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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 27일> 예수께 사랑받는 사람(막2:13-28) | 이정식 | 2013-10-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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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8:6-7) 사랑은 이렇습니다. 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을 자가 누구일까요? 과연 누가 예수께 사랑받는 사람일까요? 
 1.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누구보다도 열심인 사람들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지키는가 시합을 한다면 일등 자리에 들 만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정결하기 위해서 만날 사람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정해놓았습니다. 만날 만한 사람은 거룩하기를 힘쓰는 사람이며,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어했습니다. 행여 깨끗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은 모습을 닮을까봐. 그 사람의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친밀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그 하나가 세리요 또 하나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인데 '일제앞잡이'처럼 매국노로 생각되는 사람이기도 했고, 또 세금을 거두는 일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자주 만나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자녀가 형편없는 친구, 생활이 지저분한 친구,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문란한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다면 좋아라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구삼을 만한 바리새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꺼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입니다. 세관에 앉아 일하는 레위를 부르신 후오 레위의 집에 앉아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대뜸 묻는 말이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2:16b). 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러워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듣고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도 옆에 선감도라는 조그마한 섬이 있습니다. 그 섬에는 일제 때 거리의 부랑아들을 모아놓은 수용 시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아이들이 끌려가 강제 노동도 하고 고문도 당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1982년까지 이 시설이 있었는데 일제 때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여기 한 소년이 끌려갔습니다. 그는 5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좀더 컸을 때 어머니도 재혼하여 그를 떠나갔습니다. 홀로 남아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눈치밥을 먹고 자랐습니다. 가슴 속에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의 적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60년대 중반쯤에 선감도에 끌려갔습니다. 몇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다시 붙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한 사람을 예비하셨습니다. 머나 먼 미국에서 라서다 선교사님이 한국에 와서는 오지와 소외된 지역을 찾아다니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소년이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선교사님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들 예수를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들려주었습니다. 세상에 한 번도 사랑이라는 것을 받지 못하고 살던 그 마음에 예수님의 복음은 그를 새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누가 봐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선감도에서 풀려나서 라서다 선교사님과 함께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지금 부산 주례성서침례교회를 섬기시는 김명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리이다"(시51:17)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 아닙니다. 균형잡힌 사람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칠전팔기로 일어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씨 좋고 인정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이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처럼 잘못된 길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정식아!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부를 때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부를 때 사시나무 떨듯 떠는 것입니다. 죄 지은 것처럼 떠는 것입니다.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품에 안으시고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고침을 얻고 나음을 받습니다. 
 2. 주 예수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로 유명한 바리새인들이 또 질문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금식은 하나님 앞에 자기 삶을 애통해하면서 정결케 되는 좋은 방법입니다. 금식은 세속에 물든 사람이 깨끗한 영혼을 추구할 때 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때 그 일은 기도와 금식으로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도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우리 신앙 생활을 점검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 쓰는 방법입니다. 거룩하게 되기를 힘쓰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을 즐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은 하나님께 깨끗이 나아가는 신앙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잔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받는 사람은 금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2:19-20). 이 세상 모든 여자가 가장 이쁠 때는 신부일 때입니다. 몇 달 전부터 신부화장을 준비하느라고 마사지도 하고 얼굴에 있는 모든 것을 깨끗이 치료받습니다. 얼굴에 빛이 납니다. 인생에 한 번 뿐인, 그리고 한 번 뿐이어야 할 그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신랑을 맞이하는 준비를 합니다. 가장 아름답게 가장 예쁘게 가장 고상하게 가장 매력있게 준비합니다. 사회자가 외칩니다. "오늘의 주인공 신부, 입장!" "딴딴따단 딴딴따단 딴딴따단따다단딴따단" 조금 거꾸로 됐습니다. 결혼식 하루만 최고로 예쁜 날이어라 기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본래 신랑이 주인공입니다. 남편이 아내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아내가 남편을 자랑하면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혼인 잔치를 하는 날에는 모두가 기뻐합니다. 잔칫날 애통하며 슬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신랑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모르고, 계속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랑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을 모르고 계속 언젠가 주님 만날꺼야 하면서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식은 신랑을 빼앗길 때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신랑이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이 있고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신랑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좀더 극적으로 말한다면 결혼식 중간에 신랑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신랑 없는 신부는 그날부터 과부입니다. 젊어서 혼자 살 때는 잘 모르지만, 결혼한 후에 신랑이 없으면 반쪽이 없는 아내입니다. 그러나 신랑이 있으면 온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신랑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은 낡은 율법의 금식으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 잔치하듯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 걱정입니다. 지식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힘이 없어 슬픕니다. 팔이 없어 고생이며 사지가 없어 괴롭습니다. 금식이라도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습니다. 금식이라도 해서 다른 집에만 흘러가는 복의 물꼬를 돌려놓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믿음이 씨가 마를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사랑이 오셨습니다. 그러니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함께 계시는 '지금이 좋은 날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다 가지신 아버지의 사랑이 영원히 내 곁에 있습니다. 
