마7: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다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동네의 문제거리였던 귀신 들린 사람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목적도 없이 소리지르고 몸을 상하게 하던 사람이 무슨 목적이 생긴 것같습니다. 달려와서는 예수님께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괴로워하면서 간절히 구하는 말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막5:7) 이 사람과 예수님은 서로 만난 적도 없습니다. 옷깃을 스치며 지나친 적도 없습니다. 다짜고짜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런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데,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실 때부터 뭔가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배에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내리기 위해서 발을 디딜 때부터 벌써 우리 주님은 이 사람을 아신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만 아니라 그 사람 속에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게 하고 몸을 돌로 상하게 하는 더러운 귀신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지방에 발을 내디딜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듣지 못하고 그 귀신만 들을 수 있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5:8).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친구따라 교회에 왔든, 누구의 전도를 통해서 교회에 왔든, 여러분이 처음 교회에 올 때부터 주님께서는 여러분들 마음 속에 명령하십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듣지 못하고 오직 나의 영만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조용한 명령을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을 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깨끗한 영을 받으라고 처음부터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나의 영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우리의 못된 습관, 세상 정욕, 더러운 귀신이 모두 우리를 떠나기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좀 새로워지고 싶은데 잘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들이 계속 내 몸 안에 내 정신 안에 내 영 안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막5:9). 이제야 사람들이 쇠사슬로 묶고 쇠고랑을 채웠어도 끊고 또 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한두 귀신이 아니라 군대 귀신이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이천 마리나 되는 떼라고 했으니까 돼지도 2천 마리였고 이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의 군대도 2천 귀신이었을 것입니다. 귀신, 곧 더러운 영의 소원은 사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막5:10).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첫 발을 내디딜 때 벌써 그 지방의 영적 상황을 다 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귀신의 군대가 소원을 말하기를 저 멀리 돼지의 큰 떼가 있는 것을 보고는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막5:12)하며 빌었습니다. 사람들도 정든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는데, 귀신들도 그런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시니까 더러운 귀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우리 속에 악한 것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들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우리 안에 죄악된 마음이 떠나갑니다. 그런 마음이 나타날지라도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가라고 하면 귀신은 나가야 합니다. 심지어 좀 움직이려고 해도 예수님이 허락하실 때에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군대귀신의 요구를 허락하셨습니다. 군대귀신이 돼지떼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돼지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산 곁에서 한가롭게 먹고 있던 2천 마리의 돼지떼가 갑자기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거기는 완만한 모래해변이 아니라 낭떠러지가 있는 비탈이었습니다. 돼지떼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또 떨어져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하고 바다에서 몰사하였습니다. 더러운 영이 돼지에게 들어가도 돼지가 정상적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그 많던 군대귀신이 들어갔으니 그 사람의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귀신은 속이고 거짓말하여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악한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기 원하는 것은 모든 더러운 것을 명하여 없이 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보고 교훈을 얻으라'는 뜻입니다. 돼지가 저렇게 몰사하는 것처럼,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이 어떠할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결국 우리를 어떻게 망하게 하는지 잘 보라는 것입니다. 그냥 살려고 한다면 돼지도 그냥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은 속이고 거짓말하고 죽이려고 하는 영일 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계셔야 하겠습니까, 더러운 귀신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 이 가좌리에 예수님의 영이 계셔야 하겠습니까, 더러운 귀신의 영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술 마시고 외도하고 가정불화하고 우상숭배하는 동네가 되어야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하며 뭇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동네가 되어야겠습니까. 주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주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일 놀란 사람들은 돼지를 치던 목동들이었습니다. 멀쩡하던 돼지들이 눈 앞에서 몰사하는 것을 보고는 도망을 가서 읍내에 알리고 다른 마을에도 알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하고 확인하러 왔습니다. 예수님 앞에 와 보니까 그 귀신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져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쇠사슬에 묶어도 쇠고랑에 채워도 끊어버리던 사람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겼더라면 그가 회복된 모습을 보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실 때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홍해바다가 다시 한 번 갈라진다고 해도 못 믿을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회개하면 축복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회복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았고 무정했기 때문에 방해만 안 되면 좋을 정도의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눈은 딴 데 있었습니다. 그 마을의 주된 소득원이었던 돼지떼가 몰사한 일이었습니다. 손해가 나도 많은 손해가 난 것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서 받는 손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귀신은 우리를 결국 멸망케 한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기 않고, 원래대로 가만 놔 두었을 때 인생의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해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신경했습니다. 오직 눈앞의 손실 2천 마리 돼지값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창조주께서 더러운 것들, 악한 것들,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들을 없이하기 위해서 그 마을과 그 사람에게 찾아오셨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그 마을에서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막5:17). 군대 귀신 들린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 예수를 자기 동네에서 쫓아내는 사람, 자기 마음에 계시지 못하도록 쫓아내는 사람입니다. 자기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만 관심을 두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에 비하면 성경의 욥은 얼마나 멋진 사람입니까? 아들 일곱 딸 셋, 양 7천, 낙타 3천, 소 5백, 암나귀 5백, 수많은 종이 있어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 제일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계략으로 하루아침에 이 모두를 잃어버렸습니다. 돼지 2천 마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 나를 떠나가시고 우리 동네에 더 이상 오지 마세요' 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도리어 찬양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 욥은 하나님 앞에서 내 영혼이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용납하시고 허락하신 모든 재난 앞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욥은 취하여 가신 분이 다시 주실 분이실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거라사 지방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주님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주님을 교회에서 몰아내고, 주님을 이 마을에서 몰아낸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를 하고, 말씀을 배우기 위해 책을 사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십의 일조를 드리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교회에 든든히 계시지 않으면 세상 영이 우리를 이끌어간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귀신 들렸으나 고침 받은 한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경제적인 손실 때문에 주님을 내어쫓았던마을 사람들이 되시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러분과 제 마음속에 조용히 명령하십니다. '어두움은 물러갈찌어다. 회개하고 나를 영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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