 3. 예수를 주主로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로 소문난 바리새인들이 볼 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너무도 이상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이삭을 꺾어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말씀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복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로 소문난 바리새인들은 성경대로 '아무 일도 하지 말라'하는 말씀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따서 먹기까지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막2:25-26).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은 율법에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에서와 같이 배가 고프면 팥죽 한 그릇에 매달리는 게 옳다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그렇게 무법하고 무리한 행동을 옳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십계명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신랑이 없이 내쫓겨난 사람들을 위한 명령입니다. 성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집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철저하게 지킨다고 하더라도 쫓겨난 사람입니다.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날의 주인이며 안식일에도 주인입니다. 주인과 함께 있으니 모두 주인 노릇하는 것입니다.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밀이삭을 자르는 제자들의 행동은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이 잘한 일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인이 없을 때 안식일 율법이 효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의 주인이 왔을 때는 그 법은 있으나마나입니다. 보디발 장군이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주인이 떠나갔을 때는 관리자가 지켜야 할 법에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보디발 장군이 자기 집에 돌아왔을 때는 그 법은 소용이 없습니다. 엄마아빠가 집을 떠날 때는 지켜야 할 일을 말합니다. 창문 걸어잠그고 문단속하고 가스 조심하고 보일러 잘 끄고 밥 하고 설거지하고 일찍 일어나서 버스타고 학교 가고... 하지만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오면 그 모든 목록들은 필요없습니다. 부모님이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쫓겨난 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함께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법망을 피해 이리저리 이익을 추구하면 법이 자꾸 많아집니다. 법이 많아지고 세부적이 되다 보면 나중에는 법관들도 혼란스럽고 사람들도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죄가 많을수록 법이 엄격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내려주셨을 때는 죄가 많을 때였습니다. 죄가 많았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쫓겨난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가 율법입니다. 안식일도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제7일을 안식일로 지키면서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집 농사 수천 년 지어도 내 농사는 아닙니다. 긴긴 세월 땅에서 천국으로 올라려고 애를 써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오셔서 땅에서 이미 천국의 주인되는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주인이 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요 서기관들이요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그토록 미움을 받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왔을 때 우리가 하는 유일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인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행동입니까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지키고 드리는 이유는 온 땅의 주인이요 천지의 주인되신 아버지와 함께 있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사람은 죄인이며, 주를 기뻐하는 사람이며, 예수께서 주인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막2:14) 어떻게 자기 직업에 열심히 살고 있던 레위가 예수님 한 마디에 일어나 쫓을 수 있었는지. 레위 머리 속에 있던 수많은 생각들, '돈을 모아서 자식을 위해 이렇게 쓰고 노후 준비를 이렇게 하고 이때쯤 여행도 좀 다니고 그 미래를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지' 하던 생각들이 모두 사라집니다. 이런 필요가 우리 삶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나를 부르셨고 사랑이 나를 부르셨고 믿음이 나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들었을 때 김명한 목사님은 자기 지은 죄가 문제가 아니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만이 그에게 남은 것이었습니다. 자기 모든 생애를 거기에 드리고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값으로 나를 부르시고 찾으시고 사셨다는 사실보다 그의 마음에 더 큰 일은 없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